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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회유 (86/148)


#86화 회유
2023.06.25.


이카르는 조금 전부터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야무지게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르네브의 뒷모습이 귀여웠다.

반사적으로 이카르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반면에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못 미더워서 구태여 연무장까지 따라왔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이카르는 곧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혹여나 자신이 다칠까 봐 걱정했을 거라는 쪽으로. 그도 아니면, 패트릭이 다칠 것을 걱정했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씨가 예뻤다.

그리고 그런 여자가 제 가족이 된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베인과 드한 또한 어찌 보면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실제 이카르에겐 가족이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곧 가족이 생긴다는 생각만으로 조금 들떴다.

가족애가 매우 강한 세이렌 부자까지 덤으로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테고.

***

패트릭은 어제부터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는 세이렌 후작을 찾아갔다.

침실로 들어서는 패트릭을 보고 세이렌 후작이 엉거주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패트릭은 얼른 그를 부축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이렇게 묻는 것조차 죄송할 만큼 세이렌 후작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르네브가 챙겨 준 꿀차를 마셔서 그런지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만…….”

은근슬쩍 딸이 자신의 몸을 챙긴 사실을 자랑하며 세이렌 후작이 명치를 문질렀다.

아직 속이 메슥거리는 모양이었다.

“요리장에게 숙취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조금 더 쉬세요. 아버지 상태를 보았으니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패트릭은 후작의 상태만 파악하곤 바로 침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자 세이렌 후작이 물었다.

“그래. 대련 결과는 어땠느냐?”

“그게…… 아쉽게도 제가 졌습니다.”

세이렌 후작이 놀란 눈을 하고 패트릭을 쳐다봤다.

“……뭐?”

패트릭은 착잡한 심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비등비등하긴 했겠지?”

“아닙니다. 전혀 상대가 안 되더군요.”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패트릭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을 고했다.

그간의 훈련이 무색하게도 적국의 황제는 너무나 강했다.

“……그래?”

세이렌 후작이 되물을 때마다 패트릭은 제 처참한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달려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세이렌 후작에게 패트릭이 침울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가 아버지께서 술을 권하셨을 때 거절하던가요?”

패트릭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골골대는 세이렌 후작과 달리 바슈케르의 황제는 너무나 멀끔해 보였으니까.

“아니, 아니었다.”

세이렌 후작이 살짝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이마를 짚으며 덧붙였다.

“그분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더구나.”

“예?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도 침실 안은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세이렌 후작이 입을 열 때마다 패트릭은 취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는다니……! 무언가 속임수를 쓴 것 아닙니까?”

“이 아비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단다.”

“…….”

“하지만 아니었지.”

그 말을 끝으로 어제의 일을 반추하듯 세이렌 후작이 아련한 눈을 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조금 더 숙연해졌다. 패배의 기억에 잠식된 듯이.

원래 세이렌 후작의 계획은 바슈케르 황제를 독주로 진탕 취하게 한 뒤 그의 진심을 캐물을 작정이었다.

어째서 르네브와 결혼하려고 하는지, 정말로 르네브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술에 취하면 마음을 열고 진심을 토로하기 쉽다.

술에 취해 은근히 내재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고.

물론 바슈케르의 황제가 술에 전혀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전은 완전히 헛수고가 되어 버렸지만.

세이렌 부자가 바슈케르의 황제를 시험하려 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전에 두 사람에게 망명을 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그가 원하는 사람이 세이렌 부자라는 뜻이었고, 강력하게 두 사람을 결박할 도구로 르네브를 이용하려는 것일 터.

“이제 어떡할까요, 아버지.”

옅게 한숨을 내쉰 패트릭이 심각한 낯을 하곤 물었다.

당장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는 건 세이렌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봐야지. 속내를 드러낼 수 있도록…….”

두 남자가 죽상이 되어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저예요. 르네브.”

갑작스러운 르네브의 방문에 흠칫 놀란 세이렌 후작은 벌떡 일어나 찬물로 입안을 헹궜다.

패트릭은 서둘러 창문을 열어 내부 공기를 순환시켰다.

두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또 한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일어나셨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는데, 몸은 괜찮으세요?”

패트릭이 얼른 문을 열었다.

침실 앞에는 트레이를 들고 르네브가 서 있었다. 흘끗 패트릭을 쳐다본 르네브가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드실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드셔 보세요.”

트레이 위에는 먹기 좋게 썰어 놓은 토마토와 바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세이렌 후작이 트레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르네브, 이게 뭐냐?”

“토마토랑 이건 바나나란 건데, 둘 다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줘요.”

싱긋 웃으며 르네브가 세이렌 후작의 손에 포크를 쥐여줬다.

“드셔 보세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못 대셨다면서요.”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이렌 후작은 눈만 깜빡였다.

낯설었다. 딸이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바나나란 과일도.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패트릭 또한 연신 눈만 끔뻑거렸다.

‘르네브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처음 보는 과일의 효능을 설명하는 모습이 꽤 박식해 보였다.

‘이게 바로 유학의 효과인가?’

게다가 제법 살갑게 굴기까지. 매우 낯설지만, 긍정적인 변화인 건 틀림이 없었다.

“패트릭도 훈련하는데 피곤하지? 먹어 봐. 피로를 해소하는 데 좋은 성분이 풍부해서 피로감을 줄여 줄 거야.”

그에 그치지 않고, 르네브는 패트릭에게 토마토를 권했다.

“일단…… 앉거라.”

“예, 아버지.”

세이렌 부자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의자에 앉아 서로를 멀뚱히 쳐다봤다.

세이렌 후작은 바나나를, 패트릭은 토마토를 포크로 쿡 찍었다.

토마토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패트릭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엄청 달다, 이거. 꼭 과일 같아.”

“응. 품종 개량을 해서 일반적인 토마토보다 당도가 훨씬 더 높아.”

르네브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패트릭은 토마토 하나를 더 입에 쏙 넣었다.

“그런데 르네브, 이 바나나란 걸 대체 어떻게 구해 온 거냐?”

바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세이렌 후작이 물었다.

파라디움에서 토마토는 흔히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나나는 아니었다. 바슈케르에서 건너온 상단에게서 조금 구하는 정도는 가능했지만.

“폐하께서 준비해 주셨어.”

르네브의 대답에 입을 우물거리던 세이렌 부자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또 폐하.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딸의 모습에 심장이 말랑말랑해지려던 차였으나 황제의 언급에 세이렌 후작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딸이 황제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교를 부린다고 생각하니 괘씸했다.

얼마나 귀하게 키운 딸인데.

“네가 굳이 나를 찾아온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거겠지. 할 말이 있거든 어서 해 보아라.”

세이렌 후작의 낮고도 중후한 음성이 침실에 내리깔렸다.

“할 말이라니요? 전 그저 아버지께서 숙취로 고생하신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돼서 뵈러 온 것뿐인걸요. 섭섭해요, 아버지.”

르네브가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끙. 세이렌 후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예쁘게 웃는 딸을 보자 딱딱해지려던 심장이 다시 말랑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아버지와 나를 설득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패트릭이 한쪽 눈썹 추켜세우며 르네브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 맞아! 우연히 기사들과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정말 늠름하고 멋있더라, 패트릭. 그런데 그렇게 몸을 쓰면 피곤할 것 같아서 피로 회복에 좋은 음식을 가져온 거야.”

금방 패트릭의 눈매가 양순해졌다.

“……봤다고?”

“응. 진형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 가며 훈련을 지시는 하는 모습이 되게 멋있던데?”

은근슬쩍 아니, 대놓고 추켜세우는 말에 패트릭의 입매 또한 흐물흐물해졌다.

“르네브, 너는 안 먹어? 너도 좀 먹어.”

“그래. 같이 먹자꾸나.”

패트릭이 한마디 하자, 세이렌 후작도 거들며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럴까요?”

르네브는 예쁘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속으로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놔두면 언제까지고 이카르에 대한 적개심을 거두지 않을 테니, 내가 나서는 수밖에.’

그런 속내도 모르고, 세이렌 부자의 표정이며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르네브가 과일을 가지고 이 침실에 발을 들인 순간과는 대조적이게도.

두 사람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인 것 같았다.

‘좋아.’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두 사람이 이카르와의 결혼을 허락할 때까지 회유 작전을 계속 이어 나가기로.

르네브는 한결 부드럽고 온화해진 분위기 속에서 세이렌 부자와 과일을 나눠 먹고는 침실을 나왔다.

침실에 남겨진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 두 사람은 거울 속 자신과 퍽 닮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스튜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세이렌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침실 안으로 들어온 스튜어드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래.”

“르네브가 꽤 변한 것 같죠?”

세이렌 후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구나.”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스튜어드가 끼어들었다.

“이게 다 사랑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기분 좋게 웃으며 스튜어드는 쟁반을 챙겨서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르네브가 곧바로 다가와 물었다.

“두 분 반응은 어땠나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만, 아가씨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계신 듯합니다.”

스튜어드의 대답에 르네브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좋아. 1단계는 성공이고…….’

르네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음 작전에 대해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튜어드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주인님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아가씨를 돕기로 결정은 했으나, 곁에서 지켜본 아가씨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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