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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가족 (84/148)


#84화 가족
2023.06.23.


“폐하, 괜찮으세요?”

“잠깐 상쾌한 바람을 쐬고 싶군. 함께 하겠나?”

“물론이죠.”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 저를 나와 이카르와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후작 저 정원의 모습에 심히 당황했다.

이리저리 뻗어 난 정원수와 가지치기가 제때 되지 않아 산발한 나무.

여기저기 피어난 정체 모를 들꽃들은 빨강, 노랑, 분홍으로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심각한데…….’

르네브가 기억하는 한 그녀는 서부 변경의 세이렌 후작령에는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곳은 르네브의 친정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카르에게 보이기 조금 부끄러웠다.

“관리가…… 잘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네요.”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요리조리 피해 걸으며 르네브는 이카르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영애가 보기엔 그런가? 난 제법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드신다고요?”

이카르의 대답에 르네브는 의아해졌다.

그의 미적 관념이 그사이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바슈케르 황궁의 정원은 사시사철 아름답게 관리되고 있었다.

회귀 전 파라디움 황궁 정원의 조경에 신경을 쏟아 부어 본 적이 있었기에 르네브는 잘 알았다.

이카르가 바슈케르 황궁 정원에 얼마나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있는지를.

“보여 줄 사람이 없는 곳에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 당연하지 않나.”

보여 줄 사람이 없다니?

이카르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르네브가 눈만 깜빡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내 기억에 파라디움 수도에 있는 세이렌 후작 저의 정원은 제법 잘 가꿔져 있긴 했지.”

사실이었다.

바슈케르 황궁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수도의 후작 저 정원은 남 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죠…….”

“하지만 세이렌 후작이 얼마나 많은 금화를 서부 변경의 성벽 건설에 쏟아부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저택 정원의 상황이 금방 이해가 될 것 같은데?”

“…….”

그제야 르네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전 삶에서도 지금도 파라디움의 귀족들은 평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이카르가 영토 확장에 나서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 불안도 오래가지 못했다.

평화 협정 기간이 지나 황녀가 무사히 귀환하자, 전쟁 같은 건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세이렌 후작령이 뚫리면 파라디움 수도까지는 직통 길이 열리게 될 테지.”

그건 파라디움이 언제든 바슈케르에 땅을 내어 주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경각심을 느끼고 대비하고 있는 건 파라디움 안에서 세이렌 후작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선 르네브도 동의했다.

시시때때로 바슈케르와 영토 분쟁을 겪는 세이렌 후작령의 사정을 파라디움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르네브 또한 그랬다. 가장 안전한 파라디움의 황궁에서만 머물 때는.

실제로 세이렌 후작령에 와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선 제국민의 안전을 제일로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 정원은 그 증거일 테고요.”

르네브는 조금 전과는 한결 달라진 시선으로 정원을 바라봤다.

파라디움과 서부를 지키기 위해, 또 르네브를 위해. 보이는 것보다는 안전을 택한 세이렌 후작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회귀 전에는 죽지 않으려고, 루시우스에게만 온 신경을 쏟았다. 생존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를 사랑하기까지 했고.

그 결과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었다. 세이렌 부자 또한 실제 제 가족이 아니라 생각하며 거리를 뒀었고.

그런데 세이렌 후작령에 직접 와 보고 나자,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 회귀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노라고…….

르네브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걷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이카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든든하게 함께 걸을 뿐.

***

밤공기가 제법 차가워진 탓에 어깨가 살짝 떨려 왔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이카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영애, 다시 한번 묻지. 정말 한 번도 세이렌 후작령에 와 본 적이 없나?”

르네브는 조금 의아해졌다.

이카르는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필요한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는 건 그만큼 이카르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른다?”

이카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맞다, 아니다 확실한 대답 대신 모른다는 대답을 내놓았으니.

“사실 이전까지는 세이렌 후작령에 와 본 적이 없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이곳이, 묘하게 낯이 익어요.”

“그래서 모른다고 대답한 거였군.”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겠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던 이카르가 그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저, 그런데 폐하.”

“……?”

“폐하께서는 마치 제가 세이렌 후작령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확신하고 계신 것 같아요.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될까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의 붉은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곧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조금은 아련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응시하며 이카르가 말했다.

“영애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영애와 나는 파라디움 수도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거든.”

이번에는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네?”

어쩌면 자신만 회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도 자신과 같은 상황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카르도 회귀자였나?’

르네브는 빠르게 이런저런 추측들을 해 보았다.

‘그래서 원작과는 달리 죽지 않았던 거라면……?’

르네브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는 것으로 하고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지.”

잠시 망설이던 르네브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 때문인지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

산책 후 르네브를 침실 앞까지 데려다준 이카르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옷깃을 살짝 쥐었다.

제 옷깃을 쥔 그녀의 손을 힐끗 내려다본 이카르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모았다.

“흠…… 나를 유혹하려는 거라면 정말 기쁘지만, 장소가 딱히 좋지는 않은 것 같군.”

르네브는 곧바로 잡고 있던 이카르의 옷깃을 놓았다.

“폐하 몸은 좀 어떠세요?”

산책하는 중간중간 지켜본 이카르는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그러니까 술에 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영애와 상쾌한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어느 때보다 좋은 것 같은데.”

“그…… 저희 아버지께서 술을 권하신 건가요?”

“내가 원치 않았다면 후작이 권했더라도 마시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괜한 걱정일랑 말고 푹 자 둬.”

르네브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떼어낸 이카르가 담백하게 몸을 돌렸다.

“폐하도 푹 주무세요.”

이카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르네브는 유유히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이카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곧 모퉁이를 지나 이카르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르네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카르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넘겼지만, 세이렌 후작이 술을 권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가씨?”

기척을 느꼈는지 침실 문을 열고 앰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앰버, 꿀을 넣은 차를 좀 준비해 줄래?”

“물론이죠. 어느 분께 전해 드리면 될까요?”

“폐하와 아버지께.”

“맡겨만 주세요!”

앰버가 밝게 말하곤 침실을 나섰다.

***

식당으로 들어온 스튜어드가 곤란한 낯으로 말했다.

“가주님께서는 불참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저택의 술통을 전부 비워 낼 기세로 술을 마셔 댔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르네브는 힐끔 눈을 굴려 이카르를 쳐다봤다.

물론 같은 양을 마셨다고 하기에 이카르는 너무 멀쩡해 보였지만.

‘아버지께서 홀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나?’

다행히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카르에게선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드시죠.”

패트릭이 이카르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침 식사로는 부담스럽지 않고, 딱 적절해 보입니다.”

이카르가 패트릭을 쳐다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패트릭이 식기를 들었다.

곧 가족이 될 사이라고는 하나, 일개 귀족에게 황제가 공대를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을 힐끔거리던 르네브도 식기를 들었다.

차린 게 없다던 패트릭의 말과 달리 테이블 위는 빈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육지, 해양, 공중의 육류와 제철 채소 및 과일로 가득했다.

이카르와 패트릭은 잘 익은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잘라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신선해 보이는 루꼴라 샐러드를 제 접시에 조금 옮겨 담았다.

“르네브, 너는 육류를 조금 더 섭취하는 게 좋아.”

그런 르네브에게 패트릭이 살짝 핀잔했고, 이카르가 거들었다.

“소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먹는데 몰두하는 줄 알았더니만, 두 사람 다 르네브가 뭘 먹는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카르가 살짝 튀긴 흰살생선 접시를 르네브 앞쪽으로 옮겨 주었다.

“감사해요. 폐하.”

르네브가 고맙다며 눈인사를 건네자, 이카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큼, 큼.”

물론 맞은편에서 곧 패트릭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지만 말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조용히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 후에는 디저트와 차를 마셨다.

찻잔이 거의 다 비었을 즈음 패트릭이 말했다.

“곧 세이렌 기사단의 훈련이 있을 예정인데, 폐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괜찮겠습니까?”

이카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군사 훈련에 관해서 르네브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가령, 적국에 훈련을 보인다는 건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정도는.

르네브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는데 패트릭이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계신 걸 알면 기사들도 더욱 의욕적으로 훈련을 하겠지요.”

“좋습니다. 일어나실까요?”

“원하는 바입니다.”

이카르의 물음에 패트릭이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어쩐지 르네브를 불안하게 했다.

르네브는 이카르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지 마세요, 폐하.’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군.”

르네브는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지, 패트릭이 상당히 수상한데.’

르네브의 입술을 빤히 응시하던 이카르가 손을 뻗었다. 이카르의 엄지가 느리게 르네브의 입술을 훑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이.

“큼, 큼. 이러다 훈련 시간에 늦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는군요.”

패트릭이 또 크게 헛기침을 하며 이카르를 재촉했다.

“다녀올게.”

그 말만 남기고 이카르가 다이닝 룸을 나갔다.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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