소설리스트

94화 대국적 입장 (94/148)


#94화 대국적 입장
2023.07.03.


이카르의 대답에 르네브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신기했다.

제대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제 마음을 척척 알아주는 이카르가.

세이렌 후작령을 직접 찾아가 세이렌 부자에게 이카르와의 결혼 허락을 받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일이 더 큰 문제였다.

세이렌 후작은 파라디움 제국민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황제의 개라며 깎아내리려 드는 귀족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마음만 먹으면 파라디움 황좌의 주인을 바꿔 버릴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황제의 견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세이렌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병을 키우는 데 지리적 특혜를 받는 세이렌 후작을 향한 일종의 시기가 반영되어 있다고 르네브는 생각했다.

하지만 파라디움 황제는 제국과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이렌 부자를 보호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보다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귀족.

그런 존재를 좋아할 황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황제는 다른 귀족들이 세이렌 후작을 헐뜯든 말든 그대로 방치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이렌 후작과 바슈케르의 황제가 사돈을 맺게 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맞게 될까?

심지어 바슈케르의 황제와 세이렌 후작의 여식이 정략혼도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파라디움의 황제에게 절대 무시하지 못할 강적이 생기는 셈이 된다.

세이렌 후작이 적국 황제를 등에 업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만약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바슈케르 황제가 파라디움의 서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더더욱.

세이렌 후작 가는 파라디움과 바슈케르의 평화에 크게 일조한 것이 되어 버린다.

파라디움의 제국민들이 호감이었던 세이렌 후작을 더욱더 칭송할 거란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두려워할 사람은 비단 파라디움의 황제만이 아닐 것이다.

전부터 세이렌 후작의 권세를 못마땅히 여기던 파라디움 귀족들이 이를 역이용할 가능성 또한 있었다.

세이렌 후작이 바슈케르 황제와 내통하고 파라디움의 서부를 내어 줄 거라는 식으로.

높이 나는 새의 추락이 분명 누군가에겐 득이 된다. 세이렌 후작이 실각하면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테니.

게다가 세이렌 후작을 건드린다고 해서 바슈케르의 황제가 직접 움직일 거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는 사랑이라는 열병과 광기에 쉽게 휩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의 가족이라고 해도 냉혈한으로 유명한 이카르가 전쟁까지도 불사할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 것이다.

득실을 따져 보고 실보다 득이 확실히 큰 경우에만 움직이는 게 파라디움 귀족들의 행동 방식이었다.

그래서 르네브는 방비 없이 세이렌 후작이 정적들에게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다.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고심하는 르네브의 이마에 촉, 가볍게 이카르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끈적이지 않는 아주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마치 걱정하는 르네브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듯한.

“……폐하?”

르네브는 눈을 들어 이카르와 시선을 맞췄다. 이카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분은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영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카르의 말 한마디에 르네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말씀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해요.”

“그럼 이제 걱정은 그만했으면 좋겠군. 지금 영애에게는 걱정을 하는 것 말고 또 다른 선택지가 있잖아?”

“다른 선택지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가령, 영애의 작은 머릿속을 내 생각으로 가득 채운다든지. 아니면,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는 어떤 걸 고를지, 목걸이는 뭘 사 달라고 조를지, 그런 것들.”

르네브는 엷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어떤 계획을 하셨는지 제게도 말씀해 주실 순 없나요?”

“음, 설명하기엔 조금 긴데…….”

말끝을 흐리며 이카르가 시계를 응시했다.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 보셔야 하나요?”

“이대로 영애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래야 할 것 같군.”

이카르의 목소리에서 아쉬운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벌써 그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운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이렌 부자의 허락을 구하려던 여파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붙잡진 않을게요.”

“그 말은…… 어서 가라는 말인가?”

이카르가 르네브의 허리를 휘감아 안으며 미간을 모았다.

이제 그만 집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건 맞지만, 르네브의 입에서 가라는 말을 듣는 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축 처진 눈꼬리를 하고 올려다보는 표정이 이카르답지 않게 양순했다.

그게 너무 예뻐 보여서 하마터면 르네브는 그를 붙잡을 뻔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저 속상해요.”

르네브는 부러 살짝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이카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속상하다니? 무엇 때문에?”

르네브는 이카르의 마른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폐하 마른 것 좀 보세요.”

원래도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오히려 이카르를 사연 있는 미남으로 보이게 했지만, 속상한 건 속상한 거였다.

“폐하께는 적절한 휴식이 필요해요. 그러니 쉬시려면 속히 처리할 일들부터 해결하셔야죠.”

르네브는 며칠 사이 조금 야윈 이카르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목을 가볍게 쥐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아쉬운 얼굴로 르네브를 바라보던 이카르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가긴 싫지만, 그만 가 봐야겠군.”

그러고 나서야 이카르가 르네브를 놓아주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폐하.”

르네브는 발끝을 세워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

순간 이카르의 붉은 눈이 커졌다. 곧 그가 미간을 모으고 심란한 투로 말했다.

“영애…… 내게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르네브에게 이카르가 말했다.

“영애가 이렇게 귀엽게 굴면 더더욱 내가 집무실로 돌아가기 힘들어진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

늦은 밤까지 업무를 해야 하는 이카르에게 미안했기에, 힘을 주려고 한 거였는데……. 역효과였나.

“알겠어요. 폐하, 앞으로는 자중할게요.”

“자중할 필요는 없어.”

르네브의 말에 이카르가 바로 반박했다. 그러고는 살짝 뺨을 내밀었다.

“입 맞춰 달라는 뜻인가요?”

“잘 아는군.”

이카르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 황궁 전경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회귀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우스와 결혼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많이 늦으시는군요.’

르네브는 바쁜 일상에 치여 한 달에 한 번 있어야 할 몸의 변화가 없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랭커스터 백작 부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황후 폐하,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네요.’

마침 결혼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루시우스의 태도를 신경 쓰고 있던 차였다.

루시우스가 벌써부터 자신과의 사이에서 권태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시녀들은 르네브에게 속살거렸다.

‘즐거웠던 신혼이 지나면 사내들은 종종 한눈을 팔고는 하지요.’

그래서 그녀는 언젠가는 루시우스의 마음도 변할 수 있다고, 그러니 그때가 오더라도 상처받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르네브는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랐었다.

하지만 결혼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둘 사이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어느 순간 루시우스는 변하기 시작했다.

확연히 드러날 만큼의 태도 변화는 아니었지만, 르네브는 물론 그녀의 주변을 항상 지키는 시녀들까지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피로로 황제 폐하께서 조금 예민해지신 거겠지요……?’

불안해하는 르네브의 말에 시녀들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임신 소식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가능성이 큽니다. 부디 주의해 주십시오.’

어느 때보다 반가운 아이의 존재에 르네브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루시우스와 르네브의 결혼은 일반적인 정략혼이 아니었다. 무려 마음이 있는 상대와의 결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의 아이라니.’

르네브의 시녀들은 언제나 이 부분을 부러워했다.

‘아이가 생기고 가정에 더 충실해지는 남자들도 있다고 하니까요!’

한 시녀의 말에 르네브도 희망을 품었다. 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산? 유산이라니요! 귀하고 귀한 황손이었다고요, 아시겠어요?’

르네브의 유산 소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그녀에게로 달려온 황비의 첫 마디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르네브에게 황비는 거침이 없었다.

‘대체 몸을 어떻게 다뤘기에…….’

모진 비난과 질책이 이어졌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배 속에서 아이가 죽어 버린 건 전부 르네브의 탓이라고,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르네브 또한 그렇게 믿었다.

자신이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거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때 설상가상으로 세이렌 후작의 사망 소식까지 더해졌다.

쏴아아아아-.

조금씩 굵어지던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르네브는 불쾌한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 때문에 그런가?”

감상적이 된 것 같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혹시 주무세요?”

앰버의 목소리에 르네브는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니, 아직. 무슨 일 있어?”

침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채로 앰버가 말했다.

“비가 와서 그런가,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네요. 밤새 벽난로 사정은 안녕한지 확인차 들렀어요.”

르네브는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괜찮아 보였으나, 새벽쯤이면 장작이 전부 꺼져 버릴 정도의 양이었다.

“잠들기 전에 와 보길 잘했네요.”

앰버가 벽난로 안에 마른 장작을 던져 넣었다. 부지깽이로 벽난로 안을 뒤적여 장작을 골고루 배치한 앰버가 마른 수건에 손을 쓱쓱 닦으며 물었다.

“아가씨, 잠이 안 오세요?”

“아냐. 이제 자려고.”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자.”

“목 끝까지 이불 덮으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약간의 잔소리를 늘어놓은 앰버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알았어.”

침실을 나가려던 앰버가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참! 내일쯤이면 파라디움에서 편지가 도착하겠네요.”

르네브는 최근 다소 강박적으로 세이렌 후작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과거를 바꾸고 싶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에 세이렌 후작이 전장에서 죽었던 그 사건을.

그때는 자신의 불행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지만…….

이번은 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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