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그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83/148)


#83화 그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2023.06.22.


집사가 안내해 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세이렌 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네브는 오랜만에 만난 제 가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 다 웃지 않으면 제법 험악한 인상을 지닌 편이었는데, 너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세이렌 후작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만 같았고, 패트릭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게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두 분 정말 오랜만에 봬요. 이전에 보낸 제 편지는 받으셨죠?”

“르네브, 네 편지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거야.”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세이렌 후작 대신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편지에 적혀 있던 대로 인사드리러 왔어요. 저와 결혼을 약속한 분을 소개해 드리려고요.”

이카르가 제법 깊이 허리를 숙여 세이렌 부자에게 인사를 했다.

“또 뵙습니다.”

황제가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고 잠깐 움찔하던 세이렌 부자가 이카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환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더 싸늘한 세이렌 부자의 반응에 르네브는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쉽지 않겠는데…….’

그때 이카르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목이 좀 마르군. 차를 준비해 줄 수 있겠나?”

르네브는 난데없이 차를 내 달라는 이카르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분위기에서? 차가 넘어가겠어요?’

르네브가 그런 시선으로 이카르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큼!”

세이렌 후작이 위협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이카르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를 믿고, 부탁을 들어주겠나?”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큼, 큼!”

세이렌 후작이 험악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둘이서 연애질하면서 속닥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알겠어요.”

르네브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분위기가 이 정도로 냉랭할 줄은 몰랐는데.’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르네브는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은 괜찮으려나?’

조금 불안했으나, 이카르를 믿기로 한 르네브는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없을 거란 예상과 달리 문 앞에는 집사를 비롯한 고용인 여럿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여기들 서 계신 거예요?”

“그것이…… 조금 걱정이 되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르네브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 가주님과 소가주님 두 분 다 보통 성격은 아니시잖아요. 아가씨의 약혼자님의 신분 그렇고…….”

집사 곁에선 중년의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세이렌 부자가 고귀하신 적국의 황제 폐하께 큰 결례를 범하거든 빠른 대처를 위해 대기 중이라는 뜻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볼일들 보러 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두 분 다 황제 폐하께 함부로 대하시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고용인들을 다독였으나, 르네브 또한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세이렌 부자는 꽤나 다혈질인 것 같았으니까.

그때 돌연 응접실 문이 발칵 열렸다. 패트릭이 험악한 얼굴로 고용인들에게 소리쳤다.

“술을 가져와. 가능한 독주로.”

“술…… 말씀이십니까?”

집사가 당황하며 되묻자, 패트릭이 일갈했다.

“그래! 후작 저 안에 있는 술은 전부. 아니, 후작령에 있는 독주란 독주는 전부 다 쓸어 와.”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응접실 앞에 모여 있던 고용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르네브는 미간을 모은 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따져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패트릭이 복도 쪽으로 눈짓을 해 보였다.

“르네브, 넌 나 좀 보자.”

***

“르네브. 여기라면 대화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러니 솔직히 말해 봐.”

패트릭이 르네브를 데리고 온 곳은 세이렌 후작의 서재였다. 세이렌 후작 저 안에서도 가장 보안에 신경을 쓴 장소인 듯했다.

“그 편지, 혹시 협박당해서 강제로 쓴 거야?”

패트릭이 품에서 꺼낸 편지를 르네브 앞에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뭐……?”

패트릭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르네브는 망연하게 눈만 끔뻑였다. 그러자 패트릭이 바로 덧붙였다.

“필체를 분석해 보니 네가 쓴 게 맞는다고는 하던데…….”

“잠깐, 패트릭! 지금 내가 황제 폐하의 강요에 못 이겨서 이 편지를 작성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니야?”

패트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르네브는 풋, 웃어 버렸다.

“르네브? ……너 괜찮은 거야?”

패트릭이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르네브의 어깨를 쥐었다.

이제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는 패트릭의 모습에 르네브는 미간을 좁혔다.

“미친 거 아니거든.”

“그럼? 적국의 황제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나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그만, 그만!”

르네브는 얼른 패트릭의 입을 막았다.

패트릭의 주장도 나름의 일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카르의 비밀 호위가 지금 이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이카르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깊은 자라면 이를 그냥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수도 있었고.

르네브는 그런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부러 제 귓가를 툭툭 치며 패트릭을 쳐다봤다.

“……!”

르네브가 보인 행동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패트릭의 눈이 커졌다.

패트릭이 고개는 르네브에게 고정한 채로 눈을 상하좌우로 빠르게 굴렸다. 어딘가에 잘 숨어 있을 황제의 비밀 호위의 기척을 찾아보기라도 하듯이.

르네브는 서재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 있는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패트릭이 곧 양피지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르네브는 빠르게 양피지 위에 글자를 적었다.

「잘 들어. 패트릭.」

고개를 끄덕이던 패트릭이 품에 넣었던 르네브를 편지를 꺼내 양피지 위와 비교하듯 번갈아 보았다.

「세뇌, 협박, 그런 거 아니야.」

양피지 위를 바라보며 패트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깃펜을 빼앗아 그 아래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그럼 뭔데. 적국 황제를 사랑하게 됐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르네브는 패트릭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러자 패트릭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양피지 위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장난하지 마. 도움을 요청하려면 지금뿐이라고. 넌 지금 인질 생활이 너무 긴 나머지 황제에게 동조하고 감화된 것뿐이야.」

「스톡홀름 증후군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

르네브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자 패트릭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패트릭. 지금 내가 자주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르네브는 양피지 위에 적힌 세뇌, 협박이란 단어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그 증거라는 뜻이잖아.”

“정말 아니야? 르네브,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봐.”

패트릭이 원래도 큰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르네브를 응시했다. 르네브도 지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패트릭의 눈을 바라봤다.

도무지 믿어 주지 않을 것만 같던 패트릭이 그제야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그래. 정말로 이 결혼에 강압은 없었어. 온전한 내 의지로 결정한 거라고.”

패트릭이 미간이 깊어졌다. 르네브의 미간도 덩달아 깊어졌다.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

잠깐의 고민으로 르네브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패트릭도 이제 혼기가 찼으니 슬슬 결혼을 해야 하잖아?”

“가, 갑자기 왜 그쪽으로 대화가 튀어?”

결혼이란 단어에 패트릭이 머쓱해하며 눈을 굴렸다. 르네브는 얼른 입을 열었다.

“피하지만 말고 잘 생각해 봐.”

“뭐, 뭘.”

“빼어나게 아름다운 영애가 패트릭에게 고백했을 때를 가정해 봐.”

미간을 모은 그대로 패트릭이 더 말해 보라는 듯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 영애는 가문까지 대단해. 게다가 패트릭을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고, 엄청 사랑해.”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딨어.”

패트릭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비웃었다. 하지만 르네브는 기죽지 않았다.

“그런 행운이 내게 주어졌다면? 황제 폐하는 내게 그런 사람이거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던 패트릭이 이내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알겠지.”

***

패트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과 이카르가 있는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차를 준비해 달라는 이카르의 부탁이 있었지만, 르네브의 손은 빈손이었다.

어차피 정말로 그가 차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르네브가 자리를 피해 주게 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

르네브가 응접실 문 쪽으로 다가가자 앞을 지키고 선 기사가 말했다.

“가주님께서 절대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난 그 가주님의 하나뿐인 딸이에요.”

“예, 특히 르네브 아가씨는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사는 제법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알겠어요.”

르네브는 하인을 시켜 의자를 하나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시위하듯 응접실 앞을 지키고 앉았다.

응접실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그런 기사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응접실 문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얼른 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딱딱한 나무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뻐근했다.

그럼에도 응접실 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아가씨.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시고, 쉬시는 게 어떠세요? 이러다 아가씨 몸이 상하면 황제 폐하도, 후작님도 걱정하실 거예요.”

앰버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아가씨.”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기전이 된다면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게 옳았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결국, 르네브는 응접실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을 찌릿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들이 안도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그저 세이렌 후작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내심 르네브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르네브가 몇 발자국 떼지 않을 때였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브는 얼른 뒤를 돌아봤다.

“……?”

이카르가 응접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 냈다. 낮보다 조금 피로해진 낯을 보니 르네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

르네브는 냉큼 이카르 쪽으로 달려갔다. 이카르가 르네브의 뺨을 그러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

술 냄새가 엄청났다.

‘설마! 후작 저에 있는 독주를 모조리 가져오라던 게 이런 뜻이었어?’

르네브는 숨을 헉,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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