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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나쁜 짓 하면 다 죽여 버리겠어! (21/77)


21화. 나쁜 짓 하면 다 죽여 버리겠어!
2023.02.10.


그놈들은 우리 아빠 장기도 털어먹을 아주 무서운 놈들 같았다.

사냥 대회에서 직접 아빠 측근들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결심한 이상 편히 있을 수 없었다. 본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아빠는 평소처럼 별생각이 없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소풍 같다’고 말할 뿐이었다.


‘저런 순수함이 우리 아빠의 매력이지, 그럼.’

나는 잔뜩 가시를 세우고, 아빠는 태평하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 마차는 빠르게 달려 사냥 대회장에 달린 작은 별장에 도착했다.

우리 아빠의 소유인 별장에서 간단하게 사냥 대회 축사를 하고, 사냥을 해서 나온 만찬을 즐길 거라고 했다.

별장 안의 방으로 나를 데려다준 아빠가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딸, 푹 쉬다 나와.”

“웅!”

“나중에 사냥하는 거 보여 줄게.”

난 아빠를 보며 손을 몇 번 흔들어 주었다.


“샤워를 도와드릴까요? 아직 사냥 대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샤워를 할 시간은 없었다.

별장 안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의 소파에 앉아 열심히 짱구를 굴려야 했다.


‘오늘은 아빠 측근들의 정체를 밝히고, 내일은 성기사도 꼬셔야……. 아이고, 머리 아파.’

악셀이 공작가에 오기까지, 이제 딱 한 달이 남았다.

주머니를 달그락거리며 할머니가 준 생존 무기들을 떠올리다 보니, 아기 주제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한숨을 폭, 내쉬는 걸 본 시녀 언니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내 한숨 한 번에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내게 충성심을 쏟고 있는 상태였다.


“시엔 님, 머리가 복잡하신가요?”

“역시 이곳엔 케이크가 없어서……!”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갠차나!”

나를 대견하다는 듯이 보던 시녀 언니들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이따가 간단하게 요기도 하실 거고, 사냥 대회가 끝나면 엄청난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사냥 대회가 참 기대됩니다. 엄청난 걸 준비했다던데…….”

“엄청난…… 거?”

“네! 아까 그 사람들끼리 쑥덕대는 걸 들었어요.”

분명 그들에게 수상쩍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녀 언니들이 속닥거리며 전달해 준 말 덕분에 내 의심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안 되겠다. 혹시 모르니 내 한 몸 제대로 지키리.’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머니를 뒤졌다.

커다란 복주머니 모양의 폭탄 아티팩트를 드레스 하단에 쏙 넣어 둔 후, 할머니가 건네준 안전장치와 공격형 아티팩트를 몸에 바리바리 매달았다.

내 머리에 있는 파란색 실핀은 내 주변에 커다란 안전 결계를 칠 수 있는 생존형 아티팩트였고, 내 팔목에 걸린 시계는 녹화 도구, 발목에 있는 발찌는…….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지금 내 몸은 거의 무기 수준이었다.


‘일명 템빨이라고 하지.’

시녀 언니들이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급격히 자신감을 얻은 나는 소악마처럼 웃어 보였다.


‘제법 괜찮을 거 같아!’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별장의 열린 창틈으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아?”

내가 묻자 시녀 언니들도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나는 창가를 응시하며 으스스하게 몸을 떨었다. 분명, 창가 쪽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

한창 사냥 대회가 거행되고 있을 때, 뒤늦게 마티어스가 미르모드의 소공작이 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델피아 공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악셀처럼 전투를 치르는 건 아니었지만 공작가의 변방에서 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게다가 대공녀로서 임무를 부여받아 변방을 따분하게 시찰해야 했다. 당장 몸을 운신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소리였다.


“아, 이 내가 이 변방 구석에 처박혀 있는 동안.”

“히익.”

“……가문의 후계자가 결정됐다, 이거지?”

새하얀 백발의 머리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와 꼭 닮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의 성격은 괴팍스럽고 깐깐했다.


“어이가 없네.”

델피아 대공녀는 새하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잇새로 욕설을 지껄였다.

그래, 사실 미르모드의 후계 자리가 당연히 제 것이 될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추방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마티어스 대공자가 후계자 자리에 등극했다는 사실에 심성이 꼬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전갈을 가져온 측근을 향해 간명하게 말했다.


“이제 악셀, 마티어스, 그리고 나의 삼파전이 되었어. 맞지?”

“하! 마티어스 대공자가 암만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지만, 허울뿐인 자리일 겁니다. 추방자 주제에 선점했다고 좋아라하는 꼴이 참 우습군요. 공작 위는 델피아 님의 것인데……!”

“시끄럽고.”

델피아는 격분한 측근의 어깨가 추욱 늘어지는 걸 보았다.

아무래도 여긴 마음에 드는 것들이 없단 말이야.

당장 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그곳에는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델피아가 한쪽 다리를 꼬며 날카롭게 물었다.


“마티어스가 제일 아끼는 게 뭘까.”

“……그…….”

델피아가 눈썹을 찡긋하자 측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린 딸이 아닐까요? 마티어스가 이번에 딸을 데려왔다고 하는데요.”

“아, 맞아.”

델피아는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대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던 측근이 마른침을 삼켰다. 델피아가 저런 식으로 나올 때는 결코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붉은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물었다.


“지금 마티어스는 뭘 하고 있지?”

“사냥 대회를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최측근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인 듯합니다. 딸도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흐음…….”

사냥 대회를 떠나는 건 제힘을 과시하기 위해,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델피아 대공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작을 심어서 마티어스의 측근이 누군지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솔직히, 남들이 축제를 벌이는 걸 보면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자, 납치해 오자.”

“누굴…….”

“마티어스의 딸 말이야.”

그들의 표정이 음험하게 변했다.

***

나는 시녀 언니들과 함께 빼꼼,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에는 아빠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뭐, 뭐야. 저 아저씨들 왜 여기서 모여서 얘기하고 있어?’

이상했다.

커다랗고 산적 같은 덩치의 한 사람을 둘러싸고, 여러 아저씨들이 모여서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가운데는 아까 봤던 머리에 리본 꽂은 아저씨인데, 설마 집단 린치를 당하는 건가?’

그 아저씨는 손에 이상한 꽃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항변하고 있었다.

보라색 꽃잎에 샛노란 수술……까진 괜찮은데, 흡사 전생에서 보았던 TV 만화, 포켓X스터에 나오는 루주라의 입술같이 생긴 괴상한 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을 내뿜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파리지옥, 뭐 그런 느낌?

나는 내 시력이 너무 좋은 걸 탓하면서 헙, 놀랐다.


‘왜 내 창문 밑에서 저러고들 있지? 설마 나한테 저걸 주려는 건가?’

그런 내 옆에서 시녀 언니들이 기겁을 하며 속삭였다.


“저 꽃을 시엔 님에게 주려나 봐요.”

“참 예쁜 꽃이군요.”

도대체 어디가 예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날 독살하려는 거 아니야?’

그러나 열린 창틈으로 우리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새어 나간 것일까. 바깥에 모여 있던 아저씨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할머니가 준 마도구를 통해 축지법을 습득한 나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그들은 자리를 파하면서, 내가 있는 창가 쪽을 음험한 시선으로 수상하게 힐끔거렸다.


‘저 아저씨들, 도대체 내 방 창문 밑에서 뭘 하려던 거지? 실력자 같은데, 진짜 의심스러워.’

나는 곧 있을 사냥 대회를 기약하며 온몸에 있는 아티팩트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무차별 공격형 표주박 아티팩트, 장착 완료.

과잉 수비형 귀걸이 아티팩트, 장착 완료.

인간 분해형 목걸이 아티팩트, 장착 완료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사냥 대회까지 몇 시간 남아써?”

“금방입니다, 시엔 님!”

사냥 대회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넘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은 아빠 측근들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바로 이 아티팩트로 말이지.’

나는 아티팩트를 부리부리하게 쏘아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드디어 몸과 마음까지, 만반의 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

나는 비장하게 아빠의 손을 잡고 사냥 대회장에 도착했다.


‘여기가 사냥 대회가 열리는 로체른 숲.’

사냥 대회가 열리는 로체른 숲은 아주 큰 숲이었다. 왕복한다면, 내 걸음으로 꼬박 두 시간 정도가 걸리는 수준이었다.


‘드디어 사냥 대회가 시작되는구나. 그 사람들의 실력을 확인해 볼 수 있겠어!’

“시엔, 여기 너무 높지?”

내가 말없이 긴장해서 주변을 살피자 아빠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물었다. 목소리에 우려가 가득한 것이 높은 곳에서 남들을 내려다보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가 앉은 커다란 단상 바로 아래를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안니. 나한테 딱이야.”

나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나를 빤히 보던 아빠가 이내 멋쩍게 웃었다.

단상 주변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연약한 아빠와 강력한 나를 잘 지키고 있었다.


‘앗, 처음 보는 귀족들이다. 이 근처 영지 사람들인가?’

단상 아래 마련된 야외 내빈석에는 백작가의 가신인 듯한 중년 아저씨들과, 제법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빈석 바로 앞에는 흉흉한 기세로 히힝 대는 무섭게 생긴 말들이 있었다.

내 시선이 절로 그 말을 타고 있는 자들을 향했다.

흉악범 혹은 탈옥수 무리처럼 보이는 요주의 인물들!

바로 아빠의 최측근들이었다.


‘저 사람들, 오늘 사자나 곰을 때려잡아 올지도 몰라. 그래도 무서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말자. 난 머지않아 대악당이 될 시엔이니까.’

아자아자, 파이팅!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운 나는 슬쩍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나는 슬쩍 아빠의 옷깃을 쥐며 말했다.


“아빠.”

“응, 시엔?”

“나도 사냥 대회 참…….”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보채지 않고 새초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됐으니까.

내 나이 고작 다섯.

난 어린 꼬마 애였기 때문에 사냥 대회에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어차피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게 주목적은 아니었다.

아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만찬 전에 풀밭에서 노는 시간을 줄게. 재밌겠지?”

제법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는 건 역시 아빠뿐이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한 번 커다랗게 끄덕였다.


‘그럼 사냥 대회 시간 동안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따가 저기 먼 풀밭 위로 가서 폭탄 아티팩트를 터트려 봐야겠어.’

오늘은 아빠의 측근들이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자칭 측근들이 흉심을 품고 있다고 한들, 그들이 아빠를 쉬이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도 삐죽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말해 아빠의 측근을 자칭한 이들이 아빠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그들이 아빠를 무시할 수 없도록 같은 편인 딸의 무시무시한 위엄을 보여 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폭탄 아티팩트가 터지는 모습을 보면, 다들 놀라기는 할 거야. 굉장히 위험한 아티팩트고, 할머니가 조심해서 사용하라고 했으니까.’

모든 계획을 세운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아빠와 나의 대화가 끝나자, 단상 바로 아래에 있던 눈치 빠른 병사들이 일제히 커다란 축포를 터트렸다.

펑!

축포는 바로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호와 함께 아빠가 평소의 선량한 표정으로 측근들을 한차례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저씨들이 어쩐지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출발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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