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애시드가 그렇게 대단한 인재였다니 (37/77)


37화. 애시드가 그렇게 대단한 인재였다니
2023.04.07.


당혹한 신관이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신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애시드의 손을 타고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은 심지어 규모가 지나치게 거대했다. 보통 신성력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은 제 몸을 가득 채울 정도의 빛을 뿜어낸다.

그런데 애시드가 만들어 내는 빛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거대해서 이 방 전체를 채울 것만 같았다.


‘푸른 빛도, 이런 규모의 빛도 처, 처음 봐…….’

교황의 신성력을 감별해 본 적은 없었지만, 교황의 신성력이 이만큼이나 클까 싶을 정도였다.

신관은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저 정도로 선명한 푸른 빛은, 힐러의 빛이라고 들었다.

물론 힐러를 단 한 명도 본 적 없었지만.

힐러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치유하고 죽기 직전의 사람까지 구출하는 힘을 지닌 희귀한 능력자로, 신관도 교과서에서만 봐 왔다.


“문제가 있나요?”

그 강력한 힘을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빡이는 애시드를 보면서, 신관이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무, 문제는…….”

 

 
이 와중에도 빛은 점점 강력해져서, 문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준이 되었다. 마치 이 비좁은 검사실은 애시드의 힘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듯이.

순간 말을 잇지 못한 신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미르모드 가문에서 온 이 소년은…….

전 제국을 통틀어 열 명도 안 될 귀중한 존재인 힐러였다.


“저…… 능력, 있는 거 맞나요?”

저렇게 온순하고 다정하게 말하는 소년이, 제국의 귀한 인재라니.


“그, 그래…….”

얼떨떨한 표정의 신관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문 바깥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관과 미르모드 가문 사람 간의 말다툼인 듯했다.


“여기 안에서 이상한 빛이 막 흘러나오고 있어! 위, 위험하면 어떠케?”

“글쎄, 오해-.”

“걱정대…….”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아니. 내 딸이 들어가고 싶다고 하니, 들여보내지.”

탁-!

검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미르모드 가문에서도 최고 악당으로 유명한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검사실의 문을 연 것이다.

당연히 검사 중간에 검사실에 들어서는 건 불법이지만, 마티어스는 그딴 건 상관도 없는 눈치였다.

신관은 소년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와락 움켜쥔 듯한, 볼살이 통통한 다섯 살짜리 꼬맹이, 시엔 미르모드를 볼 수 있었다.

시엔은 빠르게 애시드 쪽으로 달려 나왔다.


“이 푸른 빛은 모지? 갠차나?”

내내 주눅 든 듯 어깨가 축 늘어져 있던 애시드의 표정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네, 네……! 저, 저 능력 있대요!”

그것도 마치 제 삶의 빛을 본 것처럼, 아주 화사하고 달콤하게.

그리고 소년은 제가 쥐고 있던 로사리오 따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제 신성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는, 오직 시엔만이 가치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애시드는 묵묵하게 델피아의 손목을 잡았다. 애시드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느끼면서, 델피아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윽, 신성력. 기분 나빠.”

하긴, 델피아는 신성력과 상극이었지.

다행히 힐러는 사기적인 능력의 소유자여서, 몸 자체가 신성력과 상성이 맞지 않는 인간도 쉽게 치유해 줄 수 있었다. 지금의 델피아처럼 살짝 불쾌한 감각이야 느끼겠지만.

나는 주사 맞기 싫어하는 어린이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델피아를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대. 참아야 대.”

델피아의 눈이 내 쪽에 고정되었다. 나의 깜빡이는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가 한쪽 눈을 윙크하듯이 찡긋했다.


“우리 주인님이 원한다면야, 참을게.”

왠지 델피아랑 지독하게 엮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 주인님이라는 호칭이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저 나를 향한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를 볼 때면, 왠지 호기심 많은 은색 여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애시드는 묵묵하게 제 신성력을 사용했다. 애시드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고, 델피아의 보랏빛 입술이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갔다.

몇 분 뒤, 애시드가 나직하게 선언했다.


“이제 정화되었습니다. 독이 맞았던 것 같아요.”

애시드가 신기하다는 듯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생각을 했을 뿐인데도 힐링 능력이 발휘된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도 참 신기했다.

어제도 거의 복어처럼 볼을 부풀릴 정도로 놀랐지만…….

애시드가 그 드문 힐러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많이 배우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신성력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인재라는 건 또 뜻밖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신기한 점.


‘진짜 위험한 독이었나 봐, 역시 미르모드, 악당 가문다워!’

제 혈족에게 독을 쓸 정도라니, 역시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곳다웠다.

그런데 델피아를 치료해 주고 난 다음, 나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서 손을 써 준 것처럼, 델피아도 할머니에게 복수하려고 가서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

나는 옥수수 같은 이를 앙다물고 델피아를 응시했다.


“아까 내가 잘몬 말해써. 도, 독은 그런데 사실, 함미가 넣은 거 아냐.”

나를 위해서 열심히 힘을 내 주는, 할머니를 보호해야 한다.


“응? 그럼 누가 넣었는데?”

델피아가 알 것 같다는 듯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내, 내가 넣어써. 그러니까 함미는 아무 잘못 업써!”

……앞에 살짝 말이 떨리게 나왔다.

내 말에 델피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미묘하게 웃음을 참는 듯, 참지 않는 낯을 한 채로 그녀가 입가를 가렸다.


“너 정말…….”

“……?”

“그래, 그럼 네가 병 주고 약 준 거네. 너무 귀엽잖아?”

“……머?”

“이 정도로 비겁한 술수를 부린다니, 진짜 나를 넘어설 수도 있겠어.”

비겁한 술수라는 말은 악당답다는 뜻이니 분명 칭찬이었다.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표정을 살피던 델피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이제 너한테 내 힘까지 주고, 마음도 줬어.”

“웅? 마음은 안 받았는데?”

내 말에 델피아가 눈물을 쏙 빼면서 웃었다.


“그럼……. 주인님, 나랑 친구도 할래? 어른이랑 아기는 친구 못 해?”

“웅? 그건 아니지만…….”

내가 눈을 데굴 굴리자 델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선물 더 주면 친구도 해 줄래?”

“……움, 선물?”

“웅.”

“음…… 기다려.”

델피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내 볼 쪽으로 살짝 다가오는 손길을 보며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런데 진짜, 볼 한 번만 꼬집어 보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선물 조은 거 주면.”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델피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았어, 그럼 내일부터 줄게.”

“웅? 내일부터?”

“무슨 선물을 줄지는, 기대해도 좋아.”

뭔지 모르겠지만, 델피아에 대한 내면의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위협적인 사람에서,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그렇지만……!


“웅! 기대하께!”

……선물은 좋은 거니까!


“이상한 건 안 대……!”

“당연하죠, 아기 주인님.”

델피아가 다정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

시엔에게 제 목줄을 가볍게 넘긴 다음, 델피아는 곧장 루켈라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문을 막을 줄 알았더니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응접실 문을 개방해 놓는 대담함에는 혀를 내둘렀다.

평온한 낯으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공작 부인 쪽으로 다가간 델피아가 그녀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제 찻잔에 독을 타셨더군요.”

예법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델피아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공작 부인 역시 사소한 예법은 신경 쓰지 않는 낯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둘이 티 파티를 한다기에.”

“흠…….”

“네가 아기를 죽이려 드는 건 참기 어려울 것 같더구나.”

“……시엔 대신 제가 죽는 게 낫다, 이거군요.”

“그래.”

순순한 인정이었다.

역시 피를 제 손에 자주 묻혔던 마법사다웠다. 하지만 델피아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공작 부인께 감사할 날이 오네요?”

공작 부인은 델피아의 미친 사고방식이 언제나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특이했다.

제 찻잔에 독을 탔는데 감사라니.

델피아 미르모드에게는 당연히 직구로 물어보는 것이 답을 얻기에 좋다고 여긴 공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의미지?”

“저 걔가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델피아는 픽 웃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빛이 루켈라 공작 부인 쪽에 선명하게 꽂혔다.


“이제 제 주인님이고, 목줄 잡혔어요.”

목줄을 잡혔다기에는 지나치게 날것의 낯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피아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평소 언제나 장난스럽고, 흥미 본위로 살아갔던 그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던 탓이다.


“주인님?”

“네, 아기 주인님. 내 마나 구슬을 만들어서 시엔에게 줬거든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포장했지만 마나 구슬을 줬다는 건 결코 이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루켈라 공작 부인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생각보다도 더…… 진심인가 보군.”

“그럼요.”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공작 부인의 눈매가 상대방을 평가하듯 가늘어진 순간.

델피아가 그녀를 응시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꿀빵이보다는 글쎄, 주인님이 더 매력적인 애칭 아닌가 싶은데.”

루켈라 공작 부인의 저택에, 최근 들어 두 번째 방문한 차. 델피아는 드디어 꿀빵이라는 애칭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 저택에 들어선 순간조차도 시녀들이 숙덕거리고 있었으니까.


‘꿀빵 님 얼른 보고 싶어.’

‘연차 내고, 서쪽 저택으로 갈 수 없나?’

‘연차는 무슨……. 꿀빵 님이 오시면 드릴 사탕도 준비해 놨으니까, 어서 오셨으면…….’

현 상황을 볼 때 꿀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지금까지 내내 평온해 보였던 루켈라 공작 부인의 낯에 미미한 불쾌감이 드러났다.


“우리 꿀빵이는 이 할미와 꿀빵이라는 말을 더 좋아할 거다.”

“글쎄, 주인님이라는 애칭이 더 귀엽지 않나요?”

둘의 눈빛이 중앙에서 마주쳤다.

빙글빙글 웃는 델피아와, 차갑고 냉정하게 상황을 응시하는 루켈라 공작 부인.

놀랍게도 후계 쟁탈전 급의 불꽃이 타오르는 수준이었다.

시엔이 모르는 사이, 시엔 쟁탈전이 뜨겁게 시작된 것이다.

***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델피아 언니가 돌아가고 난 다음, 아빠는 ‘티 파티장 안에 설치한 장치가 폭발하지 않아서 다행이야.’라고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 호구 아저씨들을 불러다가 귀여운 장난감 폭탄 같은 걸 구해서 설치해 둔 모양이었다.

치카치카 양치를 하고 어푸어푸 세수를 한 다음, 나는 시녀 언니들이랑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델피아의 인장이 겉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차가 오고 있었다.


“델피아 미르모드 님이 보낸 폭탄이군요.”

“바로 제거하겠습니다.”

온몸의 관절을 꺾는 듯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슬슬 몸을 풀어 보실까.”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냐하면 저기 멀리 보이는 형체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