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두 번은 안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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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두 번은 안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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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두 번은 안 당해
2023.04.04.
패트릭의 흉흉한 기세에 앤드니 백작 부인이 눈을 굴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복도는 어두웠고,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황비의 측근 시녀로 오래 일해 온 만큼 그녀의 감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리도 빠르게 사과를 하는 것을 보면.
이런 외진 곳에서는 혈기 왕성한 패트릭이 험한 행동을 한데도 증언해 줄 이가 하나 없지 않은가.
“황비 전하께서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영애와는 대화가 통하는군요.”
그렇게 말한 앤드니 백작 부인이 패트릭을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패트릭의 기세에 곧바로 시선을 물렸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레이트 홀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앤드니 백작 부인.”
“잘됐네요. 가시죠.”
앤드니 백작 부인이 앞장서자, 패트릭이 괜찮겠냐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소리 없이 입술만 뻐끔거렸다.
‘걱정 마.’
무언가 이상하다 느낀 걸까?
르네브를 빤히 보던 패트릭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앤드니 백작 부인을 따라 걷다 보니, 황궁 그레이트 홀에 도착했다. 황비가 몰래 불러낸 건 아니라 판단한 듯 패트릭의 경계도 조금 느슨해졌다.
그게 괜히 르네브의 기분을 몽글거리게 만들었다. 이전 생에는 좀처럼 접점이 없던 남매다. 자신은 빙의를 했으니 실제 친남매도 아니고.
하지만 이토록 제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저기 오네요.”
그때 귀부인 무리에 둘러싸여 있던 황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르네브는 이전 삶 속에서 자신을 핍박한 시어머니의 환한 미소를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무서운 눈 할 것 없어. 넌 잘 모르겠지만, 황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후계는 꼭 필요하단다. 설마 황실의 일원으로서 그런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유산한 르네브 앞에서 정부를 들여야 한다고 속살거리던 황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르네브,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패트릭이 그런 르네브를 일깨웠다. 그제야 르네브는 시선을 내리깔고 황비를 향한 분노를 갈무리했다.
“그럼 괜찮지. 괜찮지 않을 건 또 뭐야.”
그때 세이렌 후작가의 기사가 다가와 패트릭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그래? 지금은 좀 그런데…….”
곤란해 보이는 패트릭에게 르네브가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버지께서 날 찾는다고 하시네.”
패트릭이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이렌 후작과 황비 쪽을 번갈아 보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아, 난 괜찮으니까 아버지께 가 봐. 황궁 안에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 날 해치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
“그건 아니지만……. 젠, 네가 르네브의 곁을 지켜야겠다.”
르네브를 황비 곁에 혼자 두고 가는 게 못내 걱정되는지 패트릭이 아버지의 말을 전하러 온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당부했다.
“예.”
르네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 목이 날아갈 줄 알라며 신신당부까지 하고서야 패트릭이 세이렌 후작 쪽으로 걸어갔다.
젠이 주변을 경계하며 르네브의 뒤로 와 섰다. 옅게 한숨을 내쉰 르네브는 황비 무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그레이트 홀의 너른 창가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 자리에는 황비와 그녀를 추종하는 귀부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르네브는 황비의 바로 옆에 서서 30분째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르네브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치 외딴섬에 따로 동떨어져 있는 듯, 혹은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을 취급하는 듯 황비와 귀부인들 모두 르네브에게 말을 걸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수법이 똑같네.’
이전 생에도 황비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르네브를 괴롭히곤 했었다.
초장에 며느리의 기를 눌러 놓으려는 황비의 계략이었단 걸, 그때는 너무 늦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일종의 트로피 효과.
황후 소생의 두 황자를 제치고 루시우스를 무사히 황위에 올렸던 일이야말로 황비에겐 무엇보다 값진 승리였다.
그 혁혁한 공을 세운 르네브를 볼 때마다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되새김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버려지는 법이다.
“이번에 베니스탄 왕국에서 들여온 거랍니다.”
“어머, 색이 참 영롱하고 곱네요. 지난번 그 보석상에서 구입하신 건가요?”
르네브가 귀부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때였다.
땡, 땡.
커다란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르네브는 자리를 뜨겠다고 황비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르네브는 곧장 근처 시종에게 다가가 말했다.
“세이렌의 르네브가 황후 폐하를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멀어지는 시종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홀 안을 쓱 둘러봤다.
아버지인 세이렌 후작과 오빠 패트릭은 기사 가문의 귀족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젊은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루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루시우스가 곁에 있던 영애에게 친근하게 귀엣말을 건넸다. 금방 영애의 양 뺨에 홍조가 오르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예전의 르네브였다면 지금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추측하느라 발을 동동 굴렀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르네브는 루시우스가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다고 해도 괜찮았다.
오히려 더 좋았다.
저 남자와 함께 미래를 그리면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르네브는 작게 실소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황후에게 말을 전하러 갔던 시종이 돌아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네브는 걸음을 옮기며 흘끗 황비 쪽을 쳐다봤다.
황비 역시 르네브를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르네브는 눈만 살짝 휘어 웃어 보이고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지난 생에 황비는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우스와 르네브가 연인 사이라 공표했었다.
유력 귀족 대다수가 모인 자리인 만큼, 르네브의 혼삿길이 완전히 막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두 번은 안 당해.’
***
시종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서자, 황후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고 했다죠?”
르네브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차분히 말했다.
“속히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뵙고자 청했습니다.”
“결정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시종을 물린 황후가 르네브를 빤히 응시했다.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 황후 또한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황후의 이런 태도는 당연했다.
황궁은 총칼이 없는 전쟁터였다. 말실수 한 번 잘못해도 목이 떨어질 수 있는 곳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려는 황후의 마음을 르네브도 모르지 않았다.
“전후 사정을 전부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은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르네브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황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감춰지지 않는 게 있었다.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
사교계의 여왕벌로 군림하는 황후에겐 르네브가 이제 갓 데뷔탕트를 치른 햇병아리처럼 보일 것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히 틈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할 터였다.
그래서 르네브는 부러 천진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금 황후 폐하께서 속히 결정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이후에는 아주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르네브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생각하던 황후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한 결정에 대한 후회, 나중에 가선 소용이 없을 거란 것도 알고 하는 말인지 궁금하군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지금 내린 결정을 무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때 돼서 어려서, 모르고 한 소리라며 말을 번복할 수도 있으니.
르네브는 황후에게 쐐기를 박을 요량으로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영애, 여자의 눈물은 함부로 보일 것이 못 된답니다.”
뚝 그치라는 황후의 말에도 르네브는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나왔다.
“저는…… 루시우스 황자 전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영애가 바슈케르로 떠나는 이유인가요?”
르네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볼을 타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조금 신기하군요. 미혼의 영애라면 누구나 3황자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을 텐데…….”
황후가 테이블 위를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제 발로 행운을 걷어차 버리려고 하는 것이 여간 수상하기도 하고.”
“제게는 루시우스 황자 전하와의 결혼이 결코, 행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르네브의 진심이었다.
르네브의 죽음이 황비의 뜻이었든 아니면, 정부 에시카의 뜻이었든,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루시우스는 르네브를 지켜 주지 않았다.
그게 현실이고 결론이었다.
죽기 전을 떠올리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기사들에게 빼앗겼던 아들 카엘이 그려졌다. 이번에는 정제되지 않은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톡, 톡, 톡톡톡.
르네브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 골치 아픈지 테이블을 두드리던 황후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제야 황후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 참. 이번 일로 영애는 황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될 텐데, 그것도 알고 있겠죠?”
“충분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르네브의 대답에 황후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이것으로 잠시나마 한배에 탔다고 생각이라도 한 걸까? 그도 아니면, 이게 세이렌 후작가의 뜻이라고 생각한 걸까?
황후가 팔에 걸고 있던 장신구를 풀어 르네브에게 건넸다. 황후의 물건임을 알리듯 장신구에는 작게 이니셜 N이 새겨져 있었다.
“어려운 순간에 세이렌 후작가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기억해 두죠.”
르네브는 장신구를 꼭 쥔 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 합니다. 황후 폐하.”
“내가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을 폐하께서 아시면…….”
작게 한숨을 내쉬고 푸념하듯 중얼거리던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먼저 응접실을 나가고, 그제야 르네브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작은 승리였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머니.
“공들여 한 화장이 엉망이 됐네요.”
응접실에서 나오는 르네브를 보며 황후가 말했다. 시녀가 눈물 젖은 르네브의 얼굴을 정돈해 주자, 황후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전장으로 가 볼까요?”
“네, 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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