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적국 황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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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적국 황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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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적국 황제의 초대
2023.04.03.
“바슈케르로 황녀를 보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황제가 버럭 성을 내자, 이카르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어디까지나 제국 간의 다른 문화 차이를 체험해 보자는 취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황제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이카르를 노려봤다.
백발 노장이라고는 하나, 파라디움의 황제 또한 대단한 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가 젊을 적에는 말이다.
오랜 시간 제국을 군림한 황제의 기세에 간담이 서늘해질 법도 하다.
그러나 젊은 황제, 이카르는 그런 황제를 종이호랑이를 보듯 무감이 쳐다볼 뿐이었다.
“유학이라 보심이 적절하겠군요.”
무릇 싸움은 상대가 응해야 성립되는 법이다. 기 싸움을 걸었던 게 무색하리만치 젊은 황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기간은 3년입니다.”
황제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유학이라……. 하하.”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마십시오. 황녀께서는 무탈히 제국 땅을 밟게 되실 테니.”
더 이상 협상의 의지가 없다는 듯, 이카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슈케르 제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복 전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이후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주변 소국들의 영토부터 야금야금 먹어 치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파라디움 제국령의 코앞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이르렀다.
바슈케르 제국군 중에서도 최고의 전사들만 따로 모아 파라디움 내에 은밀히 잠입해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 지금.
파라디움의 황제로선 이 강압적이고도 배려 없는 젊은 황제의 제안을 함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시각.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는 황후에게 시종이 귀엣말을 건넸다.
“세상에! 그런 억지가!”
황후의 가슴께가 크게 오르내렸다. 말을 전한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인질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내 딸을 그런…….”
진노한 황후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황후 폐하.”
“뭔가?”
분노를 억제하며 뒤돌아본 황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이렌 후작 영애, 여긴 어쩐 일인가요.”
“결례를 무릅쓰고서라도 황후 폐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보세요.”
“……바슈케르의 황제께서 황녀 전하를 초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황후의 눈썹이 아주 잠깐 움찔거렸다.
조금 전 긴밀히 오고 간 소식을 어떻게 알고?
잠시 르네브를 빤히 응시하던 황후가 이내 코웃음 쳤다.
“초청이라고? 그걸 그리 표현하던가요?”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불편한 소식에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
제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르네브의 표정에 황후가 화를 누그러뜨리며 더 말해 보라 눈짓했다.
“제게 황녀 전하를 바슈케르로 떠나보내지 않을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니요?”
“황녀 전하를 대신해서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자원하겠다니? 영애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나 알고는…….”
거기까지 말한 황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는 아직 어린 영애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건가 싶었다.
물론 잠깐 혹한 건 맞았다.
하지만 급한 대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나중에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대답을 보류했다.
“지금 바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진 뒤에, 그때 다시 얘기하죠.”
그 말을 끝으로 황후가 몸을 돌리려 했다.
“황후 폐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 그 자체도 예의에 어긋나고요.”
르네브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충동적인 제안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고려해 보시길 간청드립니다.”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하고 돌아서는 르네브를 보자, 황후의 마음이 한층 더 심란해졌다.
황후는 전부터 세이렌 후작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다. 아들의 세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에 세이렌 후작의 하나뿐인 여식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실제로 본 세이렌 후작 영애는 소문과 달랐다. 용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눈빛에도 총기가 돌았다.
황후의 두 아들 모두 정해진 짝이 있으니 이제 와 아쉬워한들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까다로운 황궁 예법을 언제 저리 잘 익혔을까?’
자신조차 황태자비로 황궁에 들어온 후 몇 년간은 예법으로 제법 애를 먹었다.
그런데 세이렌 후작 영애의 행동거지는 황후인 자신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적국의 인질로 보내 버리기는 아까운걸…….”
가늘게 뜬 눈으로 고심하던 황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가 자발적으로 떠나고 나면, 세이렌 후작가에 큰 은혜를 입었다며 제 딸인 황녀를 세이렌 소후작의 짝으로 들이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
르네브는 복도 저편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황후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무도회가 한창인 그레이트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가 어떤 결정을 내리려나.’
처음 이 소설에 빙의하고 르네브의 목표는 죽지 않고 살아남기였다.
그래서 원작 남주였던 루시우스에게 진심을 다했다. 미래를 바꿔 보려고.
황위와 제일 거리가 먼 3황자 루시우스를 황좌에 올리기 위해 사교 모임마다 참석해 귀족들과 친교를 쌓으려 애쓴 건 기본이었다.
손재주도 없는 주제에 루시우스에게 선물할 손수건에 밤새 수를 놓았고, 시녀들을 따돌리고 몰래 요리에 몰두하기도 했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간신히 생명 줄만 연장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루시우스를 버리기로 했다. 그를 떠나 원작과는 다른 삶을 살아 보기로 결정했다.
르네브가 정한 첫걸음이 바로 원작 주인공들과 멀어지기였다.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마침 르네브는 이 시기에 적국 황제 이카르가 양국 간의 휴전 명목을 내세워 황녀에게 3년간의 유학을 제안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3년이나 떨어져 있게 되면 루시우스도 새장가를 들겠지.’
물론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원작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는 행동이 어떤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동시에 이번에야말로 미래가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대감도 품었다.
그런 모순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자조할 때였다.
“르네브? 대체 혼자 어딜 갔던 거야.”
복도 저 멀리서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의 남자가 은발을 흩날리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패트릭.”
살아서 움직이는 가족을 다시 보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르네브는 패트릭을 와락 끌어안았다.
“……르네브? 왜, 왜 이래 너답지 않게 무슨 일 있었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패트릭이 르네브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르네브는 패트릭의 품에 안긴 채로 빠르게 감정을 추슬렀다.
패트릭으로선 고작 몇 달 만에 동생을 다시 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황궁 벽면에 걸린 예술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그만 길을 잃었지 뭐야. 그런데 이렇게 가족을 만나니 정말 반가워서.”
패트릭이 안도하며 말했다.
“그건 그래. 나도 처음 황궁에 왔을 때는 길을 잃을 뻔했거든. 여긴 꼭 미로 같다니까.”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으로 길눈이 밝은 패트릭이었지만, 르네브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그레이트 홀로 돌아가자.”
르네브는 붉어진 눈가를 들키지 않으려 앞서 걸었다. 패트릭이 그녀 옆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런데 르네브. 폐하께서 아버지뿐 아니라 나까지 급하게 황궁으로 초대한 것 말이야, 조금 이상하지 않아?”
과거에도 이맘때쯤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황궁 무도회에 초대됐었다.
언뜻 보면 후작령에 들이닥친 마물 토벌 건을 축하하려는 명목처럼 보였으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황비의 계략이 아니었나 싶었다.
오늘 황비는 르네브와 루시우스가 연인 사이라 공표할 예정이니까.
“어차피 곧 건국제잖아. 서부 일을 잘 해결했으니, 조금 일찍 불러서 승전을 축하하려는 게 아닐까?”
르네브는 먼발치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대답했다. 그러자, 패트릭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전 생에 르네브와 패트릭은 그다지 살가운 남매는 아니었다. 르네브가 책 속에 빙의했던 시점에 패트릭은 서부 후작령에, 그녀는 황궁 근처 후작저에서 지냈으니까.
그때 당시 르네브는 원작을 바꾸고자 루시우스에게 올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후작위를 물려받은 패트릭과는 한 해에 얼굴 몇 번 보는 게 다였다.
“그럼. 높으신 어떤 분께서 별다른 속셈을 가지고 우리 가족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냥 조금 이상하다는 거지. 합리적 의심, 몰라?”
“…….”
르네브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귀부인이 말을 걸어왔다.
“두 분, 남매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예를 갖춰 인사하는 그녀에게 패트릭이 가볍게 목례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영애를 찾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이렇게 마주치네요.”
태연하게 우연을 가장하는 앤드니 백작 부인을 보며 르네브가 양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패트릭은 갑작스러운 동생의 태도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앤드니 백작 부인과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동생이 적의를 드러내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제 동생에게 용건이 있으십니까?”
한 발 앞으로 나선 패트릭이 르네브를 등 뒤로 감췄다. 그러자 한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앤드니 백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소후작께서는 동생을 무척 아끼시는 모양이군요. 발언권도 허락지 않으시는 걸 보면.”
성년을 앞둔 귀족 여성이 아직까지 오빠 뒤에 숨어 제 할 말도 제대로 못 한다는 비아냥이었다.
황후로 지내며 사교계에 잔뼈가 굵은 르네브는 이를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병사들과 뒹굴며 자란 패트릭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촉과 감이 뛰어나지 않으면 전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만큼, 직감적으로 상대의 적의를 눈치챘을 뿐.
일종의 야생의 감이었다.
“제 동생을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백작 부인의 발언이 주제넘게 들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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