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_잘 자요?
미디어 데이와 함께 개막전 첫 경기는 우리 팀의 경기로 결정 났다.
상대는 수원 해머스.
병역 비리 사건으로 정글러를 잃고 급히 트레이드까지 마친 팀.
그게 아니더라도 큰 부담은 없는 상대이긴 하지만 어쨌든 바로 다음 주 수요일부터 경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적당한 긴장감은 있는 상태다.
“걔 진짜 웃기더라.”
“뭐? 누구? 리뉴?”
“어.”
김예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투 봤어? 와..”
“그거 좀 오글거리지 않냐? 막 ‘이봐, 헥사. 여긴 니가 그래도 되는 곳이 아니야’..”
자리를 비웠던 곽지운을 빼고.
왕지우의 진상짓과 채지한의 전투력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날의 신경전이 꽤 길었거든.
“항마력 부족하던데.”
“나한테 ‘라온..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도록..’ 이러는 거 봤어? 오랜만에 진짜 짜증 나네.”
트릭스터 미드가 남기고 간 말 때문인지 김예성은 고요하게 불타고 있다.
“팀콜에서도 그렇게 말하나? 아니 닉네임이 착붙이면 인정하겠는데 진짜 설마 걔네 정글한테도 ‘어이, 무사.’ 이렇게 부르는 거 아니야?”
내가 어쩌다 보니 채지한이랑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아마 그렇게 부를 거다.
“개소름. 부르라고 지은 닉네임이지만 면전에 대고 부르면 좀 그렇지 않나? 사람을 어떻게 무사라고 부름?”
근데 안 친한 경우에는 서로 선수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상대 본명을 모르니까.
김예성도 방금 채지한을 리뉴라고 불렀다.
그래도 굳이 따져보면 면전에서 ‘~님’이나 ‘~선수’를 붙이냐 안 붙이냐일 거고.
뭐, 그 차이가 좀 크긴 하지.
우리 코치님들도 현역 시절에 브라보라던가 모우모우 같은 보드라운 선수명을 썼으니까.
현역 중에도 해머스의 허니처럼 말랑말랑한 것들도 꽤 있거든.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허니라고 불러?
“그럼 나한테는 세자저하라고 불러주냐?”
우리 팀에서는 곽지운만 조금 관심 있는 눈초리였다.
“세자라고 부르겠지.”
“그럼 좀 시시하네.”
그러고 보니.
우리 팀을 제외한 우승 후보팀을 고르는 질문에서 곽지운은 트릭스터를 골랐다.
감정이 별로 안 좋은데도 굳이 왜 트릭스터를 지목했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지난 시즌 2위를 했으니까 골랐다고 한다.
사실 곽지운은 FWX 말고 다른 ‘팀’에는 관심이 아예 없다.
사람 대 사람이면 몰라도 다른 팀 연고지는 제대로 못 외운다.
온리 대전 FWX.
얘도 정상은 아니다.
“근데 진짜 황당한 게 뭔지 알아?”
여전히 화가 난 미드가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면서 황당하다는 듯이 숨을 뱉었다.
“그 사람.. 건이만 이름으로 부른다? 권건이라고.”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강력하게 공감해달라는 눈초리다.
“음.”
나는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존나 기가 찬다.”
“왜. 차별. 함? 건방.지네.”
“그나마 MSL 때 도와줬으니까 내가 참는다. 안 그랬으면 가서 조져놨다, 진짜.”
나는 선수명이 권건이고 본명도 권건이긴 한데.
이 이야기를 하면 나머지 선수들한테 바가지를 긁힐 것 같으니까 이것도 그만두도록 하자.
“그건 뭐야?”
주제는 늘 쉽게 변한다.
나는 들고 있던 걸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편지?”
“팬레터?”
“누가. 보냈.음? 혹시. 어떤. 코스어가. 찬양글을. 남기고. 갔다던가..”
“아, 그런 건 아니고.”
윤도형이 MSL 때 건넸던 편지를 아직 부치지 못했다.
“부탁받아서.”
“그거 도형이 형이 준 거잖아.”
당시 상황을 보고 있었던 김예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님께 부탁드리면 부쳐주실 거야. 주기적으로 팬레터도 받아다 주시니까.”
“땡큐.”
하지만 이미 편지는 없었다.
“와, 윤도형 우표 안 붙였다.”
“편지를 부치는 데에 돈이 든다는 개념이 없는 거 아니냐? 이메일은 공짜니까 메일도 공짜겠거니 뭐 그런 거.”
“우표 어디서 사야 하는데?”
“어.. 보내본 적 없어서 몰라.. 문방구에서 팔지 않을까?”
“편지에는 크리스마스 씰 스티커 붙이는 거 아니야?”
“그게 뭐야?”
“애기 때 학교에서 안 팔았어?”
“모르는데.”
“엥. 우리 학교만 팔았나? 막 팽수 그려져 있고..”
“그거 우표 아니야. 그리고 편지 부치려면 그냥 우체국에 가면 돼.”
“그럼 팽수는 대체 뭐였던 거임?”
“나도 몰라. 편지나 보자.”
편지는 악귀들 손에 넘어간 지 오래.
오랜만의 게임 외 화젯거리에 모두 흥분했다.
“진심 살짝만 뜯어보면 안 될까?”
“야, 이거 뭐 기밀문서 뭐 그런 거 아니지?”
“기밀이면 우리가 제일 먼저 봐야지. 우리 정보 유출한 거면 어떡해?”
“그럴 수 있음. 윤도형 첩자.”
“유찬이 너 진짜 윤도형을 형이라고 안 부르는 거냐?”
“이제 외국 사람 아님? 이름에 들어간 형으로 충분.”
“당신의 완벽한 답변에 무릎을 치고 갑니다..”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은 선수들은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우리 네모세모~ 누구한테 편지를~ 썼을까~”
나를 바라보는 곽지운의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줄 모르고 준 것도 아닐 테고.
“여자 이름이다!”
“뭐어어어어?! 여어어어자아아아 이름?! 이건 못 참지~”
아닌가?
사실 비밀스러운 편지였던 건가?
“당장 열어!”
가장 먼저 커터칼을 찾아온 최은호를 필두로.
우악스러운 말과 달리 진짜 기밀문서라도 뜯어보는 것처럼 정교한 손놀림이 이어진다.
“엥.”
하지만 편지 봉투는 열려있었다.
우표도 없고, 닫아놓지도 않은 편지라니.
“야, 편지지 핑크색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핑크색! 핑크색! 핑크색!”
우락부락한 그의 체격과 험상궂은 얼굴이 떠오른다.
윤도형.. 거기서 일상생활 가능하냐?
“어휴..”
“윤도. 형이. 누구길래. 저럼?”
다만 저런 싸움에 끼지 않는 김예성과 윤도형을 모르는 유상준만 내 근처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옛날 정글러 형.”
“누.구?”
“건이 오기 전에 정글러.”
“누.구?”
“FWX 전 정글러, 폴리. 현 G3.”
“풀.리? 왠지. 퍼즈. 잘. 걸 것.같은. 이름이네.”
그냥 아는 거 아니야, 이거?
“그러니까 상준이 네가 F.L.E 활동 할 때..”
“F.L.E? 그게. 뭐지? 언.제?”
“...”
그냥 옛 데이터를 삭제한 걸로 쳐주자.
펌웨어 업그레이드 거치셨나 보다.
“글씨 진짜 개 못 씀.”
“야, 얘 띄어쓰기 없는데?”
“나도 손글씨 안 써본 게 오래돼서 고문서 보는 것 같다.”
한참 글을 해독한 탑, 원딜, 서폿 삼인방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부터 읽습니다!”
최은호가 발표회를 시작한다.
관심 없는 듯했던 내 옆의 두사람도, 나도 슬쩍 최은호를 바라봤다.
궁금하긴 해.
“생일 축하해, 건강히 잘 지내?”
“오오오오오!”
“잘 지내? 자니? 끼리낄낄낄끼룩.”
“시작 좋고~!”
“사실 나는 얼마 전에 우승했어. 내가 혼자서 딴 우승은 아니지만, 결승까지 가는 길에 중간중간.. 내가 끼었으니까.. 나도 우승한 거 맞아. 그렇지?”
최은호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G3가 유럽 리그 우승했었나?”
“그런가 보다. 도형이 잘 나가네?”
“캬~ 어필 좋았고~”
“생일은 같이 보내주고 싶었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아쉽다.”
“헤에에엑! 너무 민망해!”
“약속했나 봐! 우우우우후!”
“내년 생일에는 꼭 돌아갈 거야. 보고 싶어.”
“달다, 달아! 이 썩어욧!”
“보고 싶대! 보고 싶대! 으아아아아!”
방청객 수준의 호응이 나온다.
확실히 윤도형이 생긴 거나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성적인 면모가 좀 있긴 했지.
노래도 잘하고.
“그만 읽어야 하지 않을까? 듣고 보니 진짜 사적인 편지잖아..”
김예성이 말리려던 찰나.
“자주 가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여기엔 날 필요로 하는 놈들이 있어.”
최은호가 한 줄을 더 읽어낸다.
“...”
“흠흠.”
“어, 씨.”
잠깐 무거운 분위기가 스친다.
어쨌든 윤도형은 우리 팀이었던 선수다.
그건 성공적인 이적이었고 긍정적인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적한 건 사실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엄마.”
“...”
“엄마의 아들. 도형이가.”
“...”
“엄마.. 였어?”
“괜히 봤다.”
뭐.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거기서 잘 지내나 보네요.”
딱 이 내용일 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성과도 잘 나오고. 보기 좋네.”
나는 편지를 받아서 들었다.
원래 접혀있던 대로 곱게 접어 다시 편지 봉투에 넣고 닫았다.
“와, 이 새낀 진짜 뭐 있어. 전에도 뭐더라? 우리 팀 나갈 때도 감동 노래인가 뭔가 올려놓고 가지 않았냐?”
“사람 마음에 돌 던지고 싶어 하는 타입.”
“지겹다! 지겨워!”
머쓱해진 선수들은 큰 소리를 냈다.
“사실 지금 최선이긴 해. 여기서 뭐 했겠어, 건이 잘하는 건 자기도 아는데. 괜히 주전 자리 뺏기고 있느니 유럽 최강 먹는 게 낫지.”
“아, 맞아! 진짜! 잘했지! 잘했어!”
“양보의 미덕을 아시는 분이네!”
무거워졌던 분위기 탓인지 선수들은 아무런 말이나 하며 공기를 흩어냈다.
“야, 내가 톡방에 솔직 고백해놓는다. 봤다고.”
“읽고 감동받았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듯?”
“고건 확실하다.”
하지만 내 손에 쥐인 편지 봉투를 다시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이 편지..”
“네.”
“내가 부칠게.”
최은호다.
“그럼 밀봉도 좀 해주시겠어요? 이렇게 안 붙인 상태에서는 내용물이 유실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어쩐지 최은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잘 붙여서.. 잘 붙여서 보낼게.”
나는 가만히 최은호를 들여다봤다.
최은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
조용한 방.
“그래서 내가! 딱 우승하고 DM 보냈지,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싶다고.”
최은호가 떠들어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랬더니 아나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물론이지, 나는 FWX의 팬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
“아, 사진 보여줄까? 나랑 같이 찍은 사진도 SNS에 올렸더라구.”
최은호는 재빨리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MSL에서 만난 그의 새로운 트루 러브, 아나 암브로지우 킴 라틴 더 챌린저의 계정을 열어 상대에게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브라질의 계절감 탓일까.
헐벗은 사진들이 한가득하다.
“어! 그러니까 이건! 이건!”
오히려 화들짝 놀란 최은호가 제 손으로 아나의 사진을 가린다.
타 팀원들보다 여미새같은 꼴을 보이긴 했지만 알고 보면 그도 영락없는 유교 보이다.
“거기는 날씨가 더워서.. 또 아나 몸매가 워낙 좋으니까.. 내가 원래 이런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러니까..”
그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열심히 훔쳐보고 있다.
한국 정서로는 바디 프로필 사진이 아니면 꿈도 못 꿀 노출도에 헤드폰을 끼고 길을 걷는 사진.
물론 컨셉샷일 가능성이 높지만 최은호는 그런 거 모른다.
“나도 남자잖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맞지? 이해하지? 언더스탠?”
최은호는 그냥 예쁘고 몸매 좋은 사람을 보면 당연히 좋아하는 그런, 이십 대 초반의 평범한 청년.
“...”
“이해.. 못.. 하나..?”
탁 소리가 나게 휴대폰을 뒤집은 최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서머 시즌을 앞둔 FWX의 티타임.
최은호와 권건의 차례다.
“자력 여성 챌린저가 많지는 않잖아, 그러니까 또 실력으로 봤을 때나 의견 교류하는 것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거고.. 내가 게임에 집중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앞에 앉아있는 권건은 묵묵히, 항상 마시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커피의 맛과 향을 가리지 않고 카페인이 들어간 쓴 물을 좋아할 뿐이었지만 이번 MSL까지 정복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맞이한 것은 신설된 사옥 내 카페였다.
이유찬은 카페 없는 카페테리아가 드디어 ‘카페’테리아가 됐다면서 좋아했고.
김예성은 카페테리아의 어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또 지지부진한 말싸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구내 카페치고는 상당히 훌륭했다.
“많네요.”
“내가.. 내가.. 말이.. 말이 많기는 해. 근데 그러니까 또..”
최은호의 얼굴이 벌게졌다.
“커피양이 많다구요.”
하지만 권건은 테이크 아웃 잔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사이즈 업그레이드를 해주셨나. 너무 많이 마시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데.”
그리고 그는 살피던 잔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놨다.
"SNS 끊으셨다더니."
왜일까?
존댓말인데 반말보다 훨씬 무섭다.
최은호가 느끼는 박진현 감독과는 정반대다.
"가끔.. 보는 용도로.. 써."
권건도 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수면 시간 잘 지키고 계시죠?”
“수면? 어.. 어.. 응.. 그럼, 잘 자고, 잘 먹고..”
그 모습을 본 최은호는 숨이 턱 막혔다.
눈이 마주쳤다.
눈치 빠른 그는 단박에 권건이 묻고 있는 게 진짜 수면의 질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피할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