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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전염성 질병? (47/148)


#47화 전염성 질병?
2023.05.17.


진정이 되기는커녕 점점 간지러운 감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긁으면 긁을수록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은데…….’

그걸 빤히 아는 데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큼 너무 가려웠다.

한참이나 몸을 긁는 일에 열중하던 에시카는 벽면에 세워진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경악했다.

“……!”

넓게 파인 순백의 드레스 위로 드러난 살갗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살가죽이 찢긴 나머지 피가 맺힌 부분도 군데군데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에시카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에시카는 몸을 긁지 않기 위해 두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지독한 가려움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얼음! 그래. 얼음같이 차가운 걸로 피부를 식히면 가려운 감각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그럴싸한 생각 같았다.

때마침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에시카는 문을 빼꼼 열고 말했다.

“거기 누구 있나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다행히 문 너머의 사람은 잘츠 후작 가의 고용인인 듯했다.

“얼음이나 차가운 물수건같이 피부를 식힐 만한 게 필요한데 가져다줄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답과 함께 발소리가 멀어졌다. 에시카는 다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 꼴로 일 층에 내려갔다가는…….’

에시카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피부를 긁지 않으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찾으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에시카는 문만 빼꼼 열어 물수건을 챙긴 다음 말했다.

“스카프도 하나 필요한데 그것도 가져다줄 수 있어요?”

“…….”

에시카의 요구에 조금 난감한 듯 고용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충분히 사례하죠.”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을 닫자마자 에시카는 차가운 물수건으로 몸의 열을 식혔다.

조금 거친 면의 감촉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몸을 긁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래도 열감을 식히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똑똑.

“스카프를 가져왔습니다.”

에시카는 그의 손에서 스카프만 쏙 빼내고 문을 닫으려다 드레스에 달려 있던 자그마한 보석 하나를 떼어 냈다.

“당신의 친절 덕분에 충분한 도움을 받았어요.”

에시카는 그의 손에 자그마한 보석을 들려 주었다.

싸구려 스카프의 대금치고는 거액의 보상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고용인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치가 있다면 입막음의 뜻도 있다는 걸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에시카는 최대한 멋스럽게 스카프를 둘러 붉어진 피부를 감추고 방을 빠져나왔다.

막 일 층으로 내려가는데 에시카를 발견한 귀부인이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

“어라? 아까는 스카프를 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하아…….”

눈치 빠른 귀부인의 말에 에시카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와인을 나르던 고용인이 실수로 제 드레스에 과일 주를 흘렸지 뭔가요.”

에시카는 속상해하면서도 이미 벌어진 일을 어째겠냐는 투로 말했다.

“어머, 저런! 자신들의 일 년 봉급을 모아도 살 수 없는 드레스인 걸 알면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귀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고용인들의 부주의한 실수는 종종 있는 일이니 잘츠 후작께서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두셨을 거예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귀부인. 그렇지만 오늘은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려고요. 기분이, 조금 그렇네요.”

에시카는 부러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처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귀부인이 제가 다 분하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아휴, 참……. 왕녀님께 실수한 고용인이 누군지 말씀해 주시면 잘츠 후작님께 제게 언질을 드릴게요. 그럼 그 하녀는 금방 해고될 거예요.”

에시카는 홀 안을 한번 둘러봤다.

가까운 거리를 지나는 고용인의 소맷자락이 눈에 익었다.

조금 전 에시카에게 물수건과 스카프를 가져다준 사람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에시카는 조용히 손끝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

르네브에게 두 번째로 호흡 곤란이 찾아온 이후 멜리타는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늘은 멜리타가 르네브에게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번처럼 멜리타는 거리낌 없이 키어넨에게 차와 디저트 심부름을 시켰다.

응접실에 르네브와 단둘이 되기 무섭게 멜리타는 커다란 가방에서 꺼낸 진료 도구들을 테이블 위로 나열했다.

“그 외에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나무 판에 덧댄 양피지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멜리타가 물었고,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어요. 멜리타 양의 권유대로 식사량을 조금씩 늘리고 있는데, 요즘 체력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요. 멜리타 양 덕분이에요.”

멜리타는 순간 멈칫했다.

양피지 위를 빠르게 서걱거리던 깃펜 소리 또한 멎었다.

네 덕분이라는 말은 귀족 사회에서 흔히 하는 공치사였지만, 바로 직전 그녀가 진료를 본 사람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던 황제여서 그런지 듣기 나쁘지 않았다.

“좋은 일이네요. 지난번에 뵀을 때보다 혈색도 더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멜리타는 똑 부러지는 수도 귀족 특유의 딕션이 살짝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살짝 낮은 목소리와 말의 속도가 조금 느려서 그럴까?

세이렌 후작 영애의 목소리에서는 묘하게 신뢰가 가는 힘이 느껴졌다.

“영애께서는 최근 진료를 본 어떤 분과 다르시네요. 저를 신뢰해 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요.”

멜리타가 말하는 어떤 분이 누구인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멜리타는 황제의 주치의였으니까.

르네브는 살포시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서 멜리타 양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말도 마세요! 폐하께선 저를 돌팔이 취급하신다니까요.”

멜리타가 돌연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음울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폐하께선 멜리타 양을 신뢰하시기 때문에 주치의로 발탁하셨을 거예요.”

“…….”

“황제의 주치의란 보통 제국 안에서도 제일 경험이 많고, 의술이 뛰어난 사람이 맡기 마련이니까요.”

이카르가 멜리타를 주치의로 선택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르네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었지만, 기분이 좋아진 듯 멜리타의 입꼬리 끝이 살짝 씰룩였다.

“확실히 영애께선 사람 보는 눈이 매우 뛰어나신 것 같아요.”

멜리타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레이디, 실례합니다.”

키어넨이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오자, 금세 응접실 안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와 향긋한 꽃향기로 가득 찼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멜리타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키어넨이 수줍게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뭘요. 저희 레이디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멜리타가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설탕으로 반짝이는 구겔호프를 가리켰다.

“영애. 이건 저번에 드셔 보셨죠?”

“네. 정말 맛있던데요.”

“저도 한번 먹은 뒤로 이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폐하께서 저를 다시 찾아 주시기를 기다렸는데…….”

“…….”

“아! 물론 폐하께서 병환을 얻으시길 바란 건 절대 아니에요.”

멜리타가 손사래까지 쳐가며 강하게 부정했다.

‘이게 멜리타의 속마음이 아닐까?’

르네브는 그런 생각을 하며 홍차를 머금었다.

“……!”

구겔호프를 크게 한입 떠서 입에 넣은 멜리타의 얼굴에 행복이 감돌았다.

황제의 전속 요리장의 디저트를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멜리타는 황제의 주치의라는 제 신분을 내세워 특권을 즐길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영애도 얼른 드셔 보세요.”

“네.”

그렇게 사이좋게 한 입 두 입 떠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는 바닥이 드러났다.

“아, 참! 요즘 전염성 질병이 도는 모양이던데, 영애께서도 조심하세요.”

“전염성 질병이요?”

“사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한데 말이죠…….”

멜리타는 누가 들을세라 조심스러운 듯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르네브의 귀가에 속삭였다.

“…….”

멜리타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래. 밖에서 나를 두고 뭐라고들 떠드니?”

에시카는 무심코 목덜미로 향하려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예? 그, 그것이…….”

하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으니까, 전해 들은 그대로 말해 보렴.”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은 에시카는 억지 미소로 하녀를 타일렀다.

“왕녀님께서 전염성 질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뭐!”

결국, 에시카는 하녀의 말허리를 자르고 큰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왕녀님…….”

하녀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전염성 질병?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잘츠 후작 저에서 무도회가 있던 그날.

황궁으로 돌아온 에시카는 즉시 의사를 불러들였다. 가능한 한 유능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자로.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진료비도 후하게 쳐 주었다.

그러나 알음알음 자신의 증상에 대한 소문이 퍼진 걸 보면, 그자가 입을 연 게 분명했다.

심지어 부풀린 채로 말이다.

에시카는 너무나 억울했다.

소문처럼 자신이 정말 전염성 질병에 걸렸다면, 측근 하녀들부터 그 병에 옮았어야 했다.

하지만 에시카의 시중을 드는 하녀 중 자신과 같은 증상을 겪는 하녀는 없었다.

“사실무근의 헛소리를 퍼뜨리다니.”

에시카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소문을 퍼뜨린 자를 처리하는 일보다 소문을 잠재우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려면 귀족들 앞에 나서서 멀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에시카는 몸을 벅벅 긁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하는 에시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녀님. 어, 얼음을 준비해 올까요?”

에시카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하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가져오지 않고 뭐 하고 서 있니?”

에시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왕녀님.”

하녀가 허둥지둥 침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에시카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거울에 닿았다.

“……!”

잔뜩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고운 얼굴은 흡사 마귀할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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