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칭찬에 약한 이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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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칭찬에 약한 이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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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칭찬에 약한 이카르
2023.05.23.
동시에 르네브는 이카르의 정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했다.
“출발하지.”
이내 마차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순간 아차 싶었다.
‘잠깐? 지금 나는 이카르의 생일 선물을 사러 나가는 길인데.’
선물을 받을 당사자가 동행하다니?
‘아니지, 어쩌면 더 잘된 걸지도.’
함께 간 김에 이카르가 원하는 선물을 고르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이카르와 함께 번화가에 나온 르네브는 이전에 벨케인 소공작과 들렀던 상점부터 찾았다.
가게 안에 들어선 르네브는 빠르게 안을 둘러봤다. 다행히 안달루사이트를 세공한 토끼 장식품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건 뭐지? 장식품인가?”
이카르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성격 같았다. 그래서 그저 예쁘기만 한 장식품 같은 건 쓸모없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귀엽군. 아이 침실에 장식해 두면 좋을 것 같아.”
아이 침실?
토끼 장식품은 회귀 전 일과를 마치고 잠든 카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침실을 나설 때마다 르네브의 눈에 밟히던 것이었다.
마치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도 한 것 같은 말에 르네브는 의아한 눈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왜. 좀 이상한가? 아이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뇨.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저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말, 기억해 두지.”
이카르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붉은색이 주는 따뜻한 이미지와 달리 이카르의 눈은 차갑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붉은 눈에 온기가 스민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르네브는 상점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금 전부터 가까이 오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이기만 했다.
‘지난번 벨케인 소공작과 방문했을 때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더니.’
오늘은 왜인지 뚝딱거렸다.
르네브의 시선을 느꼈는지 상점 주인이 다가왔다.
“호, 혹시 상품에 대한 정보가 피, 필요하시다면…….”
이카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자 상점 주인이 격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코, 콘파에누 지역에 매, 매몰된 광석인 안달루사이트로 마, 만든 것으로 치, 침실에 놓으면 좋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카르는 시간 낭비를 싫어했다.
하지만 길어지는 상점 주인의 설명이 전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이카르가 일을 열었다.
“구입하지.”
“예, 예! 바로 가져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기사님. 더, 더 필요하신 것은 어, 없으신지요……?”
르네브는 그제야 상점 주인이 왜 저렇게 허둥대는지 이해했다.
‘이카르를 기사라고 생각했구나.’
평민들에게 기사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큰 키와 근육질 몸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갑옷까지 챙겨 입으면 그야말로 거대하니까.
거기다 기사 중엔 다혈질에 과격한 성격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평민들은 우연히 기사와 마주치거든 행여나 시비라도 붙을까 상당히 조심하곤 했다.
‘무섭겠지. 그래. 무서울 거야.’
르네브는 상점 주인에게 깊이 공감했다. 르네브도 이카르가 두려웠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
게다가 이카르는 기사들 틈에 섞여 있더라도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 만큼이나 존재감이 컸고, 웃지 않으면 서늘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영애, 왜 날 그렇게 쳐다보지?”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속으로 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 봐야 하등 좋을 게 없었기에,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여상히 거짓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무척 잘생기셔서요.”
우쭐대거나, 당연한 말을 한다며 되받아칠 줄 알았다.
“그만, 가지.”
예상과 달리 이카르가 서둘러 가게를 나가 버렸다.
“……?”
이카르의 귀 끝이 살짝 붉었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흔치 않은 상황에 르네브는 재빨리 이카르의 뒤로 따라붙었다.
부끄러워하는 이카르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앞서 걷던 이카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곤 말했다.
“앞으로 이 가게에선 대금을 따로 지불할 필요 없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두지.”
‘오.’
르네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별것 아닌 칭찬 한 번 한 것 치고는 보상이 굉장했다.
‘더한 칭찬을 하면 어떻게 되려나. 가게를 통째로 사 주는 건 아니겠지?’
르네브는 제가 한 생각이 우스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번화가에 나오자마자 방문한 걸 보면 가게의 물품들이 영애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군.”
웃음의 이유를 이카르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으나, 르네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꽤 마음에 들어요.”
생긋 웃는 르네브의 얼굴을 이카르가 빤히 쳐다봤다.
“더 살 건 없나? 목걸이라거나 귀걸이, 반지도 괜찮겠군. 아니면 귀여운 장식품을 좀 더…….”
말 한마디면 가게 물품을 전부 사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르네브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전부 샀어요. 다른 가게로 이동해요.”
***
오늘 외출의 목적이었던 이카르의 생일 선물과 벨케인 소공작에게 줄 답례품까지 구입하고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볼 일은 그것으로 끝인가?”
“네.”
“그럼 내 일정에 어울려 줬으면 좋겠는데.”
“물론이죠.”
이카르도 일이 있어 황궁 밖으로 나온 것일 터였다. 르네브는 군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번화가를 벗어나 마차가 얼마쯤 더 달렸을 때였다.
탁 트인 호수가 나왔다.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은 호수였다.
살얼음 낀 호수는 태양 빛을 머금고 은쟁반처럼 반짝였고, 코끝에 감기는 피톤치드는 가슴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마차 창 너머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계속 이어졌다.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와……!”
“마음에 드나?”
“네, 정말 아름다워요.”
“휴식을 취하러 종종 오는 곳이야.”
이카르가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르네브는 창 너머로 시선을 둔 채로 생각했다.
‘일 중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도 쉴 때가 있구나.’
회귀 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 르네브는 이카르의 심정을 조금쯤 이해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리던 마차가 멈췄을 때였다.
“여긴 번화가보다 더 추울 거야. 이걸 걸치도록.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에 털 코트를 둘러 줬다.
르네브는 털 코트의 표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감겨 오는 감촉이 보드랍고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먼저 마차에서 내린 이카르가 르네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손바닥 위로 살포시 손을 얹었다.
이카르의 커다란 손과 대비되어 그런지 제 손이 무척 작아 보였다.
“……!”
그때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을 잡고 살짝 아래로 끌어당겼다. 강한 악력에 르네브는 마차 아래로 쑥 끌려 내려갔다.
그녀는 거의 안기다시피 그의 품에 안착하게 되었다.
“아직 한참 멀었군.”
“멀었다니,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웨버링 백작이 식사량을 늘리라고 권했다던데, 주치의의 말을 듣지 않았나 보군.”
“요즘은 전보다 많이 먹고 있어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카르가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폐하. 이제 그만 내려 주세요.”
르네브를 사뿐히 바닥에 내려 준 뒤 이카르는 마부석 쪽을 향해 말했다.
“벤.”
“예, 폐하. 준비하겠습니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벤이 마차 뒤편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가만히 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를 잡고는 몸을 휙 돌렸다. 르네브의 시야에 다시금 호숫가 경치가 들어왔다.
“폐하, 왜 그러세요?”
르네브는 제 뒤에 벽처럼 선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아름다운 풍경을 코앞에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카르야말로 조금 전부터 풍경 대신 르네브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인지 그 시선이 뜨거워서 괜히 명치가 간질거렸다.
“……그렇긴 하네요.”
르네브는 황급히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항상 조금 독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오늘의 이카르는 정말로 이상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곳은 물가라 그런지 확실히 번화가보다는 기온이 낮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카르가 막아 주고 있어서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폐하,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금빛 깔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피크닉 바구니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폐하, 이게 다 뭐예요?”
“가끔은 황제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거든.”
태연하게 금빛 깔개 위에 털썩 앉은 이카르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옆에 앉으라는 건가?’
르네브는 이카르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르네브를 힐끔 보던 이카르가 입을 열었다.
“들지.”
르네브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이카르와 피크닉을 즐겼다.
포동포동 살찌워서 잡아먹기라도 할 작정인지, 이카르는 르네브의 입에 음식을 하나라도 더 집어넣으려 안달이었다.
“폐하. 이제 더는 못 먹겠어요.”
르네브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먹는 양이 늘기는 무슨.”
쯧, 혀를 찬 이카르는 들고 있던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잘 먹는 이카르를 힐끔 보고 호숫가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그가 손수 컵을 르네브 손에 들려 주며 말했다.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마셔도 돼.”
르네브는 뭐라고 한마디 되받아치려다 그만두고 컵에 든 액체를 마셨다.
곧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폐하, 이게 뭐죠?”
“과일을 갈아 만든 넥타라고 하더군. 입에 맞나?”
“네, 새콤달콤하고 맛있어요.”
잃었던 식욕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맛이었다.
“그래?”
“네.”
“그럼 조금만 더 먹지?”
그런 르네브의 심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이카르가 작은 쿠키 쪽을 곁눈질했다.
르네브는 사양하지 않고, 작은 쿠키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옆에서 풋, 하고 작게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르네브는 개의치 않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하늘이 맑았다.
태평하게 앉아 있자니 참으로 평화로웠다. 머지않아 전쟁이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그때 작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린아이 둘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날이 좋아 아이들도 호숫가에 놀러 나온 모양이네.’
흐뭇한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자연스럽게 카엘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카엘과는 피크닉 한 번 나와 본 적이 없구나…….’
르네브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쿵!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아이가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넘어졌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수로 넘어졌다기보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밀어 넘어뜨린 것 같았다.
“싸움이라도 난 걸까요?”
“관여할 생각 마. 사이좋게 놀다가도 금세 싸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게 아이들의 생리니까.”
이카르의 무심한 말에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안 되겠다 싶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