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왜, 왜 여기 눕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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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왜, 왜 여기 눕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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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왜, 왜 여기 눕는 거예요?
2023.04.11.
르네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동굴 안이었다.
밤이 되고 기온이 꽤 떨어졌기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카르가 이곳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오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동굴 안을 메웠다.
르네브는 그 옆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채로 입을 열었다.
“저…… 드한 경?”
“뭐지?”
불 속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던 이카르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봤어요?”
거의 기어들어 갈 정도로 작은 입술의 뻐끔거림이었으나, 이카르는 이를 놓치지 않고 반문했다.
“뭘.”
르네브는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제…… 몸이요.”
“그럼 봤지.”
“아니! 그걸 왜 봐요!”
르네브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한쪽 무릎에 턱을 괸 이카르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보이기 싫었으면 다 벗은 채로 쓰러지질 말았어야지.”
르네브는 슬그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게다가 자신도 이카르의 벗은 몸을 봤으니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어쨌든,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이번이 세 번째가 되겠군.”
르네브는 무릎에 턱을 기댄 채로 슬쩍 시선을 들었다.
“세 번째요?”
“영애님께서 내게 목숨을 빚진 횟수 말이야.”
“조금 전과 짐승들을 마주쳤을 때를 포함하면 두 번 아닌가요?”
그런데 세 번이라니?
“잘 생각해 봐. 이번이 세 번째니까.”
르네브는 나머지 한 번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후작저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강압적으로 입술을 부딪쳐 오는 루시우스에게 르네브는 고자 킥을 날릴 뻔했다.
황족을 고자로 만들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카르에게 목숨을 빚진 게 맞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르네브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드한 경은 참 인내심이 좋은가 봐요. 온천물이 상당히 뜨겁던데 괜찮던가요?”
족히 30분은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던 터라,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 덕에 지금 그다지 춥지 않기도 하고.
“난 딱 좋던데. 영애는 몸이 찬 편인가?”
“뭐, 드한 경보다는요.”
르네브는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카르의 뜨겁고 큰 손을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검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불꽃을 응시하던 이카르가 읊조렸다.
“그럼 밤에 추위를 많이 타겠군.”
“그렇죠.”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물었다.
“바슈케르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네.”
“파라디움보다는 훨씬 더울 거야. 그 밖에 바슈케르에 대해 또 뭘 알고 있지?”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등극하시기 전까지 바슈케르는 주변국과 교류가 적었던 것으로 알아요.”
“…….”
“그 때문에 거칠고 야만적인 민족이란 소문이 있지만, 실상은 문화, 예술을 비롯해서 상업이나 농업도 발달되어 있죠.”
르네브의 말에 이카르의 적안에 이채가 돌았다.
“신기하군. 영애의 말대로 바슈케르가 파라디움과 교류를 시작한 건 얼마 안 됐거든.”
그런데 어떻게 자세히 알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서부 변경백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으신 것 같군요.”
르네브는 부러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허세를 부리면 머리가 좀 맑아 보이는 효과를 얻기 마련이니.
“맞아. 세이렌 후작은 대단한 실력을 지녔어. 오랜 시간 서부 변경을 지켜 낼 정도로 지휘력도 뛰어나지.”
뜻밖에 이카르가 동의를 하고 나섰다.
“소후작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고…….”
거기까지 말한 이카르가 돌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조금 장난스럽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그는 냉철한 군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바짝 소름이 돋았다.
르네브는 자원해서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짐승 떼를 혼자서 빠르게 격파하던 이카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의 이카르도 위압감이 대단하지만, 몇 년 뒤의 그는 그야말로 냉철하고 완벽한 군주의 표상과 같았다.
약소한 왕국부터 시작해서 강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주변국을 모두 통합했으니까.
종내에는 하나 남은 파라디움 황궁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왔었다.
자신감 넘치고, 오만한 성정을 그대로 보여 주려는 듯이 말이다.
르네브가 마른침만 삼키고 있자, 불꽃에서 시선을 떼어 낸 이카르가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러지? 마치 곧 잡아먹힐 토끼처럼 바짝 긴장한 것 같아 보이는군.”
기가 막히게 예리한 남자였다.
태생적으로 군림하는 위치에 선 자의 감이란 건가?
“세상에 이렇게 커다란 토끼가 어디 있어요.”
르네브는 긴장감을 억누르고는 말도 안 된다며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러나 손끝이 살짝 떨려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있어.”
“네?”
“자이언트 토끼라고, 바슈케르 북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출몰하지.”
그렇게 말하는 이카르의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못 믿겠으면 믿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던 이카르가 덧붙였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는 편이 좋겠군.”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뒤부터 계속 노곤하게 눈꺼풀이 내려앉기는 했다. 갑자기 날 선 반응을 보였던 이카르 때문에 잠시 잠이 달아났기도 했지만.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모로 누웠다.
이카르가 넓게 깔아 준 나뭇잎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조금 막아 주는 듯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추위로 몸을 바르르 떨던 르네브는 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추운가 보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카르의 나지막한 중저음이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굴 목소리인데, 동굴 안에서 들으니 괜히 귓구멍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르네브는 슬쩍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조금요. 드한 경은 춥지 않아요?”
“워낙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이런 때만큼은 부러운 체질이네요.”
르네브는 이카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카르의 한쪽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열이 필요하다면 나눠 줄 수도 있는데.”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르네브가 눈만 끔뻑이자, 이카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르네브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왜, 왜 여기 눕는 거예요?”
당황한 르네브가 빠르게 눈을 깜빡이자, 이카르가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뭘 더 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르네브의 시야에 살짝 열린 셔츠 틈으로 드러난 튼튼한 이카르의 흉근이 들어왔다.
곧바로 온천에서 봤던 그의 알몸이 떠올랐다.
르네브는 넘어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빠르게 그 이미지를 떨쳐 내려 애썼다.
“해 주길 바라다니, 뭘 하길 바란다는 거예요? 이상한 분이시네.”
“봤잖아.”
“뭐, 뭘요.”
“아까 온천에서 내 몸을 훔쳐봤다는 거 다 알고 있어.”
르네브는 눈을 질끈 감고는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와 변명이라도 해 보자면……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머리 위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세를 바꾸려는 듯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르네브는 빳빳하게 몸을 경직시킨 채로, 몸을 옹송그렸다.
그때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르네브의 눈이 번쩍 떠졌다.
르네브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미안한데 영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맞닿은 등을 타고 목소리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이카르의 너른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르네브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잘 자요.”
르네브는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맞닿은 등을 타고 진동이 전해져 왔다.
“잘 자.”
그렇게 길고도 고단했던 하루가 저물었다.
***
다음 날 막 잠에서 깬 르네브는 온기를 찾아 몸을 꿈틀거렸다.
지나치게 피곤한 나머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시야가 좀…… 이상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몇 번 눈을 깜빡여 봤지만, 변함이 없었다.
움푹 패어 물을 따라보고 싶은 쇄골.
풀어 헤쳐진 셔츠 틈으로 슬쩍 보이는 흠잡을 데 없이 탄탄한 흉근.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유난히 무거운 데다 갑갑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째서 자신이 이카르의 품에 안겨 있단 말인가.
이카르가 깨지 않도록 움직임에 주의하며 르네브는 시선을 올렸다.
두텁지만 길고 곧은 목선과 베일 듯 날렵하지만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턱선.
붉고 탐스러운 입술과 쭉 뻗은 콧대를 지나 르네브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늘어진 적안과 눈이 마주쳤다.
“깨, 있었어요?”
이카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한참 전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지? 곤히 잘도 자더군.”
르네브는 맞닿은 몸을 떨어뜨리고자 그의 가슴팍을 짚었다.
그런데.
“윽.”
이카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손끝으로 단단한 근육의 감촉 외의 것이 느껴졌다.
응?
“아침 인사치고는 격렬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영애?”
르네브는 슬며시 그의 가슴팍에서 손을 떼어 내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다시 한번 셔츠 틈새로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그런 르네브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카르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의 시선이 왠지 앙큼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그럼요. 드한 경의 착각일 거예요.”
르네브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남의 몸이나 더듬는 변태가 된 것 같아 자괴감에 괴로워하면서.
“역시 귀한 영애께서 노숙을 하기에는 무리였나. 계속 몸을 바들바들 떨더군.”
“그래서 저를 끌어안고 주무셨다는 건가요?”
르네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이카르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자꾸만 등에 매달리더군. 가만히 있으라고 팔을 둘렀던 것뿐이니, 이상한 오해는 마.”
이카르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눈 감고부터 전혀 기억이 없으니.
르네브가 마른 입술을 뻐끔거리고만 있는데, 이카르가 뜻 모를 말을 했다.
“왔군.”
뒤이어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다니, 누가?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동굴을 빠져나가는 이카르의 너른 등짝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등에 매달리다니? 내가?’
굳은 채로 얼마간 자기반성 시간을 가진 르네브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냐고…….
수치사를 피하려면 정신 승리가 꼭 필요했다.
정신을 차리려 르네브는 차디찬 냉수로 고양이 세수를 했다.
드레스 소맷단에 물기를 닦으려는 찰나, 등 뒤에서 이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
그의 옆에는 조금 어두운 금발과 녹안을 가진 호리호리한 미남자가 서 있었다.
‘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