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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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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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게 문제
2023.05.28.
이카르는 빠르지만, 우아하게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가는 르네브의 뒷모습을 좇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치는 걸 봐선 눈치챈 것 같군.’
하지만 그런 르네브의 행동은 이카르에게 확신만 줄 뿐이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오히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게 문제일 정도였다.
기민하게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황궁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지금 르네브는 딱 적절하게 튄 참이었다.
당장은 제 의도를 빨리 눈치채고 도망쳐 버려 못내 아쉬웠지만.
이카르는 물미역같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지는 르네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야무지게 꼭 쥔 두 팔 사이로 드러난 잘록한 허리선에 이카르의 시선이 닿았다.
“하…….”
곧 이카르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여신의 현신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게 아닐까 하고, 이카르는 잠깐 제 눈을 의심했다.
오늘 르네브는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잠깐이지만 숨도 쉬지 않고,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을 정도로.
반만 틀어 올린 은발은 진주를 흩뿌려 놓은 듯 반짝였고, 몸의 윤곽이 제법 드러나는 연보랏빛 드레스는 르네브의 자안과 어울렸다.
너무 예뻐서 저 모습 그대로 박제해 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즈음. 이카르는 다소 충동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바슈케르 유력 귀족들에게 르네브를 소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동시에 이 여자가 내 여자라며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양가감정에 시달리다 후자가 승리했을 뿐.
“폐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이카르는 어렵사리 르네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뭐지?”
***
파우더 룸에서 조금 시간을 보낸 르네브는 다시 그레이트 홀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영애,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레이첼 왕녀였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죠?”
몇 개월 만에 본 레이첼은 여전히 생기 넘쳤다.
르네브가 그녀와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때였다.
제법 훈훈한 외모를 지닌 젊은 영식이 다가와 르네브와 레이첼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당연하게도 르네브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레이첼과는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녀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젊은 영식의 물음에 레이첼이 곤란한 듯 르네브를 힐끔거렸다.
르네브는 눈빛으로 레이첼과 대화를 나눴다.
‘전 괜찮으니, 가 보세요. 저 영식이 마음에 드신다면요.’
‘그럼 실례할게요.’
싱긋 웃은 레이첼이 영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이죠.”
레이첼의 허락에 젊은 영식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왕녀님. 오늘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청춘이구나.
르네브는 흐뭇한 눈으로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막 그레이트 홀로 들어섰을 때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동시에 르네브의 눈앞으로 핑크빛 과일주가 찰랑거리는 크리스털 잔이 들어왔다.
르네브는 제게 잔을 내민 상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베인 경?
“방금 조금쯤 기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기대라니요?”
“영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영식이 말을 걸어온 게 아닐지 하고 말입니다.”
베인이 씩 웃으며 르네브에게 과일주를 권했다. 르네브는 베인에게서 크리스털 잔을 받아 들며 픽, 웃었다.
“전혀요.”
“전혀 안 하셨습니까?”
“네. 전혀요.”
르네브가 표정을 싹 굳힌 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드한이 다가왔다.
“베인 이 녀석.”
드한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베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든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영애.”
드한은 베인이 르네브에게 실례했을 거라고 확신에 찬 듯했다.
그러면서 ‘저희 애는 안 물어요.’ 하고 덧붙였다. 베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보며 르네브가 푸스스 웃음을 흘릴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곧 시종이 외쳤다.
“솔티의 왕녀님 입장하십니다.”
르네브는 근처에 귀족들의 시선이 머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시카가 잘츠 후작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많이도 늦으셨군요.”
에시카를 바라보며 베인이 말했고, 드한도 말을 보탰다.
“그런데도 참으로 당당하시고.”
초대장에 적힌 시간보다 한참 늦은 등장이긴 했다.
파티는 새벽까지 이어질 예정이었기에, 조금 늦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자리인 만큼 대다수 귀족들은 시간에 맞춰 황궁을 찾은 참이었다.
그리고 드한과 베인은 이를 자신들의 주군을 향한 무례라고 판단한 듯했다.
“…….”
에시카가 잘츠 후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르네브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천진하고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에시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총기가 돌았다.
언뜻 우월감에 찬 것 같기도 한 그 자신만만한 눈빛에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조만간 나무 진액에 당한 반격을 해 올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인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르네브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자, 드한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애?”
르네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다 여기 계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이카르를 제외하면 오늘 가장 바쁠 사람은 드한과 베인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제 주변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는 게 조금 신경 쓰였다.
“……사실, 폐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드한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르네브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어떤 명령이죠?”
르네브가 되묻자, 이번에는 베인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자질하듯이 르네브의 귀에 속삭였다.
“폐하께서 오늘은 가능한 영애와…….”
속살거리던 베인이 갑자기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마침 폐하께서 저기 오시는군요.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시죠.”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카르가 가늘어진 눈을 하고 르네브의 좌측에 선 드한을 한 번, 우측에 선 베인을 한 번 훑어봤다.
이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이카르가 물었다.
“세 사람이 매우 친밀해 보이는군. 서로 돈독한 유대감이라도 쌓았나 보지?”
그러나 이마엔 힘줄이 불뚝 솟아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
심기가 잔뜩 비틀린 그의 모습에 드한과 베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도 이만.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영애.”
드한과 베인이 르네브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이카르의 눈빛이 한층 살벌해졌으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르네브의 귓가에 작게 속닥거렸다.
“하…….”
기가 찬다는 듯 이카르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제야 슬쩍 이카르의 눈치를 살피던 드한과 베인이 빠르게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저 녀석들이 뭐라고 속살거렸지?”
“별것 아니었어요.”
이카르의 미심쩍은 시선에도 르네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는 폐하야말로, 드한 경과 베인 경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신 거예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
드한과 베인이 사라진 쪽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이카르가 말했다.
“설마 저를 홀 안에 붙잡아 두라는 명령을 내리신 건 아니겠죠?”
이카르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진짜?’
황망함에 입만 뻐끔거리는 르네브에게 이카르가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군.”
사람들로 붐비는 홀을 빠져나와 테라스에 들어서자 청량한 공기가 느껴졌다.
해가 저문 밤하늘은 깜깜했지만,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가로등들이 황궁 정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영애.”
“네.”
“녀석들이 영애에게 뭐라고 속살거리던가?”
떠나기 전 드한과 베인이 르네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영애. 안타깝지만 단단히 잘못 걸리셨습니다. 혹여라도 위험하다고 판단되시거든 당근을 흔들어 주십시오.’
드한은 그렇게 말했다.
당근을 흔드는 건 바슈케르에서 위험한 상황을 알릴 때 쓰는 암호였다.
‘폐하께서는 영애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있으십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어떻게든 이뤄 내고 마는 편이죠.’
그러니 도망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라며 베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카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모쪼록 탄신일을 즐기길 바란다더군요.”
르네브의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기울였다.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황궁 정원의 운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던 이카르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전에 한 제안은 생각해 봤나?”
평소답지 않게 생글거리는 게 꼭 사기를 계획한 사기꾼 같았다.
최측근인 두 사람도 경고했다시피, 이카르가 르네브를 황후로 만드는 걸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르네브는 시간을 벌기로 했다. 파라디움으로 돌아갈 때까지 대답을 보류하는 것으로.
“조금 더 심사숙고해도 괜찮을까요?”
금방이라도 닦달할 것 같던 이카르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해.”
그렇게 말하는 이카르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게 언제가 되든 르네브 스스로 황후가 되겠다고 말할 거란 확신에 찬 듯이.
르네브는 오색 빛깔을 뿜어내는 가로등들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바로 입을 열었다.
“아, 참!”
르네브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이카르의 생일 선물을 꺼냈다.
“폐하, 생신 축하드려요.”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엘의 침대맡에 두었던 것과 같은 안달루사이트로 만든 세공품으로 토끼 모양이었다.
“영애?”
“네.”
“그대는 나를, 코 묻은 어린애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정말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 들었어요.”
르네브의 대답에 이카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가 그랬든, 입이 아주 가볍군.”
멜리타가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르네브는 굳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머리맡에 두고 자면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다고 해요.”
이카르가 엄지와 검지로 토끼 모양 세공품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가로등 빛에 따라 색을 바꾸는 세공품을 유심히 바라봤다.
“고마워. 이제 푹 잘 수 있겠군.”
이카르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지만, 르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다행이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