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솔티 왕가의 가보 (45/148)


#45화 솔티 왕가의 가보
2023.05.15.


르네브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에시카였다.

“과거에 벌인 일에 대해 발뺌할 생각인가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살인 미수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겠죠. 게다가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도 거치지 않고, 함부로 입에 올리기엔 다소 위험한 주제 같군요.”

르네브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에시카가 피식 웃으며 되받아쳤다.

“글쎄요. 영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겠죠. 게다가 어떤 나라에선 살인 미수를 살인과 동일시하더군요.”

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서 왕녀님이 지금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가 뭔지 명확히 밝혀 주시겠어요?”

“의도요?”

“네, 의도요. 파라디움 제국을 향한 솔티의 적의가 느껴져서 말이죠.”

르네브는 부러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했다.

그러자 그것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인지 에시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조금 전 발언은 솔티와 관계없어요. 괜한 억측은 삼가세요. 세이렌 후작 영애.”

에시카가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팔을 끌어안는 에시카의 태도에서 르네브는 방어적인 심리를 읽었다.

빤히 쳐다보는 르네브의 시선을 느낀 듯 에시카가 끌어안은 팔을 풀고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동시에 르네브의 시선이 에시카의 귓가로 향했다.

‘귀걸이가…… 없어?’

르네브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듯 에시카가 서둘러 깍지를 껴 빈손을 감췄다.

“솔티 왕가의 가보를, 착용하지 않으셨네요?”

르네브는 회귀 전 진짜 아드리아 왕녀와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만난 건 단 한 번뿐이었고,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기에 기억이 흐릿했다.

그런데 방금 에시카와 대화 중에 불현듯 그녀와의 대화 일부분이 떠올랐다.

‘성년식 때 어머니께 받은 귀걸이에요. 솔티에선 성년식 때 선대부터 착용해 온 장신구를 물려주는 관습이 있죠.’

아드리아 왕녀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조금 구식이었지만, 클래식한 멋이 있었다.

그 때문에 르네브의 시선을 붙잡은 계기가 되었고.

르네브도 나중에 딸을 낳으면 제가 아끼던 장신구를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카엘을 낳은 후엔 아이를 낳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룰 수 없는 소망으로 남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씁쓸한 얼굴이 되었던 르네브는 금세 표정을 지웠다.

“손을 씻을 때 잠깐 빼 두었나 보네요.”

“팔에 차는 장신구를 굳이 빼 둘 필요가 있나요?”

르네브의 물음에 에시카의 푸른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에시카가 곧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최근 살이 조금 빠져서 그런가 헐거워졌지 뭐예요. 그리고 영애께서 착각하신 모양인데, 왕가의 가보는 반지랍니다.”

말투는 여유로웠으나, 에시카는 은근슬쩍 뒷짐을 지며 제 팔에 닿는 르네브의 시야를 차단하려 들었다.

방어 기제에서 나온 무의식적 반응 같았다.

“그런가요. 제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했으나, 르네브의 확신은 굳어졌다.

조금 전 르네브는 일부러 유도 신문을 던졌고, 에시카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왕가의 가보를 팔에 차는 장신구가 아닌 반지라고 말을 정정함으로써.

‘회귀 전 아드리아 왕녀가 왕비에게 물려받은 왕가의 가보는 귀걸이였는데.’

하지만 그 사실을 에시카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에시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멀어지는 르네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미간을 모았다.

‘뭔가 이상한데?’

얼마 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에시카의 흥미를 자극했다
.
르네브가 얼음 연못에 트레이더 백작 영애를 빠뜨렸던 일.

원작에서처럼 그날 이후로 르네브에겐 악녀라는 소문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뭘 모르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며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볼 때마다 르네브는 발작하듯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르네브가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있었으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벌인 일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며 기가 차 했지.

에시카는 그 일을 들먹이면 분노를 주체 못 한 르네브가 자신에게 손찌검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면 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르네브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 된다.

여론은 가련한 피해자가 된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두둔할 터.

여기까지가 에시카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애써 르네브를 찾아가 접근한 거였는데.

하지만 방금 르네브가 뜻밖의 행동을 보임으로써 그 계획을 틀어 버렸다.

한껏 고운 미간을 모은 채로 에시카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솔티 왕가의 가보 따윈 들어 본 적 없다고.’

에시카는 르네브의 시선이 머물던 순서를 떠올리려 조금 전 기억을 복기했다.

처음에는 분명 손을 봤다. 그다음엔 팔이었고.

‘맞아. 그건 틀림없어.’

이전에도 르네브가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하녀 일로 인해 거칠어진 손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손이 거칠다고 지적해 온다면, 그에 따른 변명도 생각해 둔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냥과 자수는 실제 아드리아 왕녀의 취미 중 하나였으니까.

‘팔에 차는 장신구’라는 말로 자신을 속이려 들었지만, 다행히 덫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잘 대처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초조함에 손톱을 잘근거리던 에시카는 번뜩 든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어쩌면 왕가의 가보 따윈 원래부터 없었던 거 아냐……?’

만약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솔티의 왕은 에시카가 바슈케르로 떠날 때 시녀를 붙이려 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그러나 왕녀 이외의 솔티인은 바슈케르 입국을 허락지 않겠다는 이카르의 지시로 에시카는 혼자 바슈케르에 올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시녀들은 솔티 왕의 사람이었으니, 에시카의 일거수일투족을 솔티 왕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의 행동에도 자연히 제약이 걸릴 테고.

‘일단은 솔티로 몰래 편지를 보내 사실 확인을 해 두는 게 좋겠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어지러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가짜 왕녀라는 걸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특히 르네브에게만은 절대로!

‘하필, 원작 이전의 상황에 뚝 떨어질 게 뭐야. 원작 전개에 빙의했더라면 르네브 따위는 금방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에시카는 신경질적으로 구두코에 걸리적거리는 돌을 걷어찼다.

날아간 돌이 정면의 나무에 흠집을 내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곁에서 에시카의 눈치를 살피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왕녀님, 해가 지면서 날이 쌀쌀해지고 있는데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사실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기에 조금 추웠다. 에시카는 마지못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브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본전도 못 챙긴 채 귀빈실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곧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고귀한 신분 하나 믿고 언제까지 까부는지 두고 보자.’

복숭아를 먹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숨도 제대로 못 쉴 르네브의 모습을 상상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

귀빈실 앞에는 에시카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

“왕녀님과 긴밀히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을 듯하여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평소와 달리 용건부터 꺼냈다.

“폐하께서 샤반 남작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신 모양이에요.”

샤반 남작이면…….

“파라디움의 귀빈에게 물건을 보낼 인물로 선정되었던 사람인가요?”

에시카의 미간이 구겨졌다.

일 처리를 대체 어떻게 하냐는 듯한 짜증 어린 표정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빠르게 덧붙였다.

“왕녀님께서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뒤늦게 샤반 남작을 조사하더라도 증거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에시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샤반 남작이 직접 황궁에 와서 파라디움의 귀빈에게 물건을 전달한 건 아니었죠.”

“그럼 중간에 물건이 바꿔치기 됐다는 변명도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그제야 에시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맞아요. 게다가 파라디움의 귀빈에게 뻬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샤반 남작이 대체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뻬쉬 알레르기로 고통스러워하던 르네브가 뒤늦게 샤반 남작을 불러들여 고의성을 따져 묻는다고 해도,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물론 샤반 남작에겐 갑작스러운 날벼락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작위를 팔아넘길 때 샤반 남작이 내세운 여러 가지 조건 중 하나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인물이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는 수도 사교계엔 얼씬도 하지 말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작위를 팔아넘겼을 때는 그만한 각오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그럼 이제 남은 건 파라디움의 영애가 뻬쉬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겠군요.”

“분명히 먹을 거예요.”

“왕녀님께서 확신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될까요?”

“제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거든요.”

에시카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작 내용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잠시 입을 떡 벌렸다가 이내 닫았다.

“그러니 믿으셔도 손해는 없으실 거예요.”

***

한편, 이카르는 집무실에서 샤반 남작의 조사 보고를 받고 있었다.

“폐하, 샤반 남작가는 실상 몰락한 것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보고서를 읽어 내리던 드한이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목울대를 긁고는 말을 덧붙였다.

“크흠, 작위도 팔아넘긴 모양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작위 매매가 알음알음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이카르도 모르지 않았으나, 바슈케르 제국법상 명백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유력 귀족이 아닌 이상, 그것도 황궁과 멀리 떨어진 곳의 귀족들을 전부 단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몰락 귀족에게 작위를 사들인다 해도 귀족 명부에는 바로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귀족 작위를 사들인 이들 중 겁이 많은 부류는 그 일대에서만 귀족 노릇을 하며 떵떵거렸고.

겁을 상실한 쪽은 몰락 귀족의 자식으로 입양되어 가문을 승계받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대를 거듭하다 보면 완전한 귀족으로 신분 세탁이 가능했다.

분명 이는 법의 허점이었다.

하지만 이카르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영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파산할 지경에 이른 귀족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명하는 쪽이 제국을 위한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군.”

이카르는 감흥 없는 얼굴로 말했다. 드한의 보고는 이카르가 알던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작위를 사들인 자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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