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85/148)


#85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2023.06.24.


연무장으로 향하는 이카르와 패트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옅게 한숨을 뱉었다.

“하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무릎의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스튜어드가 말했다.

“아가씨.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르네브가 시선을 주자 스튜어드가 바로 말을 이었다.

“저택 안에 연무장에선 눈에 띄지 않게 연무장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르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가 어디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스튜어드가 꾸벅 허리를 숙이곤 앞장서 걸었다. 르네브는 서둘러 스튜어드를 따라나섰다.

이카르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어제 세이렌 후작이 이카르에 독주를 권한 일도 내심 마음에 걸렸고, 혹여나 패트릭이 이카르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 패트릭이 이카르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알아야 했다.

“이곳입니다.”

스튜어드의 걸음이 멈춘 곳은 다이닝 룸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침실이었다.

넓은 내부 안에 배치된 가구들은 고급스러웠고, 먼지 한 톨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손님용 침실인가?’

세이렌 후작이나 패트릭의 침실이라기엔 가구들이 아기자기했기에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쪽에서 연무장이 잘 보입니다.”

스튜어드가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 내자 큰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내해 주어 고마워요. 스튜어드.”

그렇게 말하며 르네브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아닙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혼자 마음 졸이고 계실 아가씨 모습이 눈에 선해서 말입니다…….”

시위하듯 세이렌 후작과 이카르가 술을 마시던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일을 마음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그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인 뒤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기사단의 훈련이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스튜어드의 말대로 기사들이 연무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스튜어드가 안내해 준 침실은 연무장과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어 정확하게 사람 식별이 어려웠다.

하지만 르네브는 단번에 이카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건장하고 키가 큰 기사들 틈에 섞여 있어도 이카르가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카르에게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훤칠하시군요.”

스튜어드가 연무장 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비단 르네브의 생각만 그런 건 아니라는 듯이.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 있는 패트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간 관심을 크게 두지 않고 있어서 몰랐는데…….’

패트릭도 키가 꽤 크고, 몸이 다부졌다.

누구든 이카르의 옆에 서면 체격 차로 인해 왜소해 보이곤 했는데 패트릭만은 예외였다.

르네브는 한동안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걱정과 달리 패트릭에게 별다른 속셈은 없는 것 같았다.

르네브가 이만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열을 맞춰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이 연무장 한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연무장 중앙에 기사 두 사람만이 남았다.

“대련을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상대에게 검을 겨눴다.

‘설마……?’

기사들의 대련을 지켜보던 르네브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모았다.

세이렌 부자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카르를 시험해 보는 것 같다고.

세이렌 후작은 대작으로, 패트릭은 검을 맞대는 방식으로 말이다.

“연무장으로 가 봐야겠어요.”

르네브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스튜어드가 말했다.

“아가씨. 제 견해를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도련님의 뜻대로 내버려 두시는 편이 차후에 좋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상대는 황제 폐하세요.”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양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인 스튜어드가 말을 이었다.

“저분은 바슈케르의 황제이십니다. 아주 귀한 분이시죠.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동생의 남편이 되실 분이기도 하시죠.”

르네브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이카르의 검 실력은 바슈케르 제국 내에서도 감히 뛰어넘을 자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패트릭 또한 세이렌 후작을 제외하면 현재 파라디움의 최강자였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맞붙으면 둘 중 한 사람은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르네브에게는 두 사람 모두 소중했다.

르네브는 제 앞을 막아선 스튜어드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주겠어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스튜어드가 담백하게 물러났다. 르네브가 연무장으로 가길 원한다면 자신에게는 말릴 권한이 없다는 듯이.

“물론입니다.”

***

한편, 패트릭은 기사들의 훈련 모습을 신중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카르를 조심스럽게 힐끔거렸다.

‘……괴물인가?’

전날 세이렌 후작은 부러 도수가 높은 술을 가져오라고 했었다.

그리고 고용인들이 가져온 술의 양은 절대 두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비워 낼 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 결과 세이렌 후작은 술병이 제대로 났다. 르네브가 챙겨 준 꿀차로 속을 달랬음에도 말이다.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세이렌 후작은 술이 꽤 센 편이었다.

적어도 패트릭이 아는 한 대작으로 세이렌 후작이 누군가에게 패배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바슈케르의 황제는 세이렌 후작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전날 마신 술의 여파로 피곤해 보이기는커녕 푹 작고 일어난 듯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패트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슈케르 황제의 옆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아니, 무슨 남자가 속눈썹이 저렇게 길어? 쓸데없이…….’

패트릭의 시선이 시원하게 트인 눈매와 높은 콧대, 날렵하게 잘 빠진 턱선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검을 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군.’

어깨며 팔에 자리한 근육들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패트릭은 제 팔과 바슈케르 황제의 팔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제법이군.’

패트릭도 아주 어릴 때부터 검을 다루고 몸을 단련해 왔다. 그래서 몸에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바슈케르 황제 앞에서는 조금 위축이 되었다.

‘남자는 하체지.’

그런 생각을 하며 패트릭은 시선을 내렸다.

‘호…….’

패트릭이 속으로만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줄곧 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돌연 패트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훈련이 체계적이군요.”

“……하하하, 폐하께서 보시기에 그렇습니까?”

패트릭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황제 폐하의 눈에 찰 수준은 못 되겠지요.”

“지금 보여 준 진형은 정면 돌파는 괜찮겠지만, 측면에선 쉽게 무너질 수 있겠군요.”

순간 패트릭의 눈빛이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 이카르를 바라보던 것과는 다르게.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진형의 약점을 파악하다니!’

여동생이 결혼할 사이라며 데려오기는 했지만, 패트릭에게 그는 여전히 적국 황제였다.

그래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패트릭은 일부러 약점이 이미 외부에 노출된 진형으로 훈련할 것을 기사들에게 명했다.

바슈케르의 황제는 그걸 바로 꼬집은 셈이었다.

‘역시, 지휘관의 시선으로 훈련을 지켜본 결과인가?’

최근 패트릭은 지시를 내리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말이 아닌 사람의 입장을 깨달은 참이었다.

그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도 있다고.

이전까지 세이렌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은 세이렌 후작의 몫이었다.

세이렌 후작은 얼마 전부터 패트릭에게 군사 훈련을 맡긴 것뿐 아니라, 통솔권을 내어 주었다.

혈기 왕성한 기사와 겨뤄도 여전히 거뜬히 이겨 버리는 세이렌 후작이었지만, 이만 작위를 물려주려는 것 같았다.

패트릭은 직접 기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해 보니 시야가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직접 적군과 검을 맞대는 쪽과 지휘관의 시선은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과거 그는 방금 보여 준 진형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에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다.

‘눈썰미는 꽤나 좋은 모양이군.’

패트릭은 그런 면에선 이카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슈케르의 황제는 무력으로 정해진다고 했지만, 소문만 믿고 소중한 여동생을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직접 두 눈으로 실력을 본 것도 아니었고, 그때와 지금은 다를 수도 있었다.

과거엔 강한 자가 바슈케르의 황제가 되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유혈 사태 없이도 황위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여차할 때 직접 황제가 여동생 르네브를 지킬 수 있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불러들인 것이고.

“벌써 진형의 약점을 파악하시다니, 역시 황제 폐하십니다.”

“…….”

“그건 그렇고, 훈련의 대미는 역시 대련이 아니겠습니까?”

패트릭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럼 기사들의 대련을 보시면서 각자의 약점이나 강점들을 조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패트릭은 기사단 안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들을 연무장 중앙에 세웠다.

기사들이 대련을 끝내고 난 뒤 패트릭은 계획대로 이카르에게 제안했다.

“역시 보기만 하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는군요. 재미 삼아 저와 한번 겨뤄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황제 폐하?”

***

르네브가 막 연무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기사들의 함성이 일제히 뚝 멎었다.

“……?”

동시에 르네브의 불안감도 치솟았다.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스튜어드도 정적을 이상하게 여긴 듯 연무장 중앙을 보려고 기웃거렸다.

하지만 연무장을 에워싼 건장한 기사들에 가려 어떤 상황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가까이서 상황을 확인하죠.”

르네브는 복숭아뼈가 드러날 정도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린 채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기사들 틈 사이로 연무장 중앙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

스튜어드가 숨을 헉, 집어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연무장 바닥에 패트릭이 주저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이카르가 서 있었다.

패트릭의 목에 검날을 겨눈 채로.

“……제가 졌습니다, 폐하.”

패트릭이 패배를 인정하자, 모여 있던 기사들의 수군거림이 높아졌다.

“설마…… 지금, 소후작님께서 진 건가?”

“상대가 상대인지라, 전력을 다하시지 않은 거겠지.”

그러나 주변의 기사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이카르가 패트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간 분하다는 표정으로 이카르의 손을 바라보던 패트릭이 이내 그의 손을 잡았다.

몸을 일으킨 패트릭은 기사들을 둘러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두 눈 뜨고 똑똑히 보았다면 다들 알겠지만, 조금 전의 대련은 정정당당한 승부였다.”

그러니 허튼소리 말라는 뜻 같았다.

기사들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네브는 도망치듯 연무장을 벗어났다.

이카르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두 사람 다 어디 크게 다치거나 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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