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미끼가 되겠다는 뜻인가? (59/148)


#59화 미끼가 되겠다는 뜻인가?
2023.05.29.


에시카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연신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가끔 르네브의 동선을 눈으로 좇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 에시카의 시선을 읽은 잘츠 후작이 넌지시 물었다.

“혹여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되십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후작님을 믿고 있는걸요.”

에시카는 눈매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잘츠 후작이 가슴께를 짚으며 끙, 앓는 신음을 토했다.

사랑에 푹 빠진 남자의 눈빛에 에시카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잘츠 후작이 예상보다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네.’

그간 에시카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람이 많고, 혼잡한 틈을 타 르네브를 납치한 다음 타국의 노예로 팔아 버리기로.

그럼 더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슈케르에서 가짜 왕녀 신분에 대해 거론한 사람은 르네브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제 고운 얼굴에 손상을 입힌 복수도 통쾌하게 할 수 있었다.

에시카는 곧장 자신을 도울 인물을 물색했다.

처음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을 그 대상으로 삼고 상의를 했다. 다행히 어려움에 처한 하녀를 도와줄 수 있겠냐는 말에 선뜻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에시카는 조금 더 들어주기 어려울 법한 부탁을 꺼냈다.

처음부터 어려운 부탁을 하면 거절하기 쉽지만, 점점 수위를 높여 가는 방법은 나름 잘 통했으니까.

‘왕녀님의 부탁이니만큼, 가능한한 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어렵겠네요.’

르네브를 납치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슬쩍 발을 빼려고 들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는 다른 분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예를 들면, 잘츠 후작 같은…….’

정작 중요한 때 도움이 안 되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을 뒤로하고 에시카는 잘츠 후작을 찾아갔다.

그간 교류를 해 온 만큼 잘츠 후작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왕녀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평소 에시카를 흠모하고 있었던 만큼 잘츠 후작은 바로 미끼를 물었다.

‘저 사실, 파라디움의 귀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이게 그 증거라며 뺨에 난 흉터까지 내보여 주자, 잘츠 후작이 분개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지……. 안 되겠습니다.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폐하께 직접 알려서 조처해야…….’

에시카는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갈 기세가 만만인 잘츠 후작을 만류했다.

‘저도 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더라고요.’

‘후환이라니요?’

에시카는 과거 파라디움에서의 일을 거론했다.

비록 뭘 모르는 어린 날의 일이었다고는 하나 르네브가 파라디움의 영애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했던 사건 말이다.

‘그렇게 악독한 여자였다니……. 겉모습만으로는 정말 사람 속은 알 수가 없군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잘츠 후작에게 에시카는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저 너무 무서워요. 제게도 같은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에시카는 눈물을 글썽이며 잘츠 후작의 연민을 자극했다.

‘안심하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에시카의 의도대로 잘츠 후작의 안광이 당장 누군가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 험악하게 빛났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파라디움으로 쫓아 보내서 다시는 왕녀님의 앞엔 얼씬도 못 하게 만들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으나, 에시카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원했다.

오히려 인질 신세를 면했다며 좋아할 수도 있었고, 파라디움에서 호의호식할 모습을 상상하자 못마땅했다.

게다가 자신이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면 언젠간 그 얼굴을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잘츠 후작을 잘 구슬렸다.

르네브가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위험 부담이 따르는 만큼 계획 단계에서부터 치밀하게 공을 들였다.

하지만 좀처럼 실행의 기회가 주어지질 않아 애가 타던 중에 황제의 탄신일은 적기로 보였다.

황궁에 초대된 귀족만 수백이었고, 그들의 호위 기사와 마부, 시중을 들 하인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황제의 탄신일 앞뒤 며칠은 황궁 문을 활짝 열어 둔다고 했다.

‘그 속에 몇 명쯤 섞여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간대도 모르겠지.’

***

오늘의 주인공 이카르에게 말을 걸어오는 귀족은 많았고, 일일이 모든 사람에게 르네브를 소개하려 드는 이카르 때문에 르네브는 지쳐 버렸다.

그래서 잠시 쉬겠다 말하고 홀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이카르와 떨어지기 무섭게 드한이 르네브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

“마치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질문이 예리했던 걸까?

드한의 얼굴에 잠깐 난감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는 곧 미소를 머금고 말을 줄줄 뱉었다.

“아름다운 꽃엔 벌이 달려들기 마련이죠. 그러니, 날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영애 곁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말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여성을 유혹해 본 적이 없던 드한의 얼굴 근육이 씰룩였다.

르네브가 빤히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전 둘러댄 변명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드한 경, 잠시만요.”

르네브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드한을 이끈 뒤 조용히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해요. 제게 뭔가 숨기는 게 있나요?”

드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르네브는 바로 덧붙였다.

“아니면, 오늘 있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인가요?”

“……!”

드한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잡아뗐다.

“영애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드한이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깃털 모자를 쓴 저 사람, 그리고 저기 오케스트라 단원들 근처를 서성이는 저 사람…….”

르네브는 홀 안의 많은 사람 중에서 몇몇을 콕콕 지목하며 말했다.

“폐하의 비밀 호위들이죠?”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드한이 뜨끔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기를 꺼리는 것 같던데 쉬지 않고 홀 안을 배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눈치채셨군요.”

“저들이 주시하는 대상은 아마 저겠죠. 맞나요?”

떠보듯 물어본 것이었으나,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드한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제게 앙갚음하려는 사람이 있거든요. 폐하의 탄신일로 오늘 황궁 문은 활짝 열려 있는 셈이죠. 그러니 일을 벌이려면 오늘이 적기라고 판단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드한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대화가 빠르겠군요. 오늘은 가능한 눈에 띄는 자리에 계시는 것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

르네브가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자 드한이 말을 이었다.

“미심쩍은 정황이 포착되어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아직 완벽하게 상대의 계획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르네브에게 말하기를 꺼렸던 모양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간 불안감만 돋울 수 있으니.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요, 드한 경.”

드한이 옅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폐하께도 얼른 이 사실을 알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렵지 않게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카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폐하. 긴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잠깐, 실례하지.”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이카르가 그들에서 떨어져 나왔다. 곧바로 세 사람은 홀 근처의 내실로 자리를 옮겼다.

드한이 이카르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이카르의 미간이 깊어졌다.

「어련히 알아서 잘 대처하시겠지만, 노파심에 알려 드립니다. 황제의 탄신일 당일, 황궁 잠입. 블랙 코인.」

얼마 전 이카르 앞으로 도착한 익명의 편지는 필체가 제법 낯익었다.

이카르는 황제가 되기 직전까지 용병이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같은 용병단 소속이더라도 파벌은 갈리기 마련이었으니.

용병들 사이 블랙 코인은 살인, 납치 등 강력 범죄를 의미하는 은어였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맡길 때는 비대면을 원칙으로 했다. 의뢰인과 의뢰를 실행하는 용병이 누구인지 서로 모르도록.

그래야 행여나 맡은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의뢰인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 방법은 이카르의 발목을 잡을 뻔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누구를 해치려 하는지 그 대상을 특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표적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니면, 목적이 살해인지 납치인지까지도 불분명했을 테니까.

하지만 익명의 제보자는 작은 비둘기 그림을 그려 놓음으로써 표적에 대한 힌트를 남겨 놓았다.

비둘기는 대륙 어디서나 평화의 상징으로 통했고, 표적은 초청된 귀빈 중 하나일 거란 결론에 도달했다.

이카르는 귀빈 네 사람 중에서 특히 르네브의 신변 안전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보안에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가 삼엄한 것을 깨달은 의뢰자가 거행 일을 다음으로 미룰 수도 있으니까.

그편이 더 골치 아팠기 때문에 가능한 오늘, 범행 직전에 범인을 잡아들일 작정이었다.

“영애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지?”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르네브의 대답에 이카르의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왜지?”

이카르가 되물었지만, 르네브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에시카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서로에게 선물을 보낸 일만으로도 이카르는 충분히 르네브와 에시카의 대립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도 넘길 수 있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카르는 르네브와 에시카의 관계에 대해 파고들 것이고, 르네브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회귀 전 자신은 황후였고, 에시카는 제 전남편인 황제의 정부였다고.

말한들 믿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르네브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이카르도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과는 있습니다. 표적을 특정했으니까요.”

드한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도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다시금 무거워진 침묵을 깨고 르네브는 입을 뗐다.

“폐하의 비밀 호위를 잠깐만 제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카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끼가 되겠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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