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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픽픽 (9/148)


#9화 픽픽
2023.04.09.


대답이 매우 궁금하다는 눈빛이라, 르네브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생각했다.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카르가 초조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채근해 왔다.

“아니면 이국 황제의 소문 같은 건 전혀 듣지 못했다거나?”

르네브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에야 천천히 입을 뗐다.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서는 매우 ‘신실’하시고, 또 ‘정숙’하신 분이라 알고 있어요.”

“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갔다.

어딘지 불량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이카르의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 덕에 되레 매력이 배가 되었다.

“그러는 드한 경이야말로, 직접 명을 하달받을 정도이니 황제 폐하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알 것 같은데요.”

“떠보려는 심산이라면 그만둬. 넘어가 줄 생각 없으니까.”

“…….”

이번에는 르네브의 한쪽 눈썹이 기울었다.

언제는 제 평판을 궁금해하더니?

바로 말을 바꾸는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다.

르네브가 약간의 불만을 내뱉으려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돌연 이카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마차를 세워!”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하면서 르네브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

마차 벽면에 머리를 부딪힌 르네브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카르가 잠시 그런 르네브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잠깐이었을 뿐, 곧 개의치 않고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뭐야, 갑자기? 아아, 아파…….”

르네브가 머리를 감싸고 신음을 줄줄 흘릴 때였다.

“…….”

마차 밖에서 짐승의 그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브는 마차 문이 꽉 닫혔는지 확인한 뒤 창 너머의 상황을 살폈다.

늑대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커다란 검은 생명체들이 마차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짐승 한 마리가 이카르에게 달려들었다. 이카르가 달려드는 짐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객체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만큼이나 컸지만,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짐승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측면에서 달려드는 짐승에게 이카르가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짐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핏방울이 마차 창으로 흩뿌려지고 몸통과 분리된 짐승의 머리가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

그 장면이 르네브에겐 트리거로 작용했다.

일순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어 있던 패트릭과 짐승이 겹쳐 보였다. 르네브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카르는 몰려든 울프 떼를 빠르게 해치우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눈에 축 늘어진 르네브의 모습이 담겼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

르네브의 뺨을 두드리던 이카르가 마부에게 소리쳤다.

“근처 마을로 진로를 변경한다!”

“예, 예!”

마부가 빠르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아카르는 르네브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깨어난 영애가 이 꼴을 보면 다시 기절하겠는데…….”

***

르네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마차 안이었다.

“이봐, 정신이 들어?”

좁고 흐린 시야로 찌푸려진 이카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런…… 것 같네요.”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카르가 살며시 르네브의 어깨를 눌렀다.

“더 누워 있도록 해.”

“이제 괜찮아요.”

르네브가 다시 몸을 일으켜 앉으려 하자, 이카르가 성가시다는 투로 내뱉었다.

“툭하면 이렇게 픽픽 쓰러져서는, 잘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르네브는 정말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통수에 닿는 이카르의 허벅지가 돌처럼 딱딱했다.

거기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가 몸을 흔들어 대니, 이제는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드한 경,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르네브는 단호하게 의사 표현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보통 고집이 아니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카르가 르네브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무심코 마차 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르네브는 흠칫 굳었다.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 잠시 스쳤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매번 피만 보면 픽픽 쓰러진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이카르에게 성가신 여자라는 인식을 더는 심고 싶지 않았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던 르네브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창문이 깨끗했다.

“드한 경께서 마차 창문을 닦아 놓은 건가요?”

“피를 보고 쓰러진 게 아니었나?”

“아마도…… 요.”

르네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회피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서부 변경을 지난 것 같지는 않네요.”

“마차를 돌렸어. 귀한 영애께서 쓰러진 마당에 바슈케르에는 가서 뭐 하겠어.”

언뜻 힐난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르네브는 이카르가 제법 상냥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다.

과거 카엘을 잉태한 르네브는 심각한 빈혈을 앓았었다. 건국제 당일 황궁의는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루시우스가 황후의 부재를 허락지 않았다.

중요한 행사에 황후가 등장하지 않으면 귀족들이 황제 부부 사이를 의심할 거라며.

결국, 르네브는 부른 배를 안고 건국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박제된 인형처럼 미소 지어야만 했다.

몸을 압박하는 드레스와 무거운 장신구들에 짓눌리다시피 한 채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였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넓은 황궁을 장시간 활보하고 다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휘청이는 르네브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어이, 정말 괜찮은 거야? 쓰러질 때 뇌출혈이라도 있었다든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채로 이카르가 물었다.

그 덕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생각했다.

조금 전에는 정말로 기절한 게 맞다.

그런데 ‘픽픽’이라니?

마치 아카르가 황궁 무도회 때의 일을 목격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에요. 드한 경, 어째서 툭하면 픽픽 쓰러진다는 표현을 했던 거예요? 저는 오늘 처음 쓰러졌다고요. ‘픽픽’이란 건 자주라는 뜻이잖아요.”

그때 마차가 멈추고,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는 길이 수몰되어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이카르의 반듯한 미간에 실금이 잡혔다.

조금 전 건넨 질문의 대답이 조금 궁금했지만, 르네브는 현재에 집중했다.

“갑자기 마을은 왜요?”

“왜, 겠습니까? 귀한 후작가의 영애님.”

“혹시 저 때문에 경로를 변경한 건가요?”

이카르가 알면서 뭘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이제 괜찮아요. 곧장 바슈케르로 가도 좋아요.”

르네브가 빠르게 덧붙이자, 이카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지금 와선 그 길 외엔 다른 방법도 없을 것 같군.”

***

국경을 향해 얼마나 더 달렸을까.

창밖 하늘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르네브의 엉덩이며 등허리는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지만, 차마 쉬었다 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쓰러지는 바람에 경로를 이탈해 시간이 지체된 상태다.

거기다 귀한 후작가의 영애님은…… 같은 소리를 또 듣고 싶지 않았다.

“잠깐.”

줄곧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이카르가 마차 벽을 탁탁 두드렸다.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멈췄다.

“국경에 다다른 것 같군.”

르네브는 황량한 서부의 석양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세이렌 후작령과 맞닿은 지역일 텐데? 마치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말하는군.”

묘하게 눈에 익은 풍경이었지만, 르네브가 국경까지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줄곧 수도 후작저에서 지냈거든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춰 가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순간 드레스 자락에 폭 안겨 오던 보들보들한 카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엘에게는 항상 가장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던 탓이리라. 앞으로 평생, 다시는 볼 수 없을 아이.

“…….”

금세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지만, 르네브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물을 참았다.

르네브가 마차에서 내리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

그녀의 시야로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왔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좀이 쑤실 만도 한데. 달리는 내내 불평 한마디 않더군.”

설마, 저걸 칭찬이라고 하는 건가?

이카르의 손을 잡았던 르네브는 흠칫 놀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이카르의 높은 체온에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왜, 영애님을 마차에서 내리게 하려면 안아 드려야 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이카르가 르네브를 안아 올리려 했다. 르네브는 뺨을 살짝 붉히며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괘, 괜찮아요. 제 발로 내릴 수 있어요.”

“그러시든지.”

이카르가 이번에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작게 코웃음 치고는 이카르의 손을 잡았다.

르네브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카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카르의 커다란 손을 르네브는 잠시 동안 응시했다.

책 속에 빙의하기 전, 그녀는 모태 솔로로 죽었다. 30살이 될 때까지 하지 못하면 대마법사가 된다는 말이 있던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르네브에게 있어 이성이란 루시우스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손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랬던 그와 달리 따뜻한 이카르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게 조금 아쉬웠던 것도 같다.

“그런데 드한 경, 갑자기 마차는 왜 세운 거죠?”

르네브의 궁둥이 안전을 걱정해서는 아닐 테고?

“일단 좀 씻는 게 좋겠군.”

이카르가 근처 냇가를 가리켰다.

그의 옷에는 굳은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원작에서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는 묘사가 있었던 그였다. 확실히 저래선 찝찝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르네브는 이카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투명한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르네브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읏!”

“무슨 일이지?”

바로 날 선 이카르의 음성이 뒤따랐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그랬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르네브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검을 뽑아 든 이카르가 그녀의 코앞까지 달려왔다. 르네브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물이, 정말 차갑네요. 손을 넣었다가 깜짝 놀라서…….”

이번에도 까다로운 영애님이라 비아냥거릴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카르가 르네브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 말이 맞아.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이카르가 금세 붉어진 르네브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지?’

대체 어느 면에서 그의 공감을 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르네브가 알쏭달쏭한 그의 반응을 헷갈려 하는 사이, 이카르가 마부에게 다가가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마부가 말들을 물가로 이끌었다. 푸르릉거리며 멀어지는 말들에게선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이대로 계속 달리게 하는 건 가혹한 처사 같았다.

“드한 경. 해가 뜰 때까지만 쉬었다 가는 게 어떨까요?”

마침 같은 생각이었던 듯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도 들르지 못하고 밖에서 밤을 보내게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르네브의 미간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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