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르네브를 제거할 좋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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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르네브를 제거할 좋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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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르네브를 제거할 좋은 방법
2023.05.13.
오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침실.
느지막이 일어난 에시카는 하녀가 차려 준 점심을 먹고,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좀 더 잘까.’
에시카의 시선 끝에 침대와 폭신하고 보드라운 침구가 들어왔다.
티 파티 이후로 에시카는 귀족들의 반응을 살피며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르네브를 두고 이카르와 벨케인 소공작이 벌인 난투극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의 티 파티 장소 바로 옆에서.
그 소동으로 바슈케르 귀족들의 호의를 잃을까 두려웠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도 얼마간은 사교 모임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도 그때 일로 떠드는 멍청이는 없었다.
이제 슬슬 활발하게 사교 활동에 나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약간의 문제라면 너무 빨리 게으른 생활에 적응했다는 것 정도일까?
해가 중천에 뜰 즈음 일어나서 천천히 식사하고 귀빈실 근처를 조금 거닐다 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이런 삶도 괜찮은데.’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에시카는 이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직은 편히 쉴 때가 아니었다.
에시카는 생태계의 룰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먼저 먹지 않으면 먹힌다.
르네브 쪽에서 선제공격해 온 마당에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티 파티 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머리끝까지 열이 몰렸다.
꽉 쥔 두 주먹도 부들부들 떨려 왔다.
미리 눈치채고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아주 큰 망신을 당했겠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에시카는 의자 팔걸이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손톱을 박아 넣었다.
‘어떻게 복수해 주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시카가 고민을 이어 나갈 때였다.
붉은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끌어안은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뭐니?”
“왕녀님 선물로 들어온 과일이에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기왕이면 되팔 수 있는 보석 같은 걸 줄 것이지.’
선물로 과일이라니. 누군지 몰라도 센스가 영 꽝이었다.
‘잠깐, 과일?’
불현듯 장대한 원작 일부분이 에시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에시카는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찾았다. 르네브를 제거할 좋은 방법.’
***
키어넨이 양피지를 내밀었다.
“레이디. 선물로 들어온 목록들을 정리해 봤어요.”
르네브는 키어넨에게 들어온 선물들을 분류하고, 보고하는 일을 맡겨 놓은 참이었다.
선물 목록을 쭉 훑어본 르네브는 양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어넨, 이건 돌려보내는 게 좋겠네요.”
“그레일 백작님께 들어온 선물은 반송하고…….”
키어넨이 그레일 백작의 이름 부분에 따로 표시했다.
그렇게 선물 분류 작업이 끝나자 키어넨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레이디께선 어째서 값진 선물들은 돌려보내고 그렇지 않은 선물들만 받으시는 거예요?”
“고가의 선물을 덥석 받았다간 추후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어떤 문제요?”
키어넨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귀족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금화를 쓰지 않아요.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생각해 고가의 선물을 보냈을 확률이 높아요.”
“네? 선물이 투자라고요?”
키어넨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예전에 파라디움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르네브는 회귀 전 에시카의 일을 살짝 각색해서 설명했다.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 정부가 있었어요. 귀족들은 그녀에게 귀한 선물들을 아낌없이 보냈죠.”
“…….”
“황제의 정부는 고위 귀족들의 관심과 찬사, 그리고 값비싼 선물들에 둘러싸여서 얼마간은 행복했을 거예요.”
“정부라 해도, 황제의 정부이니 정말 귀한 선물들을 받았겠네요.”
그 정부의 심정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키어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죠.”
“왜요?”
“곧 그녀에게 이런저런 청탁들이 쏟아져 들어왔거든요.”
“청탁이라면?”
“무역 독점권부터 시작해서, 땅을 헐값에 사들인 다음 그 지역의 개발을 요구한다든지……. 그 종류 또한 가지각색이었어요.”
“그런가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키어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족들의 청탁은 정부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고, 황제의 허가가 필요했죠.”
“저는 잘 모르지만, 그, 베갯머리송사라는 게 있잖아요.”
“한두 번은 괜찮을지 몰라도 매번 도를 넘는 부탁을 해 오는 정부를 좋아할 황제는 없잖아요?”
키어넨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계속 부탁만 할 수 없게 된 정부는 곤란해졌고, 누군가는 그 뒤처리를 해야 했죠.”
그때를 생각하자 입안이 떫었다.
단순한 호의만으로 큰 금액을 사용할 귀족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에시카는 귀족들이 보낸 거액의 선물들이 온전한 호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황제의 정부가 뇌물을 받았다고 여겼다.
‘정부의 관리 또한 황후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중 하나란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군.’
루시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에시카가 별생각 없이 한 일의 뒤처리는 모두 르네브가 떠맡게 되었다.
분명히 문제의 발단은 에시카였다.
하지만 그녀는 루시우스를 기쁘게 하면 그만일 정부였고, 르네브는 황궁 안의 대소사를 관리해야 하는 황후였다.
이와 같은 일을 경계하기 위해 절대다수의 황제는 정부의 존재를 철저히 감춰 왔다.
감춘다고 완전히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선대 황제들은 감추는 시늉이라도 한 것이다.
“레이디의 나라이니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만, 그건 황제 폐하의 잘못인 것 같은데요.”
키어넨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고, 르네브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백 퍼센트 동의해요.’
루시우스가 알 정도로 사태가 나빠진 후에도 그는 에시카를 나무라지 않았다.
‘폐하. 귀족들의 선물을 덥석덥석 받지 말라고 폐하의 정부에게 주의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참다못한 르네브의 권유에 루시우스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황후. 에시카는 내 아이를 낳아 줄 여자야. 파라디움의 차기 황제를 낳을 사람이라고.’
그러니 아이를 낳지 못한 너는 에시카의 철없는 행동의 뒷바라지나 하라는 소리였다.
르네브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애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다 식어 빠진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레이디. 선물로 과일이 들어왔는데 디저트로 내올까요?”
르네브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 눈치챘는지 키어넨이 분위기를 바꾸려 들었다.
“과일이요?”
“네.”
바슈케르에서 신선한 과일은 고가에 속했다.
하지만 되돌려 보내는 기간 동안 상해 버릴 수 있으니 먹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상큼한 걸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얼른 준비해 올게요.”
키어넨이 떠나고, 르네브는 선물 목록을 한 번 더 훑어봤다.
선물 목록 중에는 파라디움에서 볼 수 없던 물건들도 꽤 있었기에, 키어넨은 눈치 빠르게 그 옆에 부연 설명을 덧붙여 적어 놓고는 했다.
「뻬쉬: 과일」
르네브는 그 외에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기억으로 쓰라린 속을 다스리는데 앰버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다녀왔어요. 아가씨.”
아침부터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느라 힘들었는지 앰버는 조금 지쳐 보였다.
“앰버, 고생했어. 키어넨이 과일을 깎아 온다고 했으니 먹으면서 조금 쉬어.”
르네브의 말에 앰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생과일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때 예쁘게 플레이팅한 과일 접시를 들고 키어넨이 돌아왔다.
“레이디 드셔 보세요. 뻬쉬라는 과일인데, 무척 달고 시원해요.”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키어넨이 말했다.
르네브는 접시 위의 과일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껍질을 깎아 놓은 상태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말랑한 복숭아 같았다.
르네브가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과일을 쳐다보기만 하자, 키어넨이 물었다.
“레이디, 왜 그러세요?”
“이 과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을 해 봐야겠어요.”
르네브가 선물 목록을 적어 놓은 양피지를 훑어봤다.
키어넨이 곁으로 다가와 양피지 위를 가리켰다.
“샤반 남작님께서 보내신 선물이네요.”
“키어넨, 이전에도 뻬쉬를 먹어 본 적 있어요?”
르네브의 물음에 키어넨이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조금 맛만 보는 정도요.”
“방금 깎으면서 조금 드신 거 아니에요?”
앰버가 장난스럽게 물었고, 키어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황제 폐하의 즉위식 후 남은 걸 조금 먹어 본 것뿐이에요. 그리고 조금 전은 정말 맛만 본 거라니까요.”
“아하.”
앰버가 히죽 웃었고, 키어넨의 얼굴이 붉어졌다.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말릴 생각도 못 한 채 르네브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알고 그랬을까?’
샤반 남작.
원작에서도 회귀 전에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바슈케르의 귀족인 그가 ‘그걸’ 알고 있을 리가…….
“레이디, 안 드세요?”
그때 키어넨의 목소리가 르네브의 상념을 끊어 냈다.
“기껏 준비해 줬는데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서.”
키어넨이 내온 과일에 손도 대지 않고, 르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과일을 파라디움에서는 뻬쉬라고 부르나요?”
“네.”
“그렇군요. 이건 앰버와 둘이 나눠 먹는 게 좋겠네요.”
의아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보던 앰버가 슬쩍 뻬쉬 하나를 집어 들더니 입에 쏙 집어넣었다.
뻬쉬를 우물거리던 앰버의 눈이 커졌다.
“어? 아가씨 이거…….”
앰버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앰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나는 잠깐 알아볼 게 있어. 도서관에 다녀올게.”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르네브의 뒤로 키어넨이 따라붙었다.
“그럼 제가 함께 갈게요.”
“혼자 다녀와도 괜찮으니까, 과일 먹어요.”
방을 나선 르네브는 곧장 황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귀족 명부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레이디께서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문밖까지 따라 나와 멀어지는 르네브의 뒷모습을 좇던 키어넨이 앰버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씨는 이 과일에 알레르기가 있어요. 드시면 큰일 나요.”
“……네?”
“파라디움과 명칭도 다르고 깎아진 모양만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먹어 보니 알겠더라고요. 아가씨께서 드시지 않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제야 키어넨은 뻬쉬를 집어 입에 넣었다.
레이디의 몸이 상할 수도 있는 음식이라면 빨리 먹어서 치워 버리는 게 나을 테니.
공격적으로 뻬쉬를 집어먹는 키어넨의 모습에 앰버도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는 데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