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역공 (46/148)


#46화 역공
2023.05.16.


이카르의 질문에 드한이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서류상에는 남동부의 상단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처음 이카르는 샤반 남작이 르네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딘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조사해 볼까요?”

“그렇게 해.”

“폐하. 샤반 남작에게 관심을 두시는 이유가 뭔가요? 수상쩍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베인이 흉흉한 눈을 하고 말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달려 나갈 기세였다.

예전과 달리 바슈케르도 여타 다른 제국들처럼 부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족들은 탈세 및 여러 방법을 동원해 황제 몰래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는 추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축적한 재산으로 사병을 늘리다 보면 언젠가는 황가에 반기를 들 수도 있으니.

“일단 먼저 알아보는 게 좋겠군. 따로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니.”

표면적으로 르네브에게 선물을 보낸 사람은 샤반 남작이다.

귀족 작위 매매 사실이 드러나면, 귀족 작위를 판 사람과 사들인 사람 모두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귀족 작위를 판 쪽의 책임이 더 컸다.

해서 샤반 남작의 이름으로 보낸 선물에 문제가 생겼을 시 작위를 사들인 쪽은 꼬리 자르기 식으로 발뺌할 가능성이 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샤반 남작이 죄를 뒤집어쓰게 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폐하께선 누군가 샤반 남작의 이름을 빌려 세이렌 후작 영애께 선물을 보냈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

에시카가 과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는 둘째치고, 굳이 르네브의 흑역사를 들추는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기 위해서겠지.’

원작에서도 르네브의 복숭아 알레르기는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뻔했을 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에시카가 의도적으로 르네브에게 복숭아를 선물한 게 맞는다면.

살해할 목적까지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싸움을 걸어온 게 확실해진 이상 피할 이유도 없었다.

르네브는 귀빈실로 돌아오자마자 작은 양피지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키어넨 몰래 앰버에게 건넸다.

“앰버, 오늘은 조용히 황궁 밖에 다녀오렴.”

“네, 아가씨.”

다음 날 양피지 목록의 물건들을 사 들고 앰버가 돌아왔다.

곧장 장갑을 두 겹으로 낀 르네브는 피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온몸을 천으로 감싸 만발의 준비를 마쳤다.

통풍이 잘되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 둔 다음 그녀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나무 진액을 먹인 나무 붓으로 사파이어 펜던트를 칠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앰버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신 건가요?”

값비싼 사파이어 펜던트에 나무 진액을 펴 바르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응. 전에 없던 취미가 새로 생겼어.”

르네브는 앰버의 질문에 간단히 대꾸하고는 사파이어 위에 꼼꼼히 나무 진액을 덧칠했다.

그런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창가 근처에 사파이어 펜던트를 놓았다.

“앰버. 절대 직접 맨손으로 만지면 안 돼.”

물끄러미 르네브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르네브는 벽난로 앞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읽다 만 책을 집어 들었다.

“저 아가씨, 뭔가 계획하시는 일이 있으시다면 제게 귀띔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앰버의 채근에도 르네브는 차분히 대꾸했다.

“곧 알게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입술을 삐죽이던 앰버가 곧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럼 저는 오후 시찰을 다녀올게요.”

르네브는 조금 힘없어 보이는 앰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바람에 잘 마르고 있는 사파이어 펜던트로 시선을 옮겼다.

곧 고통에 신음하며 괴로워할 에시카의 모습이 그려졌다.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회귀 전 에시카로 인해 자신이 받았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에시카를 통해 사람의 천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회귀 전과 분명 상황이 달라졌다.

루시우스를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데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선물을 보내온 걸 보면.

‘회귀 전처럼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야.’

르네브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때였다. 응접실 안으로 키어넨이 들어왔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요?”

“레이디께서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어요.”

키어넨이 르네브에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키어넨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앰버처럼 뜻 모를 심부름을 시키는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

그날 저녁.

르네브는 적당히 마른 사파이어 펜던트를 고급 상자에 넣고, 보기 좋게 포장했다.

그리고 앰버에게 건네며 말했다.

“받는 이는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보내는 사람은 샤반 남작이야.”

군말 없이 르네브가 건넨 편지와 상자를 받아 들던 앰버가 돌연 눈을 번쩍 뜨고 르네브를 쳐다봤다.

“……!”

그제야 르네브의 뜻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녀올게요. 아가씨!”

물건들을 품에 안은 앰버가 눈을 빛내며 응접실을 나갔다.

***

에시카는 순백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제 모습을 점검하는데 하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왕녀님. 오늘도 정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세요!”

에시카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거울 속의 아름다운 여자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솜사탕처럼 풍성하면서도 결 좋게 구불거리는 분홍 머리카락.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고 맑은 푸른 눈동자.

물광이 도는 흰 피부는 탱탱하고 보드라웠다.

거울 속 여자는 아무것도 칠하지 않는 흰 도화지처럼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와! 흰 드레스를 입으시니 정말 강림한 천사 같으세요.”

그때 장신구를 챙기러 갔던 하녀가 트왈렛 룸으로 들어왔다.

연신 감탄하는 하녀에게 에시카는 싱긋 웃어 주면서 물었다.

“지금 입은 드레스와 어울릴 장신구를 보여 주겠니?”

“네!”

밝게 대답한 하녀는 흰 장갑을 낀 다음 가져온 장신구들을 쭉 늘어놓았다.

“이건 못 보던 거네.”

고가의 장신구 중에서 에시카의 시선을 붙잡은 건 투명한 푸른 보석이 박힌 펜던트였다.

“왕녀님의 아름다움과 고귀한 성품에 반한 신사분께서 편지와 함께 이 선물을 보내셨더라고요.”

하녀는 제가 다 자랑스럽다는 듯 떠들었다.

그 외에도 흠모의 마음을 드러낸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오는 바슈케르 귀족은 많았다.

“오늘은 이걸로 할게.”

에시카는 손끝으로 푸른 보석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럼 목걸이 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걸로.”

에시카가 턱 끝으로 목걸이 줄을 가리켰다.

하녀가 목걸이 줄에 펜던트를 조심조심 꿰어 넣은 다음 에시카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대로 트왈렛 룸을 나서려던 에시카는 마음을 바꿨다.

솔티로 왕가의 가보에 대한 문의를 보내 두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혹시나 르네브처럼 왕가의 가보 같은 소리를 하는 귀족이 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거랑, ……저것도.”

에시카는 반지와 팔에 걸 장신구를 가리켰다.

“네. 왕녀님.”

오늘 갈 무도회의 초대장을 한 번 더 확인한 에시카는 마차에 올랐다.

황궁을 빠져나간 마차는 한참을 달려 대저택 앞에서 멈췄다.

에시카는 이전에도 잘츠 후작 저에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선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저택 크기에 매번 압도당했다.

마차 창 너머로 조경사의 정성과 시간을 갈아 넣었을 것이 분명한 정원을 눈으로 좇던 예시카는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그런데 긁기 전보다 목이 더 화끈거렸다.

“……?”

에시카는 손거울을 들어 목 부분을 확인했다. 긁었던 부분이 금세 붉어져 있었다.

‘……건조해서 그런가?’

확실히 솔티보다 바슈케르의 기후가 건조하긴 했다.

여주인공 버프를 잔뜩 받은 덕에 최근까지도 에시카의 피부는 물로 잘 씻기만 해도 반질반질 윤이 났었는데.

‘보습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나.’

오늘 입은 드레스는 목과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흰 피부 위로 눈에 띄게 붉어진 피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걸 어쩌지.’

입술을 잠깐 삐죽인 에시카는 목덜미에 분을 톡톡 두드렸다.

현대의 컨실러처럼 완전히 가려지진 않았지만, 거울을 보니 분칠하길 잘한 것 같았다.

‘뭐 곧 가라앉겠지.’

에시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마차가 저택 입구에서 멈췄다.

“안으로 드시죠. 왕녀님.”

에시카는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솔티의 왕녀님 입장하십니다.”

입구에 선 시종이 외치자, 먼저 와 있던 귀족들이 에시카를 보고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최근 몇 달 사이 완전히 귀족 사회에 녹아든 에시카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연회를 즐겼다.

저택의 주인인 잘츠 후작과 첫 춤을 추고 나자, 영식들의 춤 신청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에시카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어디를 가나 관심과 시선을 모은다는 건 에시카를 퍽 만족스럽게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조금 전부터 계속 에시카의 신경을 잡아채는 것이 있었다.

‘왜 이렇게 가려운 거지?’

처음에는 목덜미만 가려웠다.

그러나 점점 쇄골 및 턱, 뺨까지 가렵기 시작했다.

에시카는 최대한 몸을 긁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러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제게도 왕녀님과 춤을 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훈훈한 외모의 영식이 에시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에시카는 애먼 드레스 자락만 꽉 쥔 채 싱긋 웃었다.

“권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네요.”

“그럼 아쉽지만…….”

영식이 에시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물러났다.

에시카는 미안해하며 영식에게 해사하게 웃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몸을 벅벅 긁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그런 경박한 짓은 할 수 없었다.

내딛는 걸음에 자꾸만 속도가 붙어 걸음 속도가 빨라지지 않게 주의했다.

귀족은 절대 달리지 않는 법이니까.

달리거나 빨리 걷는 건 평민들이나 할 만한 행동이었다.

에시카는 여유로운 척하며 온전히 혼자가 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잠깐 파우더 룸이 있는 방향을 힐끗 바라본 에시카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먼저 온 귀부인들이 있을 거야.’

에시카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깊숙이 들어가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걸으며 참지 못하고 목덜미를 살살 긁던 에시카는 복도 끝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선객은 없는 듯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안에 누구 있나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일 층에서 올라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만 들려올 뿐이었다.

치밀하게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한 에시카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간지러웠던 부분을 벅벅 긁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처음에는 이런 쾌감이 있나 싶을 정도로 짜릿하고 시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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