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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선물로 들어온 과일 (44/148)


#44화 선물로 들어온 과일
2023.05.14.


도서관에 도착한 르네브는 귀족 명부부터 찾았다.

‘샤반 남작, 샤반 남작…… 여깄다.’

그 안에서 갈색 콧수염이 구불구불한 남자의 초상화를 찾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회귀 전은커녕 이번 생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슈케르 남동부 지역 사람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르네브는 도서관을 나섰다.

‘모르고 보낸 거겠지?’

르네브는 바슈케르에서 뻬쉬라고 부르는 과일인 복숭아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족 외엔 앰버와 세이렌 후작가에 두고 온 하녀 웬디 그리고 루시우스 정도였다.

‘설마, 루시우스가?’

잠깐 루시우스를 의심했던 르네브는 곧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이였다면, 르네브를 암살하는 방법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만한 방법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루시우스가 굳이 먼 타국에 있는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며 황궁 안을 걷는데 불현듯 원작 내용 일부가 떠올랐다.

‘에시카를 골탕 먹이려다 르네브가 역관광당하는 에피소드!’

그 에피소드에서 르네브는 에시카의 계획에 넘어가 잘 저며 넣은 복숭아 타르트를 먹는다.

그로 인해 입 주변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것을 시작으로 어지러움과 구토 및 호흡 곤란을 겪는다.

에시카가 그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건 루시우스가 흘린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그대의 입에 잘 맞나 보군.’

‘달고 상큼하고 엄청 맛있어요!’

해맑은 얼굴의 에시카에게 루시우스는 씁쓸히 웃으며 덧붙였다.

‘황후는 복숭아를 입에도 못 대거든.’

‘이 맛있는 걸……. 황후 폐하께선 주어진 것들에 감사할 줄 모르셔서 그런 걸까요?’

생과일이 흔치 않은 바슈케르와 달리 파라디움에서 복숭아는 서민들의 음식에 가까웠고, 에시카는 그 부분을 꼬집었다.

‘그냥…… 몸에 잘 안 받는 모양이더군.’

에시카는 지나가듯 던진 루시우스의 말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써먹은 것이다.

과거 르네브는 회귀 전 원작에서처럼 제 몸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지 확인 작업을 거쳤다.

차후에 있을지 모를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영혼이 바뀌었으니 알레르기도 없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희망을 품고서.

최대한 건강한 상태에서 복숭아를 조금 먹었을 뿐이었지만, 바로 반응이 왔다.

그 뒤 르네브는 복숭아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누군가 왜 먹지 않냐고 물으면 그냥 취향이 아니라며 일축했다.

샤반 남작은 원작을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 르네브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선물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어딘지 찜찜했다.

‘샤반 남작에 대해 알아보는 게 좋겠어.’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음성이 르네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영애.”

이카르가 날렵한 사냥개처럼 빠르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폐하.”

“표정이 너무 비장하군.”

르네브는 제 뺨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샤반 남작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차에 이카르가 등장한 셈이었다.

‘이카르에게 샤반 남작에 관해 물어봐도 괜찮을까?’

잠시 망설이던 르네브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폐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르네브의 제안에 이카르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얼떨떨해하던 그의 입매가 이내 시원하게 올라갔다.

눈매도 예쁘게 휘어졌다.

“다행히 오후 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는군.”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매를 매만졌다.

커다란 손이 입가를 쓸고 내려오자, 자연히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도 사라졌다.

르네브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폐하. 혹시 샤반 남작을 아시나요?”

“샤반 남작?”

이카르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감이 서렸다. 목소리 또한 조금 전보다 확연히 낮아져 있었다.

르네브는 그 변화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샤반 남작에게서 선물이 들어왔거든요.”

르네브와 보폭을 맞춰 걷던 이카르가 돌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을 보고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샤반 남작의 정보를 구할 상대를 잘못 고른 모양이었다.

“그자가 영애에게 선물을 보냈단 말이지……. 그래, 어떤 선물을 보냈지?”

이내 이카르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분명 미소 띤 표정이었으나, 눈빛이 상당히 흉흉했다.

이로써 이카르와 샤반 남작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명확해졌다.

‘드한 경이나 베인 경에게 물어봤어야 했나.’

르네브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과일을 보내왔더라고요.”

“……과일?”

이카르가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르네브를 쳐다봤다.

샤반 남작의 이름이 나오자 불쾌해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네.”

“그 외의 것은 없었나?”

“그 외의 것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고가의 보석이나 드레스, 예술품 같은 것 말이야. 하다못해 편지나 초대장은 보냈겠지.”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과일 외에는 딱히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별 볼 일 없는 남자군.”

이카르가 코웃음 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르네브는 빠르게 변하는 이카르의 감정 변화를 좀처럼 따라가기 어려웠다.

‘대화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래서 이만 돌아가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이카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과일을 어떻게 했지? 벌써 먹었나?”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왜지? 귀빈실을 담당하는 요리장의 말을 들어 보니 영애는 신선한 과일을 꽤 좋아한다던데.”

르네브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알레르기는 몸이 건강할 때는 잠깐 앓고 지나갈 수 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기도가 부어오르기 시작하면 처치를 하기 전에 호흡 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뻬쉬를 보내온 샤반 남작을 향한 적대감이 솟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보내온 음식을 입에 대기 조금 꺼려지더라고요.”

르네브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를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

그런데 막상 말을 뱉고 보니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슈케르의 귀족들이 귀빈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우호 관계를 쌓기 위함이다.

방금 르네브의 말을 이카르가 왜곡해서 들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령, 바슈케르 귀족의 선물 같은 건 신뢰할 수 없다고 말이다.

르네브는 뱉은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며 이카르의 반응을 살폈다.

“……?”

하지만 무시무시한 표정일 거란 르네브의 예상과 달리 이카르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폐하?”

“영애의 말이 옳아. 모르는 남자가 보낸 선물을 그냥 받아서는 안 되지. 그럼 절대 안 되지.”

이카르가 양옆으로 고개까지 느리게 저어 가며 강조했다.

“아! 그리고 영애가 바슈케르의 실정을 잘 모를 것 같아 한마디 덧붙이자면 샤반 남작가는 몇 년 전 파산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군.”

“네?”

르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카르를 쳐다봤다.

기분이 좋은 듯 눈매를 예쁘게 접은 이카르가 르네브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부유한 남부 상단주에게 가문을 넘겼다고 들었던 것 같군.”

순간 르네브의 표정이 굳어졌다.

파산한 귀족 가에서 굳이 귀한 과일을 르네브에게 선물할 필요가 있을까?

기왕 금화를 사용하려거든 보상이 확실한 쪽에 베팅하는 게 옳다.

앞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타국의 귀빈인 르네브에게 선물할 게 아니라.

르네브의 표정이 굳어지자, 이카르가 물었다.

“왜 그러지. 영애?”

“폐하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카르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폐하께 특정한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고, 그 음식을 누군가가 폐하께 선물했다면요.”

이카르의 한쪽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해할 의도가 상당히 명백해 보이는군.”

“만약에 상대는 폐하께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선물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아.”

약간의 살의마저 느껴지는 그의 기세에 르네브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걸로 상해를 입을 뻔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

***

르네브는 귀빈실로 돌아오자마자 앰버를 통해 레이첼과 벨케인 소공작에게도 과일 선물이 들어왔는지 확인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둘에게는 과일 선물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이 돌아왔다.

또 솔티의 왕녀에게 과일 선물을 한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가 선물했는지도 알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앰버가 고개를 저었고, 르네브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에시카가 원작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면 일련의 일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원작의 르네브도 에시카의 미모를 손상시키려고 선물을 보냈었지.’

에시카가 선물 받은 물건을 사용한 후에 탈이 나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을 사람은 르네브였다.

그 때문에 르네브는 조금 꾀를 냈다.

사교계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가난한 몰락 귀족을 물색한 다음 그 사람의 이름으로 에시카에게 선물을 보내는 식으로.

“…….”

거기까지 생각한 르네브의 미간이 깊어졌다.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

르네브는 드넓은 황궁 정원을 거닐며 생각을 거듭했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살인자…….”

르네브는 멈칫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보니 미소를 머금은 채 에시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르네브는 방금 한 말이 자신을 향한 게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르네브보다 에시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라고 불리셨다죠? 파라디움에선.”

르네브가 살얼음 낀 연못 속으로 트레이더 백작 영애를 떠민 걸 두고 하는 이야기라는 걸 바로 알아들었다.

그날 이후 르네브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더욱 곱지 않아졌다.

그녀가 세이렌 후작의 하나뿐인 딸이었음에도.

물론 르네브도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 사건은 르네브의 소행이 아니었으니까.

공교롭게도 르네브는 그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빙의했다.

그러니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을 르네브가 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르네브의 영혼이 바뀐 것을 몰랐고, 자연히 책임은 르네브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시네요.”

“……?”

“살인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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