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루시우스의 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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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루시우스의 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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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루시우스의 계략
2023.05.27.
“백작의 주군은 무척 순진한 모양입니다.”
루시우스는 대답 없이 포도주만 홀짝이는 리젠시 백작을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줘서 그를 도발하기 위함이었다. 의도대로 리젠시 백작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살며시 주먹을 꽉 쥐는 모습에 루시우스는 리젠시 백작이 감정 표현에 무딘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다.
단지 그에게 왕녀의 안위가 중요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약속한 기간이 지나면, 바슈케르의 군주가 솔티와 우호 관계를 유지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그거야. 그렇겠지요. 3년간 신뢰 관계를 구축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
루시우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보시죠. 백작은 바슈케르와 솔티의 동맹이 가능하다 보십니까?”
리젠시 백작이 확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베니스탄이나 라이나는 어쩌면 바슈케르와의 동맹에 성공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솔티만큼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단언하십니까?”
리젠시 백작이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냈고, 루시우스는 바로 받아쳤다.
“그건 백작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루시우스는 부러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리젠시 백작을 똑바로 바라봤다.
리젠시 백작이 살짝 시선을 피하더니 곧바로 허허 웃으며 응수했다.
“황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로선 도통 모르겠습니다.”
“파라디움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신 모양입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감히 대제국 파라디움을 우습게 보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리젠시 백작이 손사래까지 쳐 가며 강하게 부정했다.
“파라디움뿐 아니라, 바슈케르 군주 또한 우습게 보셨을 텐데요?”
리젠시 백작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줄곧 침착하게 대응하던 그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대리. 아니 가짜라는 표현이 맞을까요? 지금 바슈케르에 있는 왕녀 말입니다.”
“……!”
리젠시 백작이 흠칫 굳었다.
추측이었을 뿐이었는데, 조금 전 리젠시 백작의 반응으로 루시우스는 솔티에서 가짜 왕녀를 바슈케르로 보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고 있나 보군요. 평민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지요.”
루시우스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리젠시 백작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제 충실한 부하가 솔티에서 상단 하나를 꾸렸습니다. 제게 가끔 안부 편지를 보내고는 하지요.”
“…….”
“왕궁에도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던데.”
루시우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젠시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아, 그, 그렇군요.”
“듣자 하니 왕궁 깊숙한 곳에 탑이 하나 있다죠? 그곳으로 식사를 나르는 걸 본 적이 있다던데.”
루시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리젠시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 식사가 꽤 호화롭다더군요.”
루시우스는 고개를 숙인 리젠시 백작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파라디움과 솔티의 긴밀한 동맹을 제안하죠. 당연히 바슈케르엔 비밀입니다.”
“황자 전하! 제, 제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
“그럼요. 물론 시간을 드려야겠지요. ‘지금의’ 리젠시 백작에겐 솔티를 좌지우지할 힘이 없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리젠시 백작은 흠칫 굳은 채로 시선을 들었다.
“파라디움과 솔티의 동맹에 꼭 현재 왕의 의견이 필요할까요?”
“그 말씀은……!”
루시우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리젠시 백작의 굳은 어깨를 기분 좋게 툭툭 두드렸다.
***
마차로 돌아온 리젠시 백작은 긴장으로 젖었던 이마의 땀을 훔쳐 냈다.
“출발하게.”
마부에게 외친 리젠시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곱씹었다.
‘그렇게나 조심했건만…….’
왕녀 대신 가짜를 바슈케르로 보내고 수개월 간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주의를 기울였다.
그 탓에 아드리아 왕녀는 감옥의 죄수처럼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탑에 갇혀 지냈다.
차라리 당당히 바슈케르로 떠나는 게 나을 정도의 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바슈케르뿐 아니라, 파라디움까지 왕이 가짜 왕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역시 대제국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지.’
리젠시 백작은 솔티에 돌아가는 대로 왕궁 안에 숨어든 타국의 첩자를 찾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더는 솔티의 내부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어째서 사실을 알고도 솔티에 책임을 묻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리젠시 백작은 솔티로 돌아가서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다 파라디움의 3황자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파라디움과 솔티의 동맹에 꼭 현재 왕의 의견이 필요할까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반역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3황자 자신이 황제가 되면 리젠시 백작을 솔티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듯한 울림이었다.
“하아…….”
리젠시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파라디움의 1황자와 2황자가 건재한 지금 3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니 3황자의 말을 온전히 다 믿는 것은 어리석었다.
‘하지만…….’
솔티 정계에 오래 발 담가 온 리젠시 백작의 직감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3황자가 다른 황자들을 제치고 황위에 오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황궁의 주방은 여느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장작은 마르기 무섭게 화로 속으로 던져 넣어졌고, 요리사들은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쉴 새 없이 음식을 만들어 냈다.
오죽하면 고양이 발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툴툴대는 이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내자마자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하인이 연회장으로 음식과 술을 나르기 바빴다.
예쁘게 플레이팅된 수십 가지의 요리 중에서 르네브는 연어와 채소로 엮은 핑거 푸드를 하나 집어 먹었다.
재료는 신선했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자연히 르네브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파라디움의 귀족이나, 타국의 왕족들을 상대하느라 밤이 늦어서까지 배를 쫄쫄 굶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접대를 받아야 할 손님인 만큼 르네브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준비된 음식 몇 가지를 더 맛봤다.
그때 르네브의 얼굴 앞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내 듣기 좋은 저음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어디 계신가 했더니, 여기 계셨군.”
늘 사신처럼 검푸른 제복만 입던 이카르가 오늘은 웬일로 흰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화사한 색감은 이카르와 잘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무 잘 어울렸다.
성격 좋은 왕자님 같달까.
스스로의 생각이 우스워 자조하던 르네브는 이카르의 소맷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소매의 연보랏빛 자수는 르네브가 입은 드레스와 색감이 닮아 있었다.
‘설마?’
르네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연인 사이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 귀족들이 으레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디자인이나 의복 색상, 혹은 포인트 장신구를 커플로 맞추는 건.
자연히 황녀 대신 바슈케르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비는 모두의 앞에서 루시우스와 르네브가 연인 사이라 공표하려 했었다. 르네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게다가 어떻게 미리 알아냈는지 루시우스는 르네브와 같은 색감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불안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르네브는 얼른 떨쳐 냈다.
제멋대로 굴긴 해도, 이카르가 르네브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깔 맞춤을 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 같지도 않고.
‘……아닐 거야.’
르네브는 무심코 이카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뒤늦게 자각했다. 이는 황제를 향한 예의에 어긋났다. 특히나 이런 공식 석상에서는 더더욱.
르네브는 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대한 우아하고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이카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런 르네브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일견 얼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저…… 폐하?”
르네브는 사람을 불러 놓고 말도 없이 쳐다만 보는 이카르를 조용히 일깨웠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린 이카르가 씹어뱉듯 내뱉었다.
처음에는 매우 기분이 나쁜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오히려 너무 좋은데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해 곤란해하는 느낌이랄까?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것 같더니 이내 이카르가 앓는 듯한 한숨을 흘렸다.
“하…….”
르네브는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이카르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뭔가 대단히 큰일이 있겠거니 하며 물었다.
“폐하, 큰일이라니요? 무슨 일 있나요?”
주변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묻자, 이카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그보다 모처럼 음식을 즐기는 중에 미안하지만, 잠깐 나와 어울려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폐하.”
르네브가 선뜻 대답을 내놓자, 이카르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
이카르가 어리둥절해하는 르네브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신사가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흔한 예절이었기에, 르네브는 사양하지 않고, 이카르와 팔짱을 꼈다.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중년의 귀족이 다가와 이카르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곤 축하의 말을 건넸다.
“황제 폐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주어 고맙군.”
이카르는 그와 짧게 안부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폐하, 옆에 계신 분은?”
“인사하지. 파라디움에서 온 세이렌 후작 영애야.”
중년의 귀족이 르네브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형식적인 칭찬을 해 왔다.
“아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르네브는 가볍게 그와 인사를 나눴다.
이후에도 르네브는 이카르와 함께 바슈케르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잠깐 어울려 달라더니?’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했다.
“저, 폐하. 잠시만요.”
르네브는 또 다른 귀족에게 다가가려는 이카르를 멈춰 세웠다.
“뭐지?”
“잠시 파우더 룸에 들렀으면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보던 이카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르네브는 드레스 자락을 쥔 채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곧바로 홀을 빠져나왔다.
‘아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르네브는 그레이트 홀을 힐끔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앙큼한 계략남 같으니라고.’
지금 이카르는 바슈케르의 유력 귀족들에게 르네브를 소개하고 다닌 거였다. 그것도 겉으로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색감이 들어간 의복을 걸치고.
눈치 빠른 사람이었더라면 이카르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을 것이었다.
황제가 차기 황후로 점찍은 여자가 이 여자라고, 넌지시 암시를 주었다는 걸.
그럼 르네브가 할 바른 행동은, 튀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