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솟아날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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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솟아날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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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솟아날 구멍
2023.04.10.
그때 한 걸음 다가온 이카르가 찌푸려진 르네브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왜, 왜요.”
“외국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그러니 너무 실망할 것 없어.”
그 말만 툭 내뱉고는 이카르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외국 속담이라고?’
***
“이런 곳에 온천이 있었군.”
밤이슬을 피해 헤매던 이카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어떻게 생각하지, 영애?”
“솟아날 구멍 말인가요? 뭐, 확실히 구멍이기는 하네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여긴?’
원작에서도 온천이 등장하기는 했었다. 스토리 흐름의 주요 장소는 아니고, 외전에서.
국경 지역을 정찰하다 마물 떼에 쫓긴 루시우스와 에시카가 온천을 발견한 것이다.
몸을 씻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뜨거운 밤을 보내는 분위기로 이어졌었지…….
소설을 읽을 때는 마냥 설레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부분이었거늘, 지금은 그 둘만 떠올리면 아주 진저리가 쳐졌다.
루시우스와 에시카가 맺어지기 전이니, 이 온천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 자그마한 위안이었다.
“해가 저물어서 그런지 점점 추워지는군. 체온 유지를 위해서라도 온천에 들어가는 편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좋아요.”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를 비켜 주려는 듯 이카르가 저만치 멀어졌다.
이카르 역시 아까 그 얼음물로 몸을 씻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더는 이카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르네브는 드레스를 벗으려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깨달았다. 바로 그녀 혼자 드레스를 입고 벗어 본 적이 없다는 것.
황후였을 적에도 언제나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환복했고, 그건 회귀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르네브는 난감해졌다. 지금 곁에 사람이라고는 이카르뿐이다.
그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끙끙거리며 혼자 등에 달린 리본을 풀어 헤칠 때였다.
“혼자서는 옷을 입고 벗는 것도 하지 못하는 건가?”
“……드한 경.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르네브는 어깨까지 끌어 내렸던 드레스를 끌어안았다. 미간을 찌푸린 이카르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이걸 건네주려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장담하지.”
“…….”
여전히 르네브가 경계를 풀지 않고 쳐다보자, 이카르가 불쾌한 듯 내뱉었다.
“뭐야, 그 눈빛은? 설마 내가 훔쳐보려고 했다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에서 음흉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무관심에 가까워 보였다.
“그 말, 믿을게요. 그런데 그건 뭐죠?”
르네브는 제 생각이 지나치다 여기며 이카르의 손을 내려다봤다.
“천연 수세미. 몸을 닦을 만한 게 필요할 것 같아서.”
“오해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카르를 변태로 몰았던 조금 전 자신이 부끄러워 르네브는 냉큼 사과했다. 그러자 이카르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귀하신 후작 영애께서는 혼자서 몸을 씻을 줄도 모르려나.”
왠지 도발하는 것 같아 르네브는 반쯤 오기로 대답했다.
“바슈케르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는 호위 정도 되면, 목욕 시중에도 자신이 있나 보죠?”
“내게 목욕 시중을 맡기고 싶은가 보군?”
얄궂은 미소를 걸친 채로 이카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르네브는 이카르가 다가온 만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요청하면 들어줄 건가 보네요.”
그러고는 내심 당황해 시선을 돌렸다.
“파라디움의 영애들은 호위에게 목욕 시중을 맡기는 특별한 문화라도 있나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어.”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이카르가 몸을 돌렸다.
“혼자서 멀리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왜요? 훔쳐보려고요?”
도발에 발끈한 듯 이카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뒤돌아봤다.
“안전 불감증이란 말 몰라? 불과 몇 시간 전에 울프의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던 이카르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르네브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르네브는 작게 종알거리며 허리에 묶인 리본을 마저 풀었다.
원작에서 등장했던 장소였기에, 이곳의 안전성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온천 주변 토지에 마법석이 섞여 있어 마물이나 짐승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르네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카르에게 말하려다 참았다.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추궁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이카르는 바닥의 흙을 집어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괜한 걱정이었군.”
토질을 확인한 이카르는 경계를 풀었다. 여유롭게 씻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카르는 셔츠 자락을 살짝 들고는 시선을 내렸다.
“하…….”
곧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핏물이 묻어 셔츠가 엉망이었다. 셔츠 꼴을 보고 저 연약한 영애께서 기절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전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게 으르렁거리던 조그마한 여자를 떠올리자, 이카르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무미건조하고 냉철한 표정으로 되돌아간 이카르가 휘슬을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드덕거리며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이카르는 나뭇잎에 돌로 표식을 새긴 뒤 새의 다리에 묶어 날려 보냈다.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드한의 일 처리가 빠르길 기대해야겠군.”
***
이카르가 고립된 현 상황을 드한에게 알리는 동안, 르네브는 겨우겨우 드레스를 벗었다.
“하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으나, 차가운 바람이 나신을 훑고 지나갔다.
쓰러진 것도 모자라 감기까지 걸려 일정을 지체시킨다면, 이카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는 셈이다.
르네브는 서둘러 온천물에 발끝을 살짝 담가 온도를 체크했다.
꽤 뜨거웠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온천에 목까지 푹 담근 르네브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차에서 혹사당한 엉덩이와 허리 근육들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카르 앞에서 근육통에 시달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사락사락.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같은 백색 소음만이 적막한 공간을 메웠다.
그렇게 얼마간 르네브가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르네브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카르가 다가온 거라 여기며 ‘젠틀한 척하더니…….’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우끼끽!
엉덩이 쪽만 민둥산인 원숭이 몇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끼끼끽!
원숭이들이 르네브에게 손가락질을 해 대며 저들끼리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느낀 르네브는 조심스럽게 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러고는 원숭이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던 원숭이들은 자리를 피하는 르네브를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듯했다.
“정말 살기 각박하네.”
원작 전개를 피하고자, 자신을 죽일 루시우스에게 잘해 줬더니 결국 사망 엔딩을 맞지 않나.
지난 삶도 황후로서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귀한 지금에 와선 하루하루 주변에 사망 플래그가 도사리는 것 같았다.
“후우…….”
르네브는 얼른 고개를 저어 침울해지려는 기분을 떨쳐 냈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둔 바위틈 사이로 보인 것은.
“……!”
건너편 온천의 수면 위로 드러난 건강한 남자의 상반신이었다.
햇빛에 그은 건강한 피부.
넓고 강인한 어깨.
움푹 팬 쇄골 밑으로 탄탄한 흉근과 빨래판 같은 복근까지…….
신전 벽화에서나 보던 그 그림 같은 육체를 눈앞에 둔 르네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목구멍으로는 마른침이 넘어갔다. 르네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과 몇 분 전, 몰래 훔쳐보지 말라며 이카르에게 신신당부를 했던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었다.
보려고 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르네브야말로 몰래 이카르의 벗은 몸을 훔쳐보고 있는 거니까.
“…….”
르네브는 그만 온천에서 나가려 드레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원숭이들이 르네브의 드레스를 뒤적이며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르네브는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속으로만 욕설을 뇌까렸다.
‘저 천둥벌거숭이들이……!’
르네브는 원숭이들이 드레스에서 흥미를 잃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무엇보다 그전에, 이카르에게 이 상황을 절대 들켜선 안 된다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다.
르네브는 큰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는 원숭이들을 지켜봤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또 10분이 지났다. 한계에 다다른 르네브와 달리 이카르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몸이 팅팅 불 때까지 나가지 않을 셈인가?’
르네브는 고개를 돌려 천둥벌거숭이들의 용태를 살폈다.
줄곧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르네브와 달리 원숭이들은 교대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가족 단위로 여행이라도 온 듯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
르네브가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의 모든 물체들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휘청거린 르네브는 제 뺨을 찰싹 두드리고 눈을 크게 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보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렇게 영겁의 시간과도 같은 인고 끝에 이카르가 눈을 떴다.
드디어 이카르가 온천에서 나갈 모양이었다. 그게 너무 기뻐서 르네브가 꽉 쥔 두 주먹을 얼굴께로 들어 올렸을 때였다.
이카르가 몸을 일으켰다.
‘어……!’
르네브는 행여나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입을 꽉 틀어막아야만 했다.
‘세, 세, 세상에!’
움직이는 조각상이 신기한 것도 그렇고……. 아니, 저게 가능해?
입을 떡 벌리고 이카르의 벗은 몸을 쳐다보던 르네브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남의 몸을 허락도 없이 훔쳐보는 건 범죄다.
르네브는 자꾸만 이카르의 벗은 몸으로 따라붙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돌렸다.
그리고 ‘어…… 왜, 이러지?’라고 생각한 순간, 눈앞의 풍경들이 다시 한번 색채를 잃고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
풍덩!
물속에 무언가 빠지는 소리에 이카르는 고개를 돌렸다.
계속 숨어서 자신을 훔쳐봐 놓고 이제 와 큰 소리를 내는 이유가 뭔지 조금 궁금했다.
그리고 르네브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쯧, 미련하긴.”
물에 둥둥 떠 있는 여자를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르네브에게 다가간 이카르는 눈을 감고 그녀를 물속에서 건져 냈다.
제아무리 예리한 감으로 상대의 기척을 능숙하게 파악하는 이카르라지만, 계속 눈을 감고 걸을 수는 없는 노릇.
이카르는 어깨에 둘러 둔 셔츠를 르네브의 몸 위에 덮었다.
황궁에서 변경까지, 며칠 사이 세 번이나 기절한 여자는 처음 본다.
“참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이카르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