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결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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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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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별 선언
2023.04.02.
동그란 이마와 도톰하고 오뚝한 콧대, 그 옆에 반듯하게 자리한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벌어지고 자색 동공에 초점이 어렸다.
낯설긴 했지만, 르네브는 금방 익숙한 천장이라는 걸 눈치챘다.
루시우스와 결혼 전까지 지냈던 세이렌 후작저에 있는 자신의 침실이었다.
르네브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목이 붙어 있어…….’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르네브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그건 꿈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로판 소설 속 악녀의 몸에 빙의했던 일부터 죽음까지의 모든 일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처음엔 9세 아이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악녀라는 꼬리표를 떼어 낼 기회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미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뒤였다.
그녀가 놀이 친구였던 트레이더 백작 영애를 얼음물 속에 밀쳐 버리는 사건이 바로 직전에 있었으니.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짓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후 세이렌 후작가에서 사파이어 광산 하나쯤 떼어 준 뒤에야 자택 연금만으로 일이 마무리됐었다.
물론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르네브가 벌인 일이었기에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고,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해서 르네브는 원작 여주인공 에시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원작 남주인공인 루시우스에게 잘해 주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에시카 암살을 사주하다 루시우스에게 죽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그런 노력의 힘일까?
더 나아가 황제가 되는 루시우스와 연인이 되었고, 제국의 황후가 되어 원작과 다르게 솜털 보송보송한 예쁜 아들 카엘도 낳고 잘 사는가 싶었다. 하지만 목숨 줄만 늘어난 게 다였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여타 로판 소설 속 빙의자들이 그러하듯, 한때 르네브는 제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만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목이 잘리는 엔딩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다시 살아 움직이게 된 지금이 사후 세계이든 과거로 회귀를 한 것이든.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변곡점이 찾아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세이렌 후작저의 정원.
그 중심에 놓인 백색 테이블 주위로 색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며칠 뒤에 있을 황궁 무도회 준비는 잘돼 가시나요?”
테이블 중심에 앉은 한 영애의 발언에 다른 영애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번 황궁 무도회에서 제3황자 루시우스의 약혼 상대자가 발표될 것이란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이미 혼인한 1황자와 약혼자가 있는 2황자를 제외하면 3황자 루시우스와 결혼하는 것이 황가의 일원이 될 유일한 기회였다.
해서 누가 3황자 루시우스의 혼약자가 될 것인지는, 현 미혼 영애들 사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얼마 전 황비 전하께서 트레이더 백작 영애를 티 파티에 초대했다죠?”
“……그랬나요?”
한 영애의 발언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트레이더 백작 영애가 후보라면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황비 전하께서 트레이더 백작 영애 외에도 몇몇 분을 황궁으로 초대했다고 들었어요.”
일종의 며느리 면접하듯이.
그리고 황비가 불러들인 영애 중에서 루시우스의 혼약자가 결정될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또 누가 황비 전하의 초대를 받았었죠?”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도 황비 전하의 초대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영애들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파라디움 제국의 서쪽 변경을 수호하는 세이렌 후작가.
그리고 세이렌 후작의 하나뿐인 여식 르네브 세이렌.
황비로선 트레이더 백작가의 영애보다는 변경백으로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세이렌 후작가의 영애 쪽이 입맛에 맞을 터였다.
트레이더 백작 영애와 세이렌 후작 영애.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제국 안에서 손꼽히는 미모를 자랑했다.
트레이더 백작 영애가 청초한 백합이라면, 세이렌 후작 영애는 독이 있는 꽃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백도화와 홍도화랄까.
둘의 성향이 갈리는 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성품 또한 극명하게 갈렸다.
“얼마 전 트레이더 백작 영애께서 신전 봉사를 다녀오셨다죠?”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찌나 마음씨가 고우신지. 그에 비해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는…….”
한 영애가 조소하며 뒷말을 흐렸다. 몇몇 영애도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영심 많은 악녀. 이게 늘 르네브의 평판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는 얼마나 더 늦으시려는 걸까요?”
영애 하나가 불만을 토로하자, 다른 영애들도 불만을 쏟아 냈다.
“사람을 초대해 놓고 얼굴도 비치지 않으시다니, 예의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시다니까…….”
그때 후작가의 하녀들이 디저트가 담긴 트롤리를 밀고 왔다.
귀족가의 소문은 무릇 고용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법. 그 생리를 잘 알고 있기에, 영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화를 주도하던 영애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얼마 전에 감기를 심하게 앓으셨다던데, 오늘도 몸이 좋지 않으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참석이 늦으신가 보네요.”
저 멀리서 종달새처럼 쫑알거리는 영애들의 목소리를 전부 들은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사람을 초대해 놓고선 얼굴도 내비치지 않은 건 사실이니.
이전 삶에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악녀라는 선입견을 떨쳐 내기 위해 르네브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는 보답받지 못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기로 했다.
백색 테이블 앞에선 르네브는 영애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영애들, 오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충분히 즐기셨다면 이만 돌아가셔도 좋아요.”
갑작스러운 르네브의 등장과 연이은 축객령에 올라가려던 영애들의 입꼬리가 갈 곳을 잃었다.
사람을 초대해 놓고, 이런 무례가 또 있을까?
후안무치가 따로 없다는 듯 영애들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중 처세술이 뛰어난 영애 하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세이렌 영애, 영애께서 얼마 전 감기를 크게 앓으셨다 들었어요. 아직 쾌차하지 않은 몸으로 어렵게 걸음을 해 주신 모양이네요. 그렇죠?”
그러자 또 다른 영애가 동조했다.
“그러셨구나, 몸은 괜찮으세요? 갑작스럽게 티 파티를 취소할 수도 없어서 곤란하셨겠어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영애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덕분에 건강은 충분히 회복되었답니다.”
하지만 이어진 르네브의 대답에 영애들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르네브를 감싸려고 애써 둘러댄 그녀들에게 빅 엿을 날린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럼 여러분. 맘껏 마시고, 즐기셨다면 가시는 길은 저쪽이에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르네브가 몸을 빙글 돌렸다.
사뿐사뿐 멀어지는 르네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애들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세상에! 이런 무례가 어디 있어요?”
“전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더는 이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네요.”
뒤통수로 날아드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르네브는 유유히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시든가.’
오늘 초대된 영애들은 과거 황후인 르네브의 덕을 보려고 피라미 떼처럼 몰려들었던 이들이었다.
살살 르네브의 비위를 맞추며 이런저런 청탁을 해 왔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뒤에서 험담을 하면서도 그녀들이 세이렌 후작저를 찾아온 이유는, 르네브가 미래의 황자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본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거나, 가문에서 강요했거나. 어느 쪽이든 르네브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이들이었다.
르네브는 이득을 취할 도구로만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오늘부로.
***
검정과 흰색의 체크무늬 바닥 위를 고급 구두 한 쌍이 누볐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황좌에 앉은 황제와 황후가 황실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춤추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폐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종장이 황제의 귓가로 무언가를 속삭이자,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폐하?”
그러자 황후가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술잔을 꽉 쥐었던 황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들라 하게.”
“예, 폐하.”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트 홀 안으로 장신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금수가 놓인 검은 제복.
파라디움 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조금 이색적인 옷차림이 유독 돋보였다.
“어머……. 저분은 누구시죠?”
“그러게요. 처음 보는 분이시네요.”
남자가 지나는 방향을 따라 귀부인과 영애들의 고개가 따라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재킷의 저 문양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바슈케르 황가의 문장이에요.”
한 귀부인의 말에 소란스럽던 목소리들이 줄어들었다.
파라디움 제국인들에게 바슈케르 제국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미가 매우 급하고, 사나운 야만인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더불어 눈앞의 남자가 그들의 군주인 이카르 바슈케르일 확률이 매우 높았기에, 귀족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벽면으로 물러났다.
괜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젊은 황제에게 따라붙는 귀부인들의 눈길은 꽤나 살뜰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서부터 올라붙은 엉덩이, 근육으로 꼬아 만든 상체를 지나, 대단히 아름다운 얼굴로 시선이 옮겨졌다.
“…….”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는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싹 무시하고는 파라디움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 또한 거만하게 앉아 훑는 듯이 이카르를 바라봤다.
“호위도 없이 홀로 적진에 쳐들어오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군.”
최근 황위에 오른 젊은 군주는 버선발로 환대해 줄 상대는 아니었다.
바슈케르가 무섭게 영토 확장에 나서고는 있으나, 아직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파라디움 제국에는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니.
“처음 뵙습니다.”
이카르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국력으로 우위를 점하는 게 무릇 군주의 바른 예라 볼 수 있다지만, 젊은 정복자에겐 연장자 우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헛, 처음 뵙겠소.”
황제가 헛웃음을 뱉으며 불쾌한 심기를 한껏 드러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황후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응접실로 모실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이카르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고, 황제는 못 이기는 척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