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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모든 것이 루시우스와는 정반대 (51/148)


#51화 모든 것이 루시우스와는 정반대
2023.05.21.


“영애는 단정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르네브가 막 이카르의 재킷에서 손을 떼어 냈을 때 이카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단정한 거요?”

“아니, 아니야. 앉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카르가 소파로 걸어갔다.

그의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조금 시무룩해 보인다면 제 착각일까?

르네브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카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 시간 낭비를 싫어하다 보니 이카르는 대화를 할 때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뜸을 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르네브는 조금 불안해하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이카르가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영애. 지난번에 샤반 남작에게서 받았다는 과일 선물이 뻬쉬가 맞나?”

“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덧붙였다.

“뻬쉬를 황궁 반입 금지 식품으로 지정했으니, 앞으로는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예상치 못한 이카르의 말에 르네브는 눈을 크게 떴다.

‘뻬쉬를 황궁 반입 금지 식품으로 지정했다고? 왜?’

곧 얼마 전 그 일로 이카르와 대화를 나눴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제 일이 아닌 척 의견을 물었지만, 이카르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르네브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려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째서 이카르는 매번 내 아픈 과거를 보듬어 주는 말만 할까.’

이카르는 모든 면에서 루시우스와 정반대였다.

바슈케르에서 뻬쉬라 부르는 과일인 복숭아에 대한 것도 그랬다.

루시우스는 르네브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테이블에 올리는 것을 허락했었다.

‘가끔은 평민들의 음식을 즐기는 것도 괜찮군.’

따위의 말이나 하면서.

“영애, 한 가지만 더 묻지.”

그때 이카르의 목소리가 불쾌한 기억에 매몰되려는 르네브를 끄집어냈다. 르네브는 시선을 들어 이카르를 바라봤다.

“말씀하세요. 폐하.”

“내가 그 일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할 필요를 느껴 샤반 남작을 황궁으로 불러들였거든.”

“…….”

“그에 관해 내게 할 말 없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이카르의 시선에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까지 알고 묻는 걸까.’

샤반 남작과 직접 대면했다면 이카르가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에시카가 자신에게 뻬쉬를 선물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에시카에게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선물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모두.
이는 좋지 않았다.

자신과 에시카가 대립 중이며, 서로에게 상해를 입히려 했다는 것까지 이카르가 눈치챈 걸 테니까.

게다가 이카르가 왜 샤반 남작을 추궁했는지, 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르네브와 에시카.

둘 중 한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이카르가 져야 한다.

평화를 대가로 인질을 내어 준 파라디움과 솔티에서 강하게 항의를 해 올 게 분명할 테니.

그러니 낌새를 눈치챈 이카르가 둘 사이를 중재하려 드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르네브는 들숨을 깊게 들이킨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전후 사정을 이미 파악하신 듯하니, 발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은,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르네브는 분노한 이카르에 의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금식을 해야 한다거나, 외출을 금지당하거나…….

그런 처벌을 받을 거라 예상하며 르네브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

그러나 마주한 이카르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사실을 인정한 게 정답이었을까? 아니면, 폭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가.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키며 처분을 기다렸으나, 이카르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마냥 순수하기만 해서는 황후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겠지.”

***

응접실에 혼자 남은 이카르는 조금 전까지 르네브가 앉아 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카르의 입매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카르는 상대에게 받은 건 꼭 돌려줘야만 하는 성격으로 자랐다. 그것이 달든 쓰든 관계없이.

그런 이카르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 건 단연코 선황제의 몫이 컸다.

이카르는 여타 제국의 황자들처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황제의 아들이라 하면 타고나길 고귀한 신분 덕에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모두의 보살핌을 받았을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바슈케르의 선황제는 남달랐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빌어먹게도 선황제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선황제는 자신의 믿음대로 행했다.

자식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10세 이전에 황궁 밖으로 쫓아낸 것이다. 그것도 맨몸으로.

자력으로 살아남은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카르에겐 드한과 베인이 함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황궁 밖으로 내쳐진 아이의 삶이 어떠했겠는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행히 이카르는 생존 본능이 강했다.

남들보다 몇 배는 튼튼한 육체와 타고난 직관력, 그리고 남다른 통찰력 덕분에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선황제의 비정한 방법은 꽤 효과적이었다.

황자가 아닌, 떠도는 거리의 아이였을 뿐인 이카르에게 위선과 가식을 떨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면 그대로를 드러냈지.

그 덕에 이카르는 사람을 파악하는데 기민해졌고, 처음부터 르네브를 눈여겨봤다.

차분히 상황을 관찰하는 분석력과 때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행동력. 나이에 맞지 않는 배짱과 과감함.

온실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영애가 갖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황후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르네브는 황후에 걸맞았다.

받은 대로 돌려준다.

이러한 르네브의 방식은 이카르와 닮아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의 목숨을 노리면 반드시 상대의 목숨을 앗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가짜 왕녀는 르네브의 알레르기를 이용하려 들었고, 르네브는 같은 방법으로 가짜 왕녀에게 보복했다.

결코,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대갚음해 준 셈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선한 마음씨만 가지곤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르네브가 황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향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따라 세이렌 후작과 소후작이 바슈케르로 왔을 때. 이카르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이렌 후작, 그대에게 바슈케르로 망명을 권하지.’

‘……!’

이카르의 제안에 세이렌 후작은 경악했다.

당황한 세이렌 후작의 눈빛이, 모멸감과 수치심을 지나 분노에 휩싸였을 때쯤 이카르는 말을 덧붙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안위는 보장할 테니.’

그 한마디에 세이렌 후작은 동요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가족을 인질로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그대에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

‘서부를 지키는 황제의 충성스러운 개와 작은 개.’

‘……!’

이카르의 의도적인 도발에 세이렌 후작의 눈에 불길이 일었지만, 이카르는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파라디움에서 세이렌 후작 가를 그렇게 칭한다지?’

세이렌 후작은 그저 꽉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하지만 내 견해는 달라.’

‘그게 무슨……?’

‘그대가 유일하거든. 나와 대적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사실이었다.

이카르는 과거 파라디움 제국부터 먹어 치운 다음 약소한 왕국들을 차례차례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으로 인해 초기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바슈케르 동부와 파라디움 서부의 영지는 맞닿아 있었고, 그런 이유로 예전부터 영토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파라디움 서부는 세이렌 후작 령에 속해 있었고, 세이렌 후작은 이카르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파라디움 제국 안에서도 손꼽히는 검 실력에 군 통솔력 및 전술 또한 뛰어났으니.

게다가 세이렌 후작만 없애면 될 거란 예상과 달리 아들인 소후작 또한 능력이 출중했다.

서부를 놔두고 파라디움의 북부, 내지는 남부로 진입하려면 상당 기간 시일이 걸렸고, 이 때문에 이카르는 조금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이카르의 귀로 들어온 소문은 유용했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절대 배신하지 않을 황제의 충성스러운 개들.’

파라디움의 황제는 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모실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파라디움의 황제는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세이렌 후작 가의 위세를 두려워했겠지.’

그래서 세이렌 후작 가를 두고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나돌아도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그대의 주군은 그대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네. 하지만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러니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출 것이다. 그대의 가족에게도.’

‘그, 말씀은……! 제게 조국을 배반하고, 변절자가 되라는 뜻입니까?’

세이렌 후작은 올라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힘겹게 말했다.

‘기간은 3년. 그때까지 시간을 드릴 테니, 부디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시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카르는 세이렌 후작의 성정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황제와 파라디움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세이렌 후작이 쉽게 바슈케르로 망명하지 않으리란 걸.

그래서 르네브가 바슈케르에 있는 동안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제 가족들에게 바슈케르로의 망명을 부추기도록.

그게 계획이었는데.

예상외의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르네브 세이렌,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어 줘야겠어.”

***

귀빈실로 걸음을 옮기며 르네브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황궁 안의 누구도 몰랐던 사실을 이카르는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빠른 일 처리 속도가 신기하면서도 낯설었다.

에시카가 여자 주인공 버프를 받아 운이 몹시 좋았다면, 루시우스 또한 남자 주인공인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적어도 황제로선 큰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청렴한 편에 속했고, 도덕관념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에시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시카에게 푹 빠진 뒤로는 머저리같이 굴긴 했지만.’

황제로서 제국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에시카를 최우선 했으니 말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란 그렇게 무서웠다.

똑똑하던 사람이 에시카밖에 모르는 반푼이가 되어 버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회귀 전의 루시우스는 상식선에서 한참 벗어나는 에시카의 행동도 전부 눈감아 주었다.

물론 르네브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콩깍지가 단단히 껴있는 동안 르네브는 루시우스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에시카가 너무 조용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르네브는 창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산맥은 어느덧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황궁 안은 곧 있을 이카르의 탄신일을 맞아 한껏 멋을 냈다.

앰버가 어깨를 움츠리며 환기를 위해 잠깐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창에 태피스트리를 덧대 창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았다.

키어넨이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제법 따뜻하네요.”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장작을 멍하니 바라보다 르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네요. 더 추워지기 전에 번화가에 나갔다 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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