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작고 귀여운 동물을 바치겠습니다, 시엔 님
(22/77)
22화. 작고 귀여운 동물을 바치겠습니다, 시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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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작고 귀여운 동물을 바치겠습니다, 시엔 님
2023.02.14.
내 눈앞에 흑마를 탄 흉측한 사내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와, 기세가 진짜 무서워.’
이 미터 육박, 백 킬로그램 초과, 우는 애도 눈물 뚝 그치게 할 것 같은 공포의 악당들이 떼로 출격하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골 마을에서 빵 구울 때도, 아빠는 날벌레도 생명이라며 가엾다고 말했었다. 그 탓에 내가 잠복하면서 벌레들을 파리채로 때려잡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출전하기 전에 의장을 점검하는 아빠를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아빠가 토끼 한 마리라도 잡아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만약에 아빠가 토끼 한 마리 못 잡아 와도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줘야지.’
속상해할지도 모르니까.
“시엔, 아빠도 다녀올게.”
“웅, 무사히 다녀와!”
“조심히 있어야 해. 사고 치면 안 돼.”
하여튼, 아빠는 내가 납치라도 당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소처럼 순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던 아빠는 이내 커다란 칼을 허리 옆에 차고 단상 아래로 저벅저벅 내려갔다.
아빠가 내려가는 걸 보던 레이디들이 손에 있는 손수건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사냥 대회에는 참가자들의 무운을 비는 전통이 있었다. 출전하는 기사의 검에 손수건을 달아 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을 안 해 줘서 미리 못 챙겼는데!’
온갖 아티팩트를 장착한 나는 대악당이 오지 않는 이상 다칠 일이 없다. 그렇지만 척 보기에도 무방비한 아빠는 어떨지 모르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급하게 드레스의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약식 드레스여서인지 주머니 안에 여벌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아, 이거 내 턱받침 손수건인데…….’
내빈석에 앉아 있던 레이디들이 아빠에게 손수건을 건네려는 듯 조심스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한 번, 아빠를 닮아 순둥하게 생긴 새하얀 말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줘야지!’
나는 레이디들을 제치고 총알처럼 빠르게 튀어 나갔다.
“아빠!”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아빠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갈라졌다. 조금 머쓱해진 나는 총총 걸어가서, 아빠의 말 바로 앞에 섰다. 그다음엔……!
“이거 받아!”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에 잔뜩 홍조를 띠고 아빠에게 하얀 턱받침을 건네주었다. 말 위에 타 있던 아빠는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내 턱받침 손수건을 받아 들고 검에 매달았다.
‘너무 초라한가?’
레이디들은 자수도 새긴 것 같던데.
“아빠, 다른 분들 손수건 둘둘 둘러도 대!”
멋진 검에 달랑달랑 매달린 턱받침 손수건이라니. 안 그래도 간당간당할 아빠의 권위가 더 떨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빠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빠는 시엔 손수건만 있으면 돼. 이렇게 멋있는데.”
역시 바보 아빠는 미적 감각도 뒤떨어지는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폭 쉬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음엔 더 멋진 거 주께!”
사실 저런 건 별것도 아닌데.
“그래, 알겠어.”
아빠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듯한 그런 미소였다.
나는 아빠를 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구럼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제일 예쁜 동물을 데려올게, 시엔.”
“웅!”
‘그런데, 아빠가 생각하는 제일 예쁜 동물이 뭐지?’
살짝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걸 오래 파고들 시간은 없었다.
아빠가 사냥 대회에 다녀오는 동안, 난 여기서 열심히 측근들을 관찰하고 있어야 하니까!
총총, 커다란 제단 위로 걸어 올라온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녀 언니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비장의 무기, 할머니가 선물해 준 조그마한 구슬 모양 영상구를 꺼냈다.
이 영상구가 있으면 로체른 숲의 전경을 대략이나마 볼 수 있다면서, 첩자가 있으면 바로 처리하라고 내 주머니에 쏘옥 찔러 넣어 주었었지.
누군가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바로 뛰쳐나가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끈, 주먹을 꼭 쥐고 영상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영상구 속, 야심 차게 먼저 사냥을 떠난 아빠의 최측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숲속을 돌아다니며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
마티어스의 최측근이 된 그들은 기질을 숨기고 있을 뿐, 본디 제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그들은 보통 사냥을 할 때 숲속 동물들을 전부 몰살하곤 했다. 그것이 제법 편리하니까. 생포는 귀찮은 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인 마티어스 님의 명령 탓이었다.
“뭐냐, 도대체 생포는 어떻게 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들은 단 한 번도 생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죽일 뿐.
개중 한 악당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토끼 한 마릴 손으로 잡았는데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제대로 달리지 못한 말이 히힝 대는 걸 막으며 전사 하나가 거칠게 소리쳤다.
“……후, 난 겨우 귀여운 고블린 한 마리를 주웠어. 통구이를 해서 드릴 생각이다.”
주변에서 일동 경탄이 찾아 왔다.
“그 연약한 고블린을……. 자네 대단하군. 작고 조그만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최고로 좋아하실 거야. 고블린은 참 작고 귀여우니까.”
느리게 걷는 말 위에서 대화를 잇던 그들은 계획이라도 짠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포가 살해보다 어렵고, 선악 구분이 모호한 강력한 악당들.
그들은 오랜만에 괴로운 목표, ‘시엔에게 작고 귀여운 동물을 바치기’를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상구를 통해 사냥 대회장을 은밀히 관찰하던 나는 한결 더 찜찜해졌다.
“이 아저씨들 이상해.”
“네, 시엔 님?”
“자꾸 토끼만 주겨. 예뿐 토끼인데.”
자꾸 토끼를 잡고, 무서운 몬스터나 마수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서로 대화를 하는 것도 같은데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몬스터와는 마치 마주치는 것조차도 끔찍하다는 듯이 빠르게 도망치는 꼴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설마, 몬스터가 무서워서? 어쩌면 저 사람들, 보기보다 약한 건가? 분명 엄청난 실력자 같았는데.’
게다가 우리 아빠는 내내 혼자 다니고 있는 것 같고…….
나는 콧물을 킁, 하고 삼키며 아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빠가 혼자 있을 때일수록 내가 지켜 줘야 하는 법!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가자미눈을 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제될 건 아직 없어 보이긴 하는데.’
그들은 다들 딱히 무슨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보통 사냥 대회는 위신을 강조하기 위한 거라, 모두 최대한 멋지고 좋은 마물을 잡기 위해 혈안인데 말이다.
나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내가 이 아저씨들까지 지켜 줘야 하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운 눈을 깜빡거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내게 방금 막 이상한 느낌이 찾아왔다.
‘잠깐만. 얼추 이상한 사람이 보이는 거 같기도…… 잘못 본 건가?’
원래 게임도 캐시 아이템을 잔뜩 바른 캐릭터가 강한 법.
평소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텐데, 마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아티팩트를 두른 나는 무언가 불안한 조짐을 미세하게 느꼈다.
기분이 미묘해졌다.
데드라인까지는 한 달이 남았지만, 그 안에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나는 영상구에서 눈을 들어 주변을 느릿하게 살펴보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건네준 방어구가 한 번 깜빡였다.
‘내 주변에 뭔가 위험 물질이 있나 봐. 배신자인가? 암살자일까?’
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상 주변을 쓰윽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겨냥해 마법을 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는 나를 평범한 어린이라고 간과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은 나는 탁탁, 지금은 말랑말랑 찹쌀떡 같지만 미래에는 방패보다 더 딱딱해질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아주아주 무섭고 싸늘하게, 차가운 바람을 잔뜩 맞아 굳어 버린 감자옹심이 떡처럼 웃어 보였다.
내 몸에 장착된 최첨단 아티팩트에서 초록 불이 반짝였다가 꺼졌다.
‘목적이 뭔진 몰라도 확실한 건, 누군가 있어. 그리고…….’
나는 발을 턱, 앞으로 내밀었다.
내 발에 있는 액세서리처럼 생긴 발찌는 제법 귀엽게 생겼지만, 사실은 적을 판별할 수 있는 무서운 마도구였다.
교육하던 날, 그리고 사냥 대회에 오기 전! 할머니가 내 주머니에 아티팩트를 쏙쏙 챙겨 넣어 주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내게, ‘아티팩트만 잘 다루면 마력 없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가!’라고 했었다.
바로 그 말대로였다.
할머니에게 아티팩트를 다루는 법을 익혔더니, 마력이 없어도 그럭저럭 마법사인 척 흉내를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발찌를 내려다보았다.
‘악셀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이 아티팩트로 찾아낼 수 있어. 위험한 자들이 곁에 있으면 진동을 한다고 했었지.’
나는 둥근 밀떡 같은 발목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시녀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여기 나쁜 사람 이써.”
“네?”
정적은 잠깐이었다.
시녀 언니들은 내 말을 어린아이의 말이라 허투루 묵살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들은 주먹을 쥐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후, 드디어 제가 힘을 발휘할 때가 왔군요.”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나쁜 놈들은 전부 죽어야죠.”
가장 나쁜 놈 같은 표정으로 시녀 언니들이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시녀 언니들의 살기 섞인 눈빛이 단상 아래로 흩어졌다.
상대가 누구든 다 부수어 버릴 흉악한 기세였다.
가뜩이나 무서운 얼굴에 살기까지 더해지니 주변 온도가 2도는 낮아진 듯했다.
‘……언니들이 주변을 내려다보니까 내빈석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거 같은데.’
언니들이 흉포한 기세를 내뿜는 동안 나는 귀걸이 아티팩트를 작동해 보았다.
사용해 본 적 없는 아티팩트를 쓰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어서, 몇 번 헛손질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곧 내 손은 적절한 아티팩트 작동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귀걸이 침을 꾹 누르라고 했지.’
엄지로 귀걸이의 침을 누르자 내 귀걸이에서 삐빅, 소리가 났다.
목표물을 찾아냈다는 의미였다.
‘마력 없는 내가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위치를 추적할 수 있을 정도라면, 아주 위험한 세작들은 아닌가 본데. 잔챙이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숲을 향하는 걸 본 시녀 언니들이 눈을 번뜩였다.
“숲이군요. 산 채로 잡아 오겠습니다.”
“산 채로 잡아라!”
“아냐.”
‘곧 어디 있는지 알려질 때가 됐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먼발치에서 팡! 하고 무언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머니에서 표주박형 아티팩트를 꺼냈다.
“언니들, 나랑 같이 내려 가쟈.”
숲이라면 지금 우리 아빠가 있는 곳이다.
적은 나를 납치해서 볼모로 삼아 심약한 아빠를 협박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아빠를 구하러 가야 돼.’
나는 소설 속 히어로처럼 한 발짝 한 발짝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에도 나를 향한 마법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값비싼 아티팩트로 무장한 내 몸은 모든 공격을 무적으로 튕겨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