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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처음 만난 날 (82/148)


#82화 처음 만난 날
2023.06.21.


“그래.”

“그런데 폐하께선 이전에도 세이렌 후작령에 와 본 적이 있으신가 보네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폐하?”

르네브가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군.”

“…….”

“내가 황제가 되기 전, 용병으로 떠돌 때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거든.”

“아, 그럼 그때 세이렌 후작령에 방문하셨었나 보네요.”

“그렇지.”

“그때는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었나요?”

르네브의 예쁜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카르는 살짝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마차 창 너머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이카르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도 사라졌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날의.

***

“하아, 하아…….”

이카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추격자가 따라오지는 않는지 간간이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는 더 이상 뒤따라오는 이가 없는 사실을 깨달은 이카르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오늘을 넘길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오늘 하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용병 생활 어언 3년 차.

이카르는 눈을 뜨자마자 마물 사냥 임무를 나섰다. 제법 위험도가 높은 임무였지만, 그만큼 보수가 좋았다.

그래서 단단히 준비하고 나섰으나, 의외로 쉽게 마물을 처리해 버렸다. 일 처리가 빠르다며 의뢰인에게 보너스까지 받았다.

‘오늘은 특히 운이 좋은데.’

이카르는 보너스로 받은 금화로 간식을 세 개 샀다. 드한과 베인에게 주려고.

그렇게 묵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추격자와 마주쳤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황실 기사단의 표식이 들어간 무기를 들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제 형이 황실 기사단에 쫓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미친놈.’

제 아버지였지만, 황제는 미친 게 맞았다.

제 자식들을 맨몸으로 황궁에서 내쫓은 데에 그치지 않고, 추격자까지 보내다니.

‘그래. 오늘따라 이상하게 운이 따른다 했다.’

이카르는 곧장 추격자들을 피해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 달간은 이곳에서 머물렀던 터라 이카르는 구석구석 숨겨진 좁은 길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예상외로 쉽게 따돌렸는데.’

그렇게 안심한 순간 먼저 이카르의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황실 기사단을 마주쳤다.

아무리 이카르라도 혼자서 다수의 실력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제 고작 13세였고, 상대는 인생에서 가장 건장한 나이대의 성인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꼴이 되었다.

겨우 산속으로 도망치긴 했으나, 부상이 심각했다.

“아, 아파…….”

이카르는 통증이 느껴지는 복부로 시선을 내렸다. 뜯어낸 소매로 적당히 지혈을 해 두었음에도 출혈이 너무 심했다.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이카르는 조소했다.

황궁에서 내쳐진 이후 이카르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저 죽음이 두려웠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제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있었을 뿐.

보란 듯이 잘 살아남아서 그 잘난 면상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렇게 반쯤 오기로 7년을 버텼으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인 듯싶었다.

삶에 미련이 전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아야 할 이유 또한 찾지 못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드한과 베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이런 꼴이 되어 버린 자신의 인생도 그렇지만, 그놈들의 삶도 참 기구했다.

베인과 드한 모두 공작가의 차남으로 가문을 승계받지는 못하더라도 백작위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한평생을 고위 귀족으로 떵떵거리며 살았어야 했을 녀석들인데.’

첫째는 황제의 명령으로, 둘째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아버지들의 명령으로.

베인과 드한은 어린 나이에 이카르를 따라 무기 하나 없이 산속에 던져졌다.

“불쌍한 놈들…….”

이카르는 낮게 자조했다.

물론 어느 누가 더 불쌍하다고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제 신세 또한 매한가지니까.

그렇게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았다.

“……!”

이카르는 숨을 헉, 들이켜며 눈을 떴다.

어느새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던 모양이었다.

손끝 발끝이 다 차가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체온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호수에 비친 제 몰골이 참으로 처참했다.

“흣…….”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비죽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햇볕에 탔음에도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송장처럼.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건 비단 그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처럼, 까마귀 몇 마리가 근처에서 이카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쫓아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카르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하…….”

그때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색인지, 잿빛에 가까운 은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보랏빛의 눈 한 쌍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일견 황궁에서 보았던 동화책의 요정과 닮아 있었다.

‘아…… 곧 가겠구나.’

죽을 때가 되면 인간의 몸은 최후의 방어 기제를 작동한다고 어떤 떠돌이 용병이 말했었다.

“그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통증 부위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환상 같은 헛것도 보이는 거겠지.

이카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생명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곧 제 어깨를 흔들며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폐하?”

나지막이 들려온 르네브의 목소리가 이카르의 상념을 두드렸다.

이카르는 그때의 저를 구해 준 그 꼬마가 르네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르네브는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전의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 국경 인근의 별장을 소유한 가문이 세이렌 후작 가라는 걸.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지.”

이카르는 르네브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고는 마차 창 너머를 가리켰다.

“저길 봐.”

이카르를 따라 마차 창 너머를 응시하던 르네브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와…….”

마치 요새와 같은 거대한 성채가 눈앞에 펼쳐졌다.

“파라디움의 서부 방어선을 뚫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 이해했나?”

르네브는 성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국경선을 따라 쭉 이어진 성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선대 세이렌 후작은 이 방벽을 두르는 데 가진 가산을 거의 탕진했다고 하더군.”

“그럴 만하네요.”

르네브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을 빙 둘러 한참 달리던 마차가 드디어 거대한 성문 앞에서 멈췄다.

“신분 확인 절차인 모양입니다.”

마차 벽 너머로 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브는 마차 창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성문 앞에 있던 보초병들과 이내 눈이 마주쳤다.

르네브가 배시시 웃자, 보초병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셨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보초병들의 외침이 들리고, 얼마지 나지 않아 거대한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품을 뒤적이던 이카르가 피식 웃었다.

“신분을 증명할 문서는 가져올 필요가 없었군.”

“……그러게요.”

사실 놀란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르네브가 세이렌 후작령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 자란 르네브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는 보초병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성문을 지나친 마차는 성벽 안의 번화가와 마을을 지나 깊숙이 자리한 세이렌 후작 저로 향했다.

파라디움 수도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세이렌 후작 저도 큰 편에 속했으나, 그에 몇 배는 되는 웅장한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가 거대한 철문을 지나 세이렌 후작 저로 향하는 길목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분명, 처음 와 본 걸 텐데……. 어째서 낯이 익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카르의 지긋한 시선이 뺨에 와닿았다.

“음…… 이런 게 데자뷔인 걸까요? 분명 처음 오는 게 맞을 텐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요?”

잠시 르네브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이카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택 전경을 그림으로 남겨 두기도 하니까, 영애가 지내던 수도의 세이렌 후작 저에 이곳의 그림이 있을 수도 있겠군.”

……그런가?

잠시 기억을 돌이켜 봤지만, 다운타운의 세이렌 후작 저에서 그런 그림은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이카르에게 청혼을 받은 날 르네브는 직접 겪지 않았던 과거가 문득 떠올랐던 것을 기억해 냈다.

트레이더 백작 영애를 떠밀었던 건 르네브가 빙의하기 전의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빙의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뇌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르네브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마차가 세이렌 후작 저 앞에서 멈춰 섰다.

이카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르네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택 앞엔 고용인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고, 그들은 르네브와 이카르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꾸벅 숙였다.

흡사 잘 훈련된 기사들과 같은 절도 있는 고용인들의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웅장해졌다.

진짜 집에 돌아온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과연 후작답군.”

이카르가 르네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저택의 고용인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한 모양이야.”

르네브는 회귀 전 파라디움 황궁 안을 전쟁터 같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상대의 신체에 흠결을 내지는 못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상처를 내는 전쟁터라고.

하지만 그건 피가 낭자하는 전쟁터엔 직접 가 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르네브는 스스로가 꽤나 안전한 곳에서 여생을 누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반해 이카르는 수많은 전장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상대의 몸가짐만 보고도 전투력을 바로 눈치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르네브 아가씨. 잘 돌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용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백발의 노신사가 말했다. 르네브가 시선을 주자 노신사가 말을 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세이렌 성의 집사로 일해 온 스튜어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스튜어드.”

르네브는 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째서 세이렌 후작령의 사람들이 제 얼굴을 바로 알아봤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르네브의 초상화가 떡하니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상화는 하나가 아니었다.

공갈 젖꼭지를 문 갓난아기의 초상화 옆에는 꼬꼬마였던 어린 르네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조금 더 자란 그녀의 초상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 인테리어가 내 취향에 꼭 맞는군. 후작과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 다행이야.”

이카르가 초상화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르네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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