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무시무시한 악마가 될 거야 (38/77)


38화. 무시무시한 악마가 될 거야
2023.04.11.



“저거 조은 거야! 선물!”

내 반박에도 시녀 언니들의 태도는 몹시 견고했다.


“선물이라니, 저건 선물이 아닙니다! 저건 시엔 님을 위협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저 흉포한 놈을 당장 말살-.”

시녀 언니들의 말을 톡 자르면서, 나는 커다랗게 소리쳤다.


“싫어! 고블린 조아!”

내가 그토록 원했던, 귀여운 고블린이니까!

시녀 언니들을 뒤로한 다음, 나는 주먹을 옴팡지게 꼬옥 쥐고, 블린이를 향해 신나게 달려 나갔다.

어느새 마차는 우리 저택의 들판에 도착했다.

마차 안에 탄 델피아 언니의 시종과 고블린이 순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델피아의 시종은 벌벌 떠는 모양새로 나를 향해 전언을 전달했다.


“그, 그러니까…… 시엔 님이 고블린을 좋아하신다는 소식이……. 죄, 죄송합니다.”

“왜 죄송해?!”

“이, 이런 흉물스러운 것을 선물로 보내다니요……. 워낙 델피아 님께서 자, 장난을 좋아하셔서…….”

나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행복한 마음을 그득 담아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은 아무 말 못 하고 있었지만 악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귀여웠다.


“나 블린이 조아!”

“브, 블린이요……?”

벌써 애칭까지 정했는 걸.


 


“애칭이야!”

성은 고씨!

이름은 블린!

***

세간에 널리 소문이 퍼져 나갔다.

델피아 미르모드가 미쳤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온갖 마물의 독과 사악한 마도구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있었다.

델피아가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날뛴다는 이야기는 정설로 굳어졌지만, 글쎄.

……실상은 좀 달랐다.

델피아가 수집한 모든 마물의 독과 사악한 마도구들은…….


“헤헤, 압빠. 나 어때?”

바로 나, 시엔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른 식빵 먹자, 시엔……. 저녁 시간이잖아.”

“웅!”

식빵도 씩씩하게 먹는 나를 보면서 아빠가 심기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블린은 지하 감옥…… 아니, 지하에 가뒀어.”

“헉. 지하? 우리 블린이가! 내 반려 몬스터인데……!”

내가 살짝 시무룩해 보이자 아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블린……이가, 어둠을 많이…… 좋아하더라…….”

아빠는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딸이 어쩌다 고블린 같은 걸 좋아하게 됐지…….”

나는 그에게 현실을 주지시켜 주었다.


“압빠. 인제 적응해야 해.”

“…….”

“이제 시에니는 아주 무시무시한 악마가 댈 거야…….”

내가 음흉하게 말하자 아빠가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다…… 그런 무시……무시한 걸 좋아하게 된 거야, 시엔?”

“구냥. 원래 시엔이는 이래써.”

아빠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

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화제를 돌렸다.


“압빠, 그런데 이짜나, 델피아 온니, 조금 갠차는 언니 같기도 해.”

다행히 아빠는 내 화제 전환에 동참해 주었다.

조금 탐탁지 않은 낯이기는 했지만.


“……선물에 홀린 거야?”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치만 블린이도 주고, 편지도 주고……. 음, 좋긴 해.”

그녀가 썼던 편지 내용이 조금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네가 힐러 같은 능력자를 모으는 이유는 강해지기 위해서겠지.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괴롭히거나 널 죽이려 하면 나한테 와.]

아빠에 대한 오해가 극심한 모양이다.

나는 아빠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언니, 아빠를 너무 나쁘게 봐!”

“그……러니?”

“웅. 아빠가 개롭히면 자기한테 오래. 우리 아빠처럼 차칸 사람이 어디 있다구.”

델피아의 단 한 가지 문제점은 바로 그거다.

우리 선량하고 착한 아빠를 악당으로 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뭐…….

가문 내에서는 그렇게 소문나는 게 오히려 좋았다.

나는 굳이 그 부분을 정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가기로 했다.


“헉, 지금 답장 쓸래!”

나는 시녀 언니를 불러서 깃펜과 편지지를 냉큼 받아 왔다.

그동안 아빠의 어두운 심연 같은 눈동자가 나를 내내 응시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편지 쓰기니까 일단 무시했다.

저녁 식사 식탁 위. 나는 깃펜을 들어서 아주 정중하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마자요. 우리 압빠 절대 바보 아니애요. 호구도 아니고, 엄청 엄청 나뿝니다.

사실…… 악마랑 성격 비슷함니다.

놀랏죠? 무섭죠?]

삐뚤빼뚤한 글씨로 여기까지 쓴 나는 살짝 고민했다.

델피아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건…….

[그럼 담에 놀러 갈개요. 안냥.]

이 정도면 아이치고 꽤 예의를 차린 편지가 된 것 같았다.

간만에 적은 편지를 내려다보니 꽤나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편지를 딱지 접듯이 접어서 시녀 언니에게 건넸다.

아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가 열심히 편지 쓰는 걸 바라보았다.

***

신이 난 시엔이 귀여운 엉덩이춤을 추면서 식탁을 떠났을 때. 마티어스는 시엔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다시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조사해 본 결과 델피아 미르모드는 확실히 세가 꺾인 데다 시엔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던데…….

대체 시엔과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렇게 홀려 버린 것일까.

시엔이 귀엽기는 하지만 팔불출 아빠에게도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은 무언가 묘했다.

시엔에 한해서는 절대 찜찜한 일을 좌시하지 못하는 그는, 곧장 관련하여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몇 분이 흐른 뒤, 마티어스의 말 한마디에 심복들이 모였다.


“시엔이 이 가문에 물들어가고 있더군.”

“예, 마티어스 님.”

“내 딸이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는 의문스러운 눈빛을 하고 덧붙였다.


“다섯 살 아이들은 원래…… 이런 건지, 제대로 알아 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열 명이 넘는 부하들이 부복했다.

험상궂은 인상을 한 자들 열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자, 그 모습은 과연 장관이 따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티어스는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권태롭게 중얼거렸다.


“일어나. 그리고 내 딸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놈이 있다면…….”

그들은 시엔의 주변에 있는 사악하고 삿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산채로 내 눈앞에 끌고 와. 그리고……. 델피아 미르모드.”

마티어스도 몇 번 받지 못한, 시엔의 편지를 받아 본 인물.

마티어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감히 그 누추한 자가 귀한 내 딸의 편지를 받다니, 같은 복합적인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스산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마티어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자가 시엔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던데.”

얼마 전, 마티어스는 델피아 영지의 요충지를 공격했다. 델피아가 꽤나 공력이 높은 상대인 만큼 고전하리라 예상하면서. 그러나 델피아 미르모드는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졌다.

마치 마티어스의 손에 무너지기로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예견되었으나, 찜찜한 승리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걔도 산 채로 잡아 와.”

……조만간 델피아와 대담을 해 봐야겠다.

아무래도 델피아 역시, 시엔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게 확실해 보이는 요주의 인물이었으니까.

감히 시엔에게 고블린을 선물하기까지 했으니, 해악, 그 자체였다.

***

한편, 다음 날 아침.

신전 안.

어제 다과회에서 돌아온 직후 곧장 잠에 빠졌던 테드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성기사들을 위한 공식적인 수련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연무장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자리에 모인 몇 되지 않는 성기사들이 자꾸 테드를 힐끔거렸던 것이다.

게다가 얼굴에 잔뜩 홍조가 올라 있었다.

요약하자면 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수련을 하는 게 먼저였다.

모든 대련을 마무리한 테드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자, 한데 모여 있던 성기사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테드를 향해 다가왔다.


“어이, 테드!”

“축하하네!”

“무슨…….”

갑작스럽게 축하를 듣는 것이나.


“자네 동생이 참 대단하더군!”

“예?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동생 칭찬까지.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드러내 놓고 다닐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테드를 보며 성기사들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엥? 테드, 자네 몰랐나?”

“자네 동생, 신전에 어제 왔었잖아!”

“정말이지,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던데!”

드디어 테드에게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이 하얘진 걸 본 신관이 고개를 갸웃했을 때, 테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시드가, 신전에 왔었습니까?”

테드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다른 성기사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설마 자네 못 들었던 겐가?”

“예, 그날 다과회에 가 있느라…….”

“다과회라니…… 아아, 가브리엘레 신녀님이랑?”

“예.”

성기사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미르모드 가문에서 자네에게 꼭 남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던데, 왜 그걸 무시하고 다과회에 갔나 했더니.”

“그거 꼭 가지 않아도 되는 다과회인데…… 가브리엘레 신녀님이 특별히 부탁하신 모양이지?”

“그래도 동생이 왔는데 다과회보다는 신전에 있지 그랬나.”

가브리엘레는 그에게 애시드에 관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제 내내 다과회에서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

슬슬 퍼즐이 맞춰져 가고 있었다.

테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

성기사로서 살면서 그는 감각이 제법 예민한 편이었다. 타인의 선의나 적의 등은 모두 감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고작 열 살 남짓인 가브리엘레가 이 정도로 영악하게 굴 줄은.

소중한 남동생인 애시드가 겨우 용기를 내어 자신을 만나러 왔는데도 만나지 못하게 될 줄은…….


“어이, 테드, 테드!”

“어디 가나, 저 친구!”

테드는 성기사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레 신녀를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

가브리엘레는 자신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테드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하는 눈치였다.


“아, 테드. 무슨 일이죠?”

“……신녀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테드를 향해 말갛게 웃어 보였다.

평소였다면 사랑스러워 보였을 그 미소가, 테드에게는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녀님, 어제 제 동생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나요?”

단도직입적인 테드의 말에 가브리엘레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아, 그래요. 애시드랬나.”

“……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동생보다는 나를 호위하는 일이 중하죠. 물론 그 동생이…….”

가브리엘레의 입가에 어쩔 수 없이 탐욕 어린 미소가 번졌다.


“꽤나 엄청난 인재라는 것도 들었어요.”

“…….”

“그 아이, 테드와 함께 나를 보필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가브리엘레를 향한 테드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도, 가브리엘레는 테드가 분노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저 테드가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한 척하는 낯으로 테드를 응시할 뿐.

이제는 지적해야 할 차례였다.

가브리엘레 신녀, 당신의 그 태도는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이제 신전을 나가 시엔을 모실 때임을 천명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요, 테드? 애시드와 함께, 날 지키는 것에 대해서.”

테드와 애시드를 만나지 못하게끔 조정한 어린 소녀가 내뱉기에는 상당히 가증스러운 말이었다.

가브리엘레의 한마디로 인해 테드와 애시드의 관계는 다시 한번 평행선을 그었다.

상처받았을 제 남동생이 용기를 내어 찾아 왔는데, 자신이 바람을 맞힌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애시드에게 힐러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로 이렇게 태세 전환을 한다고?

어린 소녀가, 어떻게 이렇게 무정하고 영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테드는 순간적으로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으득,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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