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_무두절
시즌 시작 전의 주말.
‘미디어 데이’라는 게 있다.
이건 정말 시즌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등장하는 행사다.
여기서 나오는 말들이 서머를 가로지르는 큰 줄기가 되기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자기 팀을 제외한 우승 후보팀은?’이라는 질문이다.
행사는 LOS 파크에서 각 팀의 감코진과 대표 선수, 기자단으로 진행된다.
우리 팀의 대표 선수로는 곽지운이 나갔다.
주장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유독 일정이 빡빡했던 내 스트레스를 덜어주려는 배려다.
어쨌든 그 말이 뭐냐?
오늘은 무두절.
스크림은 쉰다는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냥 휴식일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에겐 쭉 미뤄뒀던 ‘면담’이 이뤄지는 날인 셈이다.
“아직도 나는 꿈에 그 장면이 나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상상으로..”
스탭을 대동하고 우리 사옥까지 찾아온 미라쥬의 두 사람.
투명하게 공개된 장소지만 다른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접객실에서 사담이 이뤄지고 있다.
“그때 만약 내가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죠.”
“응. 맞아. 상상도 못 하겠어. 그냥, 고마워.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정신이 없었어. 다들 나 걱정한다고 제대로 말을 안 해줘서.”
벌써 꽤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한 ‘LOS 파크 괴한 불법 침입’ 사건.
“당연히 병원이 먼저죠.”
그 이후 미라쥬도 서폿 콜업을 하는 등의 대처로 응했지만 다행히 왕지우의 복귀는 빨랐다.
사실 뭐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당시 왕지우의 눈은 가려져 있었으니까.
사건은 무사히 종결됐고, 미라쥬의 지난 성적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냥 다만 내가 멀쩡하게 게임을 다시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쨌든 시간이 좀 지나서.
온라인에서는 안하무인으로 굴던 미라쥬 서포터는 이제 그런 모습을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말투도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순했다.
“다 고마워. 털보 형도 같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 서 있는 재무팀 팀장 한상열에게도 깊은 신뢰를 보인다.
그 왜, 힙스터 털보.
나한테 왕지우 대신 인사하러 왔던 운동 꾸준히 하시는 분.
팀 굴리는 게 별로였던 미라쥬에 정신적 지주가 나타난 건 확실히 좋은 일이지.
“나는 너도 궁금하긴 했는데.”
옆에 앉아있던 미라쥬 원딜도 입을 열었다.
“상준이 만나러 왔어.”
“뭐.”
“사이다찡, 나 친추 좀.”
어색하게 코를 긁고 있는 건 현 미라쥬 원딜이자 구 트릭스터 원딜, 고수호다.
선수명 고구미.
밝은 성격에 늘 유쾌한 타입의 준수한 원딜러.
이번 삶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로는 사이다와 선수명이 세트인 그 선수라는 거.
“자리. 없음.”
“거짓말하지 마라.”
“진짠.데.”
“가서 확인해본다?”
“해보.시던.가.”
“그래. 들으셨죠? 자, 갑시다! 확인하러!”
“아니. 지금. 여기. 면회. 중. 이잖.아.”
“아, 꺼져. 면회 같은 소리 하네. 입대했냐? 당장 가자. 콧구멍 커진 거 보니까 너 또 친구 없지? 내가 다시 친구 해준다고. 렛츠 고, 올드 프렌드!”
“싫.어.”
유상준은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타입한테 좀 말리는구나.
“얘. 답. 없음.”
“친추해.”
“다른. 팀임.”
“다른 팀이면 뭐 어때. 친추 할 수도 있지. 그리고 솔직히 내가 너보다 한살 많은데 친구 먹어주고 있는 거잖아.”
유상준은 머뭇거리며 내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그냥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반사회적 성격장애 같던 우리 팀 2번 서포터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느낀다.
“다음에도 또 친삭하면 나 진짜 너 친구로 생각 안 한다.”
“웃기지. 마. 너. 친구. 아님.”
“얘가 좀 그렇지? 상처 존나 잘 받으면서 스스로는 못 깨닫고 그런 부분 있지? 평소에 좀 잘 부탁해.”
그랬어?
이건 또 의외의 이야기네.
“얘 삐지면 말없이 한 달 잠수 기본이고 쌩도 진짜 잘 까.”
유상준이 친구랑 싸우면 프사 빼고 초성만 남기고 잠수하는 그런 타입이야?
용케 친구가 있네.
“그건. 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지랄, 굴 파고 들어가는 빙신 친구 둔 내가 못났지.”
확실한 건 두 사람의 구도가 내 상상과는 많이 다르다는 거다.
섭섭한 감정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유상준 쪽의 일방적인 차단.
친구한테는 해명할 기회조차 안 줬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고수호가 유상준을 배려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장 빨리 만나볼 수 있었던 시간이 지금이고, 예전처럼 성과 없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유상준이라면 우승 전에는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을 테니까.
“니가. 내. 엄마.임?”
“패드립 치는 것 좀 보소? 엄마 한다? 엄마 해? 진짜 해? 내가 니 엄..”
“닥.쳐.”
요즘 좀 우리 애들이 자식처럼 보일 때가 있다.
곽지운은 유쾌하고 긍정적인 첫째.
김예성은 똑 부러지고 믿음직한 둘째.
최은호는 중간에 낀 셋째.
유상준은 히키코모리 넷째.
이유찬이 말 안 듣는 못난 막내.
오늘 방구석 넷째가 친구를 만나는 날인가 보다.
“가서 잠깐 놀아. 친구도 좀 만나고 그래야지.”
“오히려. 건이. 네가. 엄.”
“이거 완전 엄건진 아니냐?”
“둘 다 드립 그만 치고.”
“오호홍.. 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 나 쿠사리 먹는 모먼트 왜 익숙하지?”
“개. 잡. 소리. 하지. 마라. 니가. 어떻게. 암.”
나는 손을 휘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골짜기가 있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갈라졌던 우정이 다시 붙는 건 좋은 일이다.
친구가 있으면 좋지.
나한테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상준.”
그래서 나는 유상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로 했다.
“이제 네가 쟤보다 잘나가. FWX 티어가 더 높다는 말이지.”
“!”
“뭐야? 둘이 왜 속삭여?”
“가서 친추 해줘. 알았지?”
“노예. 원딜. 확.인.”
“뭐야, 나도 알려줘!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권건과. 나. 사이의. 말할 수 없는. 비.밀.”
“너 근데 우정권이 누가 시작한 말인 줄은 알고 게임하냐?”
두 사람은 옛 우정을 떠들어대며 멀어졌다.
내가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최은호가 유상준을 불러오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 거다.
“자, 그래서..”
“나도 친추해줘.”
왕지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 자리 만든다고 내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요청 넣었는지 모르지?”
내가 그걸 알 턱이 있나.
“그러니까 친추 줘.”
인정하기 민망하지만 프로들은 조금 안하무인인 부분이 있다.
어쨌든 학교에서, 그리고 연습생 시절에도 게임으로는 원탑 먹던 사람들 아니야.
사회생활을 많이 못 하고 크기도 했고 팀에서 받아주는 경우도 많고.
“좋은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친구가 되어주세요. 우리 애가 친구가 없거든요.”
털보도 상냥하게 웃으며 왕지우의 어깨를 두드린다.
뭐 이런 영업이 다 있어?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어서.”
하지만 이미 내 친추 창에는 서포터 자리가 둘이나 찼다.
그러니까 T.O가 없다는 얘기다.
친추라는 말이 우습게 보일 수 있지만 이 판 사람들이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린 직업적으로 게임에 살잖아.
하지만 현실과 달리 물리적으로 한정되어있는 친구창.
상대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친구 추가.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는다는 건 인간 대 인간으로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이야기니까.
우리 친해져 보지 않을래?, 번호 줄래? 보다는 훨씬 덜 오글거리는 표현인 셈이다.
“거짓말하지 말고! 너도 친구 없잖아! 나처럼!”
오.
소름 끼치는 자기 객관화.
이런 면에서 내가 왕지우를 꽤 고평가하긴 한다.
전에도 이 사람을 우리 팀에 넣으면 어떨까 고민했던 적이 있으니까.
친구였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순 없지만 같이 경기하는 데 불편하지는 않았다.
“좋은 말로 할 때 해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털보가 나를 협박한다.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오늘 시간을 괜히 낸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용건이 친구 추가라는 것도 너무 황당한 일이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뇨,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 잠깐만.
이 기억 뭐지.
“나도! 친추! 해! 줘!”
“왜냐하면..”
털보가 귀를 막았다.
“친! 추!”
왕지우.
아, 왕지우가 가까워지면 어떤 타입이냐면.
“친! 추! 친! 추우우우우우우! 치이이이이이이이인추우우우우우우!”
“단비 모드가 발동될 수 있기 때문에..”
“제바아아아아아아아알! 치이이이이이인추우우우우우우! 제바알!”
“자꾸 이렇게 밖에서 찡얼거리면! 너 두고 갈 거야!”
털보는 최선을 다했다.
“쩨에에에에에바아아아알!”
“털보는 먼저 간다! 지우는 혼자 여기 살아!”
하지만 으름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에 안 갈 거야! 털보가 나 여기 살라고 했으니까 여기 살 거야!”
맞아.
왕지우도 미친 사람이었지.
근데 전보다 훨씬 심해진 것 같다.
이 판에는 어떻게 된 게 정상인이 나밖에 없냐?
“친추.. 해주실래요? 애를 버릇없이 키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스탭님들, 죄송합니다.. 제 명함입니다,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애 가짜로 울어요.
미라쥬는 털보의 독박 육아부터 해결이 시급한 건 아닐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소란을 참지 못하고 다가온 사람은.
“헥사? 미라쥬의 헥사 아닌가?”
“끕, 끕, 뭐야! 저건 뭐야! 쓰렉스터가 왜 여깄어! 니가 왜 여길 와!”
“슬슬 다음 약속이 있어서요.”
“곤란한 상황인가, 권건?”
오른손으로 안경을 추켜 올린 트릭스터 미드 채지한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렇다면 도와주도록 하지..”
왠지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뿌에에에엥!”
“저자는 내가 처치하도록 하겠다.”
“감사의 의미로 초콜릿을 좀 가져오긴 했는데.. 혹시 지우한테 좀 먹여도 되겠습니까? 애가 저렇게 악을 쓰고 나면 기운이 없어서..”
“...”
친구고 나발이고 그냥 빨리 시즌 시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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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서머 미디어 데이, LOS 파크에서 진행.. ]
[ 2026 LKL 미디어 데이 풀 영상 ]
[ FWX-트릭스터의 양강 구도? NO! 스톰 감독 김지훈, “지난 플옵에서 트릭스터가 운이 좋았을 뿐.” ]
[ 균열을 내는 것은 우리다! ‘강해져서 돌아온’ 유니버스의 도전장 ]
[ (미디어 데이) 10개 팀에게 묻는다.. 개막 앞두고 열정이 넘치는 팀들의 말, 말, 말! ]
‘황부 리그’ LKL이 미디어데이를 진행했다.
1부에서 유니버스 출신 ‘이승수’의 중계진 데뷔를 알렸고 2부에는 10개 팀의 감독 및 대표 선수들이 참여해 포부를 밝혔다.
LKL 10개 팀 대표 선수들은 각각 이번 서머 시즌 예측을 선보였다.
FWX를 8명, 스톰을 1명, 트릭스터를 1명이 지목했는데 각각 ‘스크림 성적’과 ‘기존 결과’, ‘로스터 유지’ 등을 댔다.
FWX의 ‘세자’는 트릭스터를, 미라쥬는 유일하게 스톰을 지목했지만 스톰 대표 선수 ‘킹’은 FWX를 지목하면서 미라쥬에게 ‘감정적인 선택은 지양하는 게 좋다’며 지적을..
ㄴ FWX -> 트릭스터, 미라쥬 -> 스톰, 나머지 -> FWX 가 우승할 것으로 예측
ㄴㄴ FWX는 자기 못 고르니까 그렇다치고 미라쥬는 왜 스톰을 지목함?? 눈이 없음??
ㄴㄴ 아ㅋㅋㅋ 미라쥬랑 스톰이랑 사이 안좋자너ㅋㅋㅋ
ㄴㄴ ‘감정적인 선택은 지양하는 게 좋다’ㅋㅋㅋㅋ
ㄴㄴ 그냥 지목해놓고 우리가 이겨버리면 기분이 조크든요ㅋㅋㅋ
ㄴㄴ 1위는 어차피 정해졌고 2위를 누가 할거냐가 관포입니다^^
ㄴㄴ 이제 걍 다 인정했네ㅋㅋ
ㄴㄴ 미라쥬vs스톰? 아니면 FWX가 고른 트릭스터?
ㄴㄴ FWX야말로 지목해놓고 이겨버리려고 고른 거 아니냐?
ㄴㄴ 무슨 그런 억측을; 우리 세자를 어떻게 보고;
ㄴ 얘들아 왜 자꾸 유니버스는 빼는 거야?
ㄴㄴ 유니버스 출신 중계진 데뷔 축하해
ㄴㄴ ㅠㅠ ㄴㄴ 팀 성적!!
ㄴㄴ 써머 형 또 왔어? 시즌 준비 다 됐어?
ㄴㄴ ㅇㅇ; 서머 시즌의 써머다 각오해라
ㄴㄴ 이제 부정도 안해ㅋㅋㅋㅋㅋ 관객 친화적 선수ㅋㅋㅋ
ㄴㄴ 형 그래도 빅스는 아예 언급도 안됨ㅋㅋㅋㅋ
ㄴㄴ 아; ㅋ
ㄴㄴ 어쨌든 벌써 순위가 보인다 보여
FWX에 대한 기대감은 무서울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