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나는 나대로 사람들을 구할 거야 (39/77)


39화. 나는 나대로 사람들을 구할 거야
2023.04.14.



 
테드의 대답을 기다리던 가브리엘레 역시 다소 당황했다. 그녀로서는 테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애시드와 함께, 자신을 보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마주한 서슬 퍼런 낯은 맹세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가브리엘레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만 달싹였을 때였다. 테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알고 있었다면, 왜 그날 다과회에 굳이 저를 지명해 데려가시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계셨던 겁니까. 저와 애시드의 만남을 막으려고요?”

순간 의표를 찔렸다.

가브리엘레는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난 별로……. 그, 애시드라는 꼬마가 중요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힐러라는 걸 알았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아무튼 그래. 내 다과회에서 날 호위하는 게 더 중요하잖아, 안 그래요?”

우물쭈물 중얼거리는 가브리엘레를 보며 테드는 안면을 더욱 싸늘하게 굳혔다.

저 신녀의 추악한 면면이, 점점 더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애시드가 힐러이든 아니든, 제 소중한 동생입니다.”

“거렁뱅이여도 말인가요?”

“예.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가브리엘레의 표정에 뾰족한 분노가 어렸다.


“나, 나보다 더?”

이 이상으로 가브리엘레에게 할애할 시간이 아까웠다.

테드의 시선이 살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것을 굳이 제 입으로 말해야 합니까?”

“그건…….”

“저는 단 한 번도, 가브리엘레 님, 당신을 제가 모시는 주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린 소녀라고 생각해 보아 넘겨 주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완벽히 마음의 문을 닫았다.

가브리엘레가 충격에 빠진 낯으로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나한테……!”

“진심입니다. 정말 당신이 저를 기사로 생각했다면, 이기적으로 굴지 마셨어야지요.”

가브리엘레를 바라보는 순간, 테드의 머릿속에 시엔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애시드를 찾아 주고,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주었는데도. 자신에게 선택권을 넘겼던 그 현명한 어린아이의 얼굴이.

그리고…….

테드는 시엔을 섬기기로 마음먹었던 결심 그대로 말을 꺼냈다.


“저는 이제 신전을 나갈 겁니다.”

“그런……!”

가브리엘레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낯빛을 새하얗게 굳혔다.


“신전을 나가서, 애시드와 합류할 겁니다.”

“테드!”

가브리엘레가 발악처럼 소리쳤다.


“이렇게 가면, 나 다시는 당신 안 봐!”

그녀의 말에 테드는 차게 웃었다.


“그거야말로 영광이군요.”

쾅.

문이 소리 나게 닫혔다.

완벽한 단절이었다.

***

테드가 차갑게 식은 표정을 하고 떠난 뒤. 가브리엘레는 자리에 혼자 남았다.

그녀는 손톱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다가 문득 멈칫했다.

이렇게 나약해져서는 안 되었다.

자신을 키워 주었던 거리의 여인, 강인한 멜로디아처럼…….

그녀는 몰락 귀족가의 셋째 영애였던, 하찮은 가브리엘레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러면서 네게는 신성력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세노아 신전으로 가요, 가브리엘레.’

‘네……?’

‘신전의 사람들을 손에 넣도록 해요. 미래의 성녀답게.’

‘미, 미래의 성녀?’

그 순간 열등감에 똘똘 뭉쳐 있던 가브리엘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화려한 데뷔탕트.

온갖 화려한 마차들.

우아한 귀족가의 기사들과,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제국에서, 성녀가 된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요. 사교계의 꽃 자리도 남 일이 아니죠.’

멜로디아는 세노아 신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세노아 신전을 지배하다 보면 세상이 가브리엘레를 부를 거라고 말했다. 모든 세상이 가브리엘레를 위해 안배되어 있다면서.

곧 멜로디아는 성녀가 될 것이고, 가브리엘레는 그런 그녀의 뒤를 이어 다음 대 성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가브리엘레는 멜로디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테드의 마음을 사야 해요. 사랑스러운 소녀처럼 굴어야 해요.’

‘네에…….’

‘성기사는 절대로 물리적으로 굴복시키려 들면 안 돼요. 마음을 열어야 진짜 실력이 발휘되는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성기사의 마음은 시엔 미르모드, 그 망할 꼬맹이에게 열릴 예정이었다.

멜로디아가 반드시 손에 넣으라고 했던 테드는 신전을 떠날 예정이었다.

교황청의 방침상 환속 절차를 밟는 성기사는 숙려 기간을 가진대도 몸은 곧장 신전을 떠날 수가 있을 터.

수를 써서 강제로 붙잡아 놓는다 한들, ‘마음을 열어야 진짜 실력이 발휘되는 존재’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분명 성녀가 되기까지 탄탄대로일 거라 여겼는데.


‘……이건 말도 안 돼.’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브리엘레의 머릿속에 멜로디아의 말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불러요. 내가 구원해 줄게요.’

멜로디아가 새하얗게 웃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교황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었지만, 편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멜로디아 님이 틀렸을 리가 없다.

자신은 아주 소중한 신의 딸이었다.

그 시엔이라는 멍청하고 우둔한 아이와 다르게.

그 아이는 운이 좋을 뿐이지만, 가브리엘레 자신은 세상을 개척해 나갈 셈이었다.

마침내, 가브리엘레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그날 점심을 먹고 나서, 나는 하품을 했다.

내가 원작 속 내용을 파괴해 나가고 있으니까, 이제 슬슬 <멜로디아의 생애> 타임라인을 다시 정리해 볼 때도 되었다.

많이 바뀌지 않았다면, <멜로디아의 생애> 속, 멜로디아는 지금 성녀가 되기 위한 세를 불려 나가는 중일 것이다.

그녀의 세력은 점점 교황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황태자와 사랑에 빠진 다음, 그와 손을 잡고 미르모드 가문을 몰살시켰지.


‘이런 걸 보면, 멜로디아 성녀가 꼭 좋은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내가 너무 미르모드 가문 사람들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내용이지만, 악당 미르모드 가문의 악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편이었다. 미르모드 가문은 반드시 망해야만 하고, 멜로디아가 행한 악당 가문 학살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지만 분명 이 가문에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텐데, 예를 들면 우리 아빠나, 근육 시녀 언니들 같은 경우는…… 그래도 착하잖아. 굳이 몰살시킬 것까지는 없잖아.’

내가 피해자 입장에 이입을 해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멜로디아의 행동이 선하다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나는 원작대로 안 살아. 그냥 나대로 내 사람들을 구할 거야.’

나는 포옥, 한숨을 내쉬며 멜로디아의 행적에 대해 꼽아 보았다.

지금은 제국 바깥, 동대륙으로 나가 교황과 함께 신전의 선행을 알리면서 동대륙의 귀한 인재와 마도구를 쓸어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그 인재 가운데에는 타인의 힘을 빼앗는 자도 있었다.

만약 멜로디아와 대적하게 된다면, 타인의 힘을 빼앗는 그 자가 큰 변수가 될 것이다.


‘나중에 테드가 오면, 신전이나 성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그들의 전력에 대해서도.’

바보 아빠가 미르모드 가문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정된 만큼 원작 속 주인공을 대하는 데에도 신중해야 했다.

추후 그들을 마주할 때를 대비해 계획도 철저하게 세워야 할 것이고 말이다.


‘일단 지금은 낮잠부터 자고…….’

나는 피로한 머리를 꾸욱 움켜쥐고 포스스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생각이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하고야 만다.

오늘도 비슷했다. 특히, 자꾸만 꾸벅꾸벅 졸게 되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근육 시녀 언니들이 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들어왔다.


“시엔 님!”

“나 자 껀데에…….”

잠이 와서 말투는 더욱 어눌해지고, 말꼬리가 더욱 흐려졌다. 정말 중요한 소식이 아니면 오늘은 누워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내 말랑말랑한 손을 백설기를 쥐듯이 터업, 움켜쥔 시녀가 말했다.


“성기사 테드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뭐어?”

테드라는 말에 번뜩 눈이 떠졌다.

이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신체 능력도 간섭하지 못하는 초인의 영역이었다.

***

같은 시각, 애시드 역시도 테드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형을 만나러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던 애시드는 시녀들의 수군거림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형을 만나면서 시엔을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제 행동 원리에 대해서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어미 새를 본 아기 새처럼 시엔을 따르고 있었다.


‘……형하고는 데면데면하게 굴면 돼.’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지 못해서일까. 자신을 찾지 않은 형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형이 자신을 버렸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막 조우했을 때, 형의 절박한 표정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신성력 검사를 했던 그날도 형은 없었고…….’

복잡한 심경을 한 채로 층계참을 내려온 애시드는 마침내 시엔과 형이 있다는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응접실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앞을 지키던 근육질의 시녀들이 애시드에게 턱짓을 하며 입 모양으로 소곤거렸다.

‘어이 꼬마, 어서 들어가 봐.’라며.

그들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용기를 얻은 애시드가 문을 빼꼼히 열었을 때였다.

그는 다소 묘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형, 테드는 기사답게 경건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누군가의 손등을 잡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게 우아한 레이디가 아니라 아주 조그만 솜사탕 같은 소녀인지라,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성기사의 의복을 입고 있어서일까.

형의 맹세는 몹시 경건해 보였다.

그리고 테드의 입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엔 님께 지금 당장 기사의 맹세를 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형인데.

밉지만, 서서히 마음이 풀리고 있었는데…….

형이 시엔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겠다고 하는 순간 마음이 얼어 버릴 것 같았다.


‘형이 시엔에게 기사의 맹세를…….’

기사의 맹세라니.

모든 기사는 살면서 단 한 명의 레이디를 갖는다.

형, 테드의 레이디가 바로 시엔이 된다는 건……. 시엔을 지켜 줄 사람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시엔은, 자신이 지켜 주고 싶었는데.

문간에 서 있던 애시드는 가만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직 어른이 못 된 데다 힐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신과 다르게……. 형은 완벽한 어른이었고, 시엔에게 맹세도 할 수 있는 위치다.

시엔에게는 좋은 일일 텐데. 조그만 소녀가 사악한 마티어스 미르모드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 축하해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시엔은 자신이 아니어도 지켜 줄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며 오는 건 왜일까?

바로 그때였다.

오늘도, 문간에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시엔이 먼저 발견해 주었다.


“어어? 아기야?”

그리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환대하면서, 활짝 웃었다.


“여기루 와!”

애시드는 아까 멈춰 섰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시엔의 명령을 따랐다. 그때까지도 테드는 여전히 시엔의 손등을 잡고 있었다.

이제 곧 맹세를 하겠다는 듯이,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저, 저도.”

그 모습을 본 애시드의 눈빛에 뜨끈한 불꽃이 어렸다.


“저도 하고 싶어요.”

무려 말도 더듬지 않았다.

시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웅? 뭘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다는 건데, 라는 표정이었다.

애시드가 내면의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저도 충성의 맹세, 하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