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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원작처럼 (92/148)


#92화 원작처럼
2023.07.01.


에시카는 속으로만 히죽 웃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저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이제 루시우스에게 춤 신청만 받으면 되는데…….’

에시카는 천천히 연회 홀 안을 둘러봤다.

하지만 루시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에시카는 속으로만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바슈케르의 황궁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생활해 본 경험 탓에 웬만한 귀족 가문의 영식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니 꼭 루시우스의 눈에 들어야만 했다. 바슈케르에서처럼 호화롭게 지내려면.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였던가? 그 사람은 지금 어딨지?’

에시카는 제 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식들을 지나쳐 영애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사람은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야.’

에시카는 원작에서 언급되었던 특징을 떠올리며 빠르게 오늘 데뷔탕트를 맞는 영애들을 꼼꼼히 훑어 내렸다.

그러다 잔뜩 긴장했는지 어깨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고 가녀린 체구의 영애에게 에시카의 시선이 멎었다.

‘찾았다.’

샹들리에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장미 브로치를 발견한 에시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원작에서도 에시카는 예쁜 장미 브로치에 시선을 빼앗겨 그녀를 잠깐 주시한다. 자신도 저런 걸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그녀의 얼굴로 시선이 향한 순간 깨닫는다. 영애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하다는 걸.

‘그럼 이 사람이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겠구나. 원작대로네.’

오늘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은 저마다 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치장했다.

그리고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의 장점은 가느다란 한 줌 허리였다.

가슴께에는 여러 겹의 프릴을 겹쳐 놓았고, 허리 아래는 넓게 부풀린 형태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법 똑똑하네.’

자연히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돋보이는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바짝 조인 코르셋의 역할이 컸다.

편안한 호흡은커녕 깔딱깔딱 숨을 쉬어야 할 만큼 흉곽이 압박된 채로 한참 있었으니, 호흡 곤란이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척 보아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애들에게 데뷔탕트는 일생 한 번이었고, 이때 반드시 다른 귀족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이는 차후 사교계의 인사이더가 될 것인가 아웃사이더가 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혼인과도 직결되었으니 말이다.

에시카는 주변의 귀족들을 힐끗거리며 의문을 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째서 아무도 영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거지?’

살짝살짝 휘청거리는 것이 누가 봐도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지금도 누구도 그녀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혼절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사실 안색이 좋지 않다며 휴식을 권하는 말 정도는 에시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기다렸다.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가 현기증으로 기절할 때까지.

그때였다.

미간을 잔뜩 모은 채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가 휘청였다.

때마침 에시카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던 영식 중 한 명이 호기롭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뵙습니다. 영애. 저는 코헤겐 자작 가의 장남…….”

에시카의 앞으로 다가온 영식이 대뜸 자기소개를 했다. 순간 비틀거리던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

말을 거는 영식을 뒤로한 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영애 쪽으로 다가간 에시카는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영애? 괜찮으세요?”

“별일 아니에요.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뱉은 말과 달리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의 몸이 에시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휴식을 취하러 가시는 건 어떠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지만, 제가 빈혈을 자주 겪거든요.”

에시카의 권유에도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가 괜찮다고 손사래 치며 덧붙였다.

“이러다 금방 괜찮아지곤 하니까 너무 마음 쓰실 필요…….”

하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자연히 그녀의 체중을 지탱해야 하는 건 에시카의 몫이 되었다.

‘아니, 왜 이렇게 무거워…….’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정신을 잃은 성인 여성을 에시카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에시카는 절로 부들부들 떨려 오는 팔로 간신히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늘 데뷔탕트를 맞이한 영애들은 힘겹게 준비한 드레스나 머리가 망가지는 걸 걱정하는 것 같았고, 영식들은 미혼의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들 진짜로 답답하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강 건너 불구경하려 드는 그들의 행태가 제법 우스웠다.

하지만 에시카에게는 이편이 이득이었다. 루시우스가 이쪽으로 오기 전까지 소란이 마무리되면 안 되었으니까.

원작에서처럼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를 돕는 과정에서 에시카는 루시우스의 관심을 끌어야만 했다.

원작의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바짝 조인 코르셋의 여파로 힘들어하다 결국, 혼절해 버린다.

“시종! 시종을 불러 영애를 옮기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모두 방관하는 와중에도 제정신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시카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에시카에게 말을 걸어왔던 코헤겐 자작 영식이었다.

물론 그 역시 나서서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를 부축하려 들진 않았다.

입만 놀릴 뿐.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누가 좀 시종을 불러오시겠어요?”

다른 영애가 거들자 그제야 근처에 서서 이쪽 상황을 보고만 있던 다른 영식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자네. 이리 좀 와 보게.”

영식의 부름에 시종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때였다.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근처에 있는 영식들보다 반 뼘은 큰 미남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기다리던 이의 등장이었다.

‘루시우스!’

에시카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에시카는 그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곤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의 뺨을 찰싹 때렸다.

“영애, 영애!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잠깐. 어떻게 된 거지?”

루시우스가 물었다.

“오늘따라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영애께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어요.”

에시카는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우스를 올려다봤다.

그런 에시카를 잠시 내려다보던 루시우스가 이내 건장한 체격의 시종을 지목했다.

“자네는 영애를 개인실로 모시도록.”

“예, 황자 전하.”

루시우스에게 지목당한 시종이 정신을 잃은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를 등에 업었다.

“자네는 황궁의를 불러오도록.”

루시우스가 곧장 다른 시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

시종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남겨진 이들을 향해 루시우스가 물었다.

“저 영애는 어느 가문 사람이지?”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그게 답답했는지 루시우스의 미간이 모였다.

“아무도 모르는 건가?”

“…….”

그때 에시카가 말했다.

“저분은 암브로시아 남작 가문 영애세요.”

루시우스가 잠시 에시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루시우스가 다른 시종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암브로시아 남작에게 여식의 소식을 알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확실히 루시우스가 등장하자마자 빠르게 상황이 수습되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루시우스가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돌렸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에시카는 그가 떠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저 황자 전하,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감사? 그대가 어째서?”

루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기울이며 반문했다.

‘뭐지……? 원작에선 에시카에게 루시우스가 첫눈에 반했다고 했는데…….’

어딘지 냉랭한 루시우스의 반응에 조금 기가 죽었지만, 에시카는 황급히 덧붙였다.

“상당히 곤란한 참이었는데, 황자 전하께서 도움을 주셨거든요.”

에시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루시우스가 이내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영애는 아까 그 영애와 초면이 아니었나?”

“……예.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제 친구예요. 오늘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니 결국…….”

에시카는 처연한 표정으로 연회 홀을 빠져나가는 시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시종의 등에 업힌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딱하게 되었네.’

에시카는 속으로만 쯧쯧 혀를 찼다.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오늘 데뷔탕트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최선을 다해 애써 괜찮은 척 어지럼증을 참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귀족들의 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이었다. 가문 외에도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이 있겠지만, 신체적 결함이 있는 건 명백히 불리했다.

이로써 그녀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 좋은 혼처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몸이 약하다면 건강한 후계를 낳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므로.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에시카는 곧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어차피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는 이후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고, 자신은 원작에서처럼 루시우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그녀는 쓸모를 다한 셈이었다.

“그렇군.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 곤란했겠군…….”

루시우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에시카는 불현듯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에시카가 정말로 암브로시아 남작 영애와 친구 사이였다면 지금처럼 루시우스와 대화를 나눌 게 아니라, 그녀를 뒤쫓아 갔어야 했다는 것을.

‘눈치…… 챘을까?’

에시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루시우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영애의 소개는 아직 듣지 못한 것 같군.”

다행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못했는지 루시우스가 태연히 물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크고 크로프트 남작 가문의 에시카, 황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에시카는 솔티에서 배운 황궁 예법대로 루시우스에게 인사했다.

“오늘이 첫 사교계 데뷔인가?”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

“첫 춤은 추었나?”

“아, 아직이요…….”

에시카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춤 신청을 하면 받아들이겠나?”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에시카는 최대한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우스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시카는 루시우스의 손에 살포시 제 손을 얹었다.

루시우스의 손을 잡고 연회 홀 중앙으로 향하는 동안 에시카의 머릿속에서 그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됐어!’

하녀에서 왕녀로, 다시 평민이 되었다 지금은 남작 가의 영애. 하지만 원작대로 루시우스의 마음만 얻는다면 곧 황후가 될 터.
그야말로 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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