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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이카르의 호위 (52/148)


#52화 이카르의 호위
2023.05.22.


트왈렛 룸으로 향하는 르네브의 뒤로 따라붙으며 키어넨이 물었다.

“레이디,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금방 사 올게요.”

“직접 다녀오고 싶어서요.”

“혹시, 황제 폐하께 드릴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가시는 건가요?”

“응.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들을 쭉 둘러봤다.

얼마 전 이카르가 보낸 겨울용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들로 가득했다.

르네브는 그 중 어깨와 소매에 담비 털을 덧대어 만든 벨벳 드레스를 가리켰다.

“오늘은 이걸로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앰버와 키어넨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

르네브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는 조금 걱정돼요. 아가씨.”

앰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키어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에시카는 일견 얌전히 지내는 것처럼 보였고, 얼핏 피부 발진의 원인을 아직 찾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냥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최근 에시카는 바슈케르 귀족들에게서 들어오는 선물들을 검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에시카가 피부 발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도는 눈치챘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샤반 남작의 이름으로 문제의 선물을 보낸 사람이 르네브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시카가 어떻게 보복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르네브가 외출하는 게 두 사람은 걱정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르네브는 부러 살짝 시선을 떨어뜨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자 앰버와 키어넨이 동시에 고개를 붕붕 저으며 손사래 쳤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레이디를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르네브가 살포시 웃자 그제야 앰버와 키어넨이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시카가 다음번엔 어떤 방법으로 르네브를 공격하려 들지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의 방식으로 보아 원작에 등장했던 수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컸다.

원치 않게도, 회귀 전의 일들로 인해 르네브는 에시카를 꽤 잘 알았다.

얼마 전 앰버는 에시카의 얼굴에 작은 흉이 남았다는 사실을 전해 왔다.

사파이어 펜던트에 바른 나무 진액으로부터 시작된 피부 발진의 후유증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에시카가 느꼈을 엄청난 분노는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왕가의 가보에 대해서도 알아봤다고 했지.’

에시카는 바슈케르에 온 뒤 주기적으로 솔티에 편지를 보내고는 했는데, 최근 그 간격이 평소와 달리 짧았던 적이 있었다.

르네브가 왕가의 가보에 대해 언급한 이후, 그녀는 의도치 않게 왕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언제 드러날지 몰라 조마조마한 에시카의 불안을 건드린 셈이었다.

바슈케르에서 에시카의 왕녀 신분에 의문을 표한 최초의 인물이 르네브일 테니까.

***

“폐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드한의 말에 이카르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황궁 밖으로 외출을 일정을 알려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카르는 특별한 일이 있을 시에만 귀빈들의 행적을 보고하라 일러뒀다.

그리고 르네브의 외출은 특별한 일에 속했다. 그녀는 다른 귀빈들과 달리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외출을 허락하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폐하.”

“세이렌 후작 영애의 호위는 누가 맡기로 했지?”

귀빈들이 황궁 밖으로 나갈 때는 많은 호위가 따라붙었다.

호위는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분류했는데 1군은 곁에서 귀빈을 호위는 역할을 했고, 2군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귀빈을 지켜봤다.

뛰어난 바슈케르의 기사 중에서도 이카르에게 인정받은 실력자가 2군에 속했다.

이카르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1군과 2군 기사들을 르네브에게 붙여 두었다.

하지만 르네브는 황궁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았고, 인력 낭비라 판단한 뒤부터 르네브의 1군 호위를 외출 잦은 다른 귀빈들의 담당으로 돌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늘 르네브의 외출엔 1군 중에서도 남는 인력을 붙여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카르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빌랜드 경을 세이렌 후작 영애의 호위로 배정할까 합니다만…….”

인력 배치 목록을 들여다보며 드한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빌랜드 경이라.”

이카르는 집무실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실력 면에서는 이카르도 하빌랜드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외골수적인 면이 있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하빌랜드는 악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탓에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괜히 세이렌 후작 영애의 심기를 상하게 하진 않을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드한.”

“예, 폐하.”

“그러고 보니 내가 황궁 밖으로 시찰을 나간 지도 한참 된 것 같군.”

의도가 다분한 이카르의 말에 베인이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폐하! 그렇다면 오늘이 적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일손이 바쁜 기사들을 돕는 셈 치고, 황궁 밖 시찰도 겸하면 되겠군.”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베인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척 들었다.

드한은 서류를 보는 척하며 힐끗 이카르 쪽으로 눈을 굴렸다.

집무실을 나서는 이카르의 입꼬리 끝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솔직하지 못하셔. 그냥 세이렌 후작 영애와 함께 외출하고 싶다고 하시면 될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못내 입안이 썼다.

곁에서 가장 오래 지켜본 만큼 드한은 이카르의 심정을 조금쯤 이해하고 있었다.

이카르는 가족의 온정이나 어머니의 따뜻함 그 무엇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낯설기 마련이고, 좋든 나쁘든 익숙한 것에 끌리게 되어 있다.

이카르에게 사람의 온기나, 사랑같이 몽글몽글한 감정은 전혀 낯선 것이었다.

드한과 베인 또한 황궁 밖에서 이카르를 모시는 동안은 그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정은 이카르와는 완전히 달랐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차기 황제로서 이카르가 입궁하게 되었을 때 드한과 베인의 가족은 살아 있었다.

어린 시절을 따로 떨어져 지냈기에, 그들 또한 곧바로 가족애라는 것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사지로 내몰아야 했던 드한과 베인의 부모는 그간 주지 못한 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카르는 그러지 못했다.

선황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선황제 또한 이카르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바슈케르의 차기 황제로만 대했을 뿐.

“…….”

이카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드한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겪는 낯선 감정에서 오는 두려움과 거부 반응을 드한 또한 모르지 않아서였다.

***

“다녀올게요.”

르네브는 키어넨과 앰버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로 향했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지면을 밟을 때마다 울리는 뽀드득 소리가 완연한 겨울이 왔음을 알렸다.

‘이렇게 눈을 직접 밟아 본 게 얼마 만이지.’

르네브는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위에 발 도장을 찍으며 감상에 잠겼다.

황후일 때는 너무 많은 업무 탓에 여유롭게 산책을 나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나뿐인 아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르네브가 외출을 한번 할 때마다 황궁 안은 비상이 걸렸다.

르네브의 외출엔 시녀, 그녀들을 보필할 하녀 및 수십 명의 기사가 뒤따랐다.

그 외에도 황후의 이동 경로에 인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뿐인가.

여러 대의 마차와 기사들이 탈 마차 외에도 부수적인 많은 것이 필요했다. 해서 르네브는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외출을 삼갔다.

너무 많은 인력이 낭비되었으니까.

확실히 지금이 그때보다 편했다. 비록 인질이지만.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서 루시우스에게 복수를 하고 나면 여행이라도 다녀 볼까?’

괜찮은 생각 같았다.

르네브는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준비된 마차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마차 앞에서 호위 기사가 대기하기 마련인데 르네브가 타고 갈 마차 근처에는 기사가 한 명도 없었다.

이카르는 귀빈들의 안위를 중시했다.

호위 기사 한 명 붙여 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모자를 벗어 가슴께에 얹은 마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반가워요. 그런데 호위 기사분은 아직이신가요?”

“오늘 레이디를 호위해 주실 분은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부의 대답에 르네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호위 기사가 어째서 마차에 타고 있는 거지?’

파라디움과 다른 바슈케르의 문화라 하기엔 모호했다. 벨케인 소공작과 외출했을 땐 호위 기사가 여럿이 마차 밖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파라디움과 다르지 않게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때였다.

“늦었군.”

익숙한 저음이 울리더니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마차 안에 이카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제복 대신 조금 편안한 차림이었다. 마치 지난번 세이렌 후작 저에 숨어들었을 때처럼.

“폐하?”

르네브는 놀란 눈으로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카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탈 건가?”

르네브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이카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어째서 폐하께서 계신 거예요?”

“마침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이 있던 차에 영애의 외출 소식이 들리더군.”

나가는 길에 동행한다는 뜻 같았다.

“그런데 호위도 없이 황궁을 나가시려고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살짝 코웃음 쳤다.

“설마, 귀빈을 그리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이카르가 마차 창 너머 한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건장한 청년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르네브는 그들이 방금까지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에, 상당히 놀랐다.

이카르가 시선을 줄 때마다 한 사람씩 르네브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몇몇은 르네브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아…… 오랜만이에요.”

국경 지역에서 봤던 바슈케르의 최정예 전사들 같았다.

“폐하의 비밀 호위인가 보군요.”

“맞아. 개개인 모두 기사 삼십 명 몫은 족히 해낸다고 보면 되지. 그러니 갑자기 괴한이 떼로 나타나더라도 영애는 무사할 거야.”

“그것참, 안심이 되네요.”

르네브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샤반 남작의 일을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하길 잘했구나.’

저들이 기척도 없이 잘 숨어 있던 걸 보면, 이카르가 자신에게도 사람을 붙여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빤히 보일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났더라면 이카르의 신뢰를 잃은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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