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74화 (275/326)

274_승리 후에

길지만 짧았던 MSL은 끝을 맺었다.

5월 말의 일이었다.

그리고 축하와 적응으로 순식간에 지나간 일주일.

서머 시즌의 시작은 6월 중순이다.

정신없는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버전 적응도 적응이지만 프로필 사진은 매 시즌 다시 찍는 데다 영상 촬영도 많으니까.

미리 찍어 놓은 것도 있었지만 다른 팀들과 맞춰야 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야외 일정이 있기도 해서 빡빡하다.

어쨌든 스프링 시즌의 성적이 좋았던 만큼 우리를 빼고 일을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팀 채널에는 일찌감치 찍어놓은 장기 콘텐츠들이 업로드되겠지.

MSL 결승 응원 이벤트에서 뜻밖의 코스프레 쇼도 개최되었다는 것 같고.

그 외에도 선수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 왜 우리 해외 나가 있던 때에 한참 한국 난리 났던 거 알지?”

“아.. 맞지. 아직도 난리던데요?”

“게시판에 그 이야기밖에 없어.”

“김정글, 너 게시판도 눈팅함?”

“정글이라고.. 부르지.. 마라..”

“김정글이 정글에서 한 게 뭐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음. 탑 갱 한 번도 안 오고.”

“해보니까 더 잘 알겠더라. 왜 탑에 안가야 하는지.”

“왜?”

“가서 킬 줘도 똑같은 말 들었을 테니까. 정글이 하는 게 뭐 있음? 내가 다 했음.”

“오. 예지력 상승.”

박 감독님이 손뼉을 쳐서 이목을 끌었다.

“자, 주목. 병역 비리 건이 터졌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테고..”

감독님과 코치님들은 어쨌든 본업에 집중하느라 소식에 어두울 선수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보따리를 싸 들고 다닌다.

말하고 말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팀의 선택이지만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 나오는 게 맞고.

특히 이런 부분에서는 탑 전담 문백산 코치님이 뛰어났는데.

“우리 리그 사람으로는 스톰의 하지광 코치, 피닉스의 장광희 코치..”

가장 최근에 전역한 사람인 문 코치님은 화가 많이 난 듯 코를 씰룩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아예 프린팅해서 읽고 있었다.

“누..구..?”

“그리고 2군 선수도 있었고.”

“아니, 2군 선수가 뭣 하러 그렇게까지? 진짜 프로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우승 직후 여기저기 제 활약상을 알리려고 애쓰는 최은호가 나오는 대로 뱉었다.

“죄은호, 1군은 진짜 프로고 2군은 가짜 프로냐? 말조심해라.”

곽지운은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것처럼 딱 잘랐다.

“아.. 그게.. 그렇게 되나..”

“2군이고 나발이고 브로커한테 연락한 건 잘못한 게 맞지만.”

“내 말이 그래! 그러니까 그런 못된 생각 한 새끼들 욕한 거였지!”

“쯧쯧.”

군대를 다녀온 감독님과 코치님들보다는 선수들이 조금 더 혼란스러워했다.

사실 군대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거다.

“여러분이 알 만한 사람으로는 해머스의 붐보이가 있어.”

문 코치님은 콧김을 흥, 내뿜었다.

우리 팀에서 붐보이 허진수에 대해 감정이 좋은 사람은 없다.

“들었어요!”

아니.

원래 있었던 스톰은 물론 해머스, 그리고 방송 좀 쳤다는 사람 중에 이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은 없다.

방송에서조차 다른 팀 선수들을 함부로 거론하면서 크고 작은 트러블을 일으키던 사람이었으니까.

“걔 완전 여친 썰 토나오는 놈 아니에요?”

최은호도 화가 나 보였다.

“그쪽이 먼저야?”

“뭐.. 걔 때문에 방송 쉰다는 여성 스트리머들이 좀 있긴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진짜 완전 민폐인 거 모르나?”

“그럼 붐보이 이제 활동 못하는 거죠? 잘됐다, 꼴 보기 싫었는데.”

“근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조사하면 다 나와?”

개인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박 감독님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튼.”

이 팀의 감독님은 선수들의 생활과 적응, 관계, 전체적인 전략과 마인드 셋을 총괄하는 서포터 타입이다.

아무래도 경기 중에는 개입할 수 없는 이스포츠의 특성상 선수 쪽에서 선호하는 타입.

물론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 코치. 다음 단락 부탁해.”

감독님은 슬쩍 내게 눈짓했다.

더 길어지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내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첫 제보를 했다는 사실은 팀 내부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인 것 같다.

꽤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감독님은 서폿 감독계의 최강자가 아닐까?

“아, 넵, 넵!”

문 코치님은 황급하게 종이를 넘겼다.

우리에겐 시종일관 부드러운 모습인 박 감독님도 뒤에서는 조금 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내가 모르면 됐다.

“그래서 MSL 끝나고 FA 기간이 있었는데. 그 사이 이쪽으로도 오더가 들어왔었어.”

“그걸 말해도 돼요?”

“끝났으니까.”

멀뚱한 눈빛의 문 코치님이 단답을 내놓자 감독님이 말을 보탰다.

“너희도 이런 관계의 변동이 있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슈는 조심할 필요도 있고. 어쨌든 오퍼가 들어온 만큼 저쪽에서도 어떤 카드가 필요했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 휴식 시간처럼 흘려들어도 괜찮아. 아이스 초코 더 마실래?”

몇몇 선수들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저 한 잔 더 주세요~”

“오.. 그렇구나..”

관심이 있는 선수도 있고, 없는 선수도 있다.

“우리 팀에 트레이드 오퍼가 들어왔던 건 2군이다. 2군 서포터 민초 이지호, 그리고 2군 정글러 단디 장한울.”

근데 나는 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어? 지호는 아는데.”

“이지호 돈미새 민초단임.”

“굉장한 친구네.”

“아, 걔? 원딜 정일도 나간다고 했을 때 울었던 걔?”

“일도는 군대 갔대?”

“응.”

“빨리도 가네.. 걔 진짜 대단하다.”

“난. 모름. 누구?”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잡담 방이 됐다.

한울, 한울이라.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퓨처스 리그 승리 인터뷰에서 내게 영상 편지를 썼던 그 선수다.

그 후 만나서 사인도 해줬고.

“말했듯이 트레이드는 성립되지 않았고, 2군 콜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이쪽에까지 찔러서 다른 포지션도 아닌 서포터를 문의해본 게 의외라 조금..”

리그 시작까지 촉박한 만큼 이미 로스터는 정해졌고 발표까지 끝났지만.

어쨌든 얻어낼 만한 부분이 조금 있다.

“원딜 때문 아닐까요.”

나도 짧은 의견을 던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 오. 오? 그럴 수도 있겠다. 오. 진짜. 맞아. 해머스 원딜이.. 음, 일단 의견 고맙다. 그리고 결국 해머스에서 구한 정글러는 놀랍게도..”

그런데 의외로.

집중력이 떨어진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최은호였다.

“근데 1군에는 오퍼 안 왔어요?”

“1군? 우리? 우리한테?”

그 질문에는 박 감독님도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아예 생각조차 안 한 것 같은데.”

“그렇구나.. 그래도 우리가 우승까지 했는데..”

“은호 형 뭔 소리하는 거임?”

“왜 아쉬워하냐? 님 해머스 가쉴?”

“아니! 미쳤어? 거기 없는 건 정글런데 내가 어떻게 거길 가냐? 아니, T.O 있어도 그래! 난 죽어도 여기지!”

“근데 왜 쓸데없는 소리 함? 너는 우리 팀 마스코트잖아. 로열 로더, 우승의 주역, 버스 잘 타는 FWX 서포터.”

곽지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최은호의 옆구리를 때렸다.

솜털 주먹이 낭낭하게 꽂힌다.

“아씨, 아프다고!”

“애프다고~”

“깝치지 마라 진짜!”

“깹치지 매래 진찌~”

평소처럼 놀리고 웃고 떠드는 분위기였다.

다음 시즌에 대한 대비도 철저했고 이번 이슈 역시 우리와 관련이 없었으며, 스크림은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연달아 우승을 두 번 한 팀이었으니까.

같은 리그는 아니었지만 뭐 어쨌든.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자, 연습 시간. 2시간 뒤에 미라쥬랑 스크림 있으니까 전에 이야기했던 그 빌드 써볼 수 있는 방향으로..”

집중력이 완전히 흩어진 기미가 보이자 감독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게 끝난 게 절대 아니야. 이번 시즌에도 최선을 다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자!”

“드리자!”

“예에!”

선수들도 기운차게 대답하며 다들 소파에서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감독님은 피식 웃었다.

“각자 10분만 더 쉬었다가 자유롭게 연습하는 걸로.”

“감독님 만세!”

“자, 나가자고.”

눈치 빠른 감독님은 다른 코치님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하긴, 감독님이 쉬라고 해놓고 옆에 있으면 누가 쉴 수 있겠어.

다음 일정 탓에 급히 귀국해 일상으로 돌아온 선수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흥분이 남아 있었다.

“아무튼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지!”

문 코치님만이 이유찬의 옆에서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미 우연이 아니라기엔 내가 너무 강함. 세체탑.”

“아, 맞지 맞지. 우리는 세계 최강이잖아. 안 그래?”

“맞음. 역시 미스터 문.”

“미스터 문? 놉. 무니라고 불러줘, 차니. 나는 너의 일등 부하야.”

“역시 배우신 분.”

“문 코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와.”

“넵, 넵! 넵! 갑니다! 얘들아! 또 우승해 줘!”

코치진까지 사라지자 선수들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각자 이번 시즌 각오를 늘어놓으며 으름장을 놨다.

“나 이번에 한 게임 펜타킬 두 번이 목표다. 알았지? 얘들아, 주장 말 듣고 있지?”

“나도. 이번에. 펜타.킬이. 목표..”

“야, 니가 왜 세체탑이야?”

“우승했으니까.”

“하지만 정상적인 결승이 아니었잖아. 중국도 빠졌고..”

꼼꼼한 김예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근데 세계 리그 아님? 그럼 세체탑 맞는 거 아님? 지들이 빠졌지 내가 빠지라고 협박함?”

“나는 월챔까지 우승해야.. 아니, 월즈 우승 3회는 해야 정말 최고의 미드라고 인정을..”

어쨌든 정해진 목표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유찬이 진지하게 김예성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미 최고의 미드야.”

“갑자기 니가 나를 인정한다고?”

“권건을 밀어내고 미드에 앉았잖아.”

“진짜다. 굉장해. 놀라워. 우리. 미드. 세상에.”

“나도 네가 미드인 게.. 마음이 편해. 넌 내게.. 최고의 미드야.”

“지운이 형까지..”

“레드. 때문."

"쉿. 경력직 신입이 들을라."

음.

나보다 미드가 어울린다고?

나 꽤 잘했던 것 같은데.

근데도 이런 평가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 미드가 세계 최고의 미드 맞네.

“우승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사는 게 우승이고 우리는 이제 이기는 것밖에 안 남았는데.”

“그게 맞지. 우승하면 다지.”

“인정.”

어쨌든 의견은 모인다.

“야, 야.. 근데.. 너네..”

하지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최은호가 엉뚱한 의견을 내놨다.

“우승.. 우승.. 그러니까 그.. 또 우승하라는 말.. 좀.. 무섭지 않냐?”

“뭔 개소리임.”

“우승이 왜 무서워? 좋기만 한데.”

“너도 똑같이 좋아했으면서 왜 그래?”

“에러. 났음? 왜. 이상한. 말. 함.”

요즘 좀 이상하네.

뭐, 메리지 블루 비슷한 건가.

“그게 아니라.. 우승했는데 또 우승해야 하고, 또 우승해야 하고.. 그럼 전교 1등 했으니까 졸업할 때까지 놓치지 말고 전교 1등 하라는 말이랑 같은 거잖아. 좋은 실적 올렸으니까 다음 달에는 이것보다 더 잘하라는 말처럼 들리고.. 자꾸 선물, 기대받고 그런게..”

“그거 니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니 팬레터 받으면 다 장식하잖아.”

“저장 강박증 지림.”

“그러니까.. 그러니까 문제지..”

음.

새로운 시각이다.

하긴, 우리 리그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서 빠른 느낌일 수도 있다.

스프링, MSL, 서머, 월챔.

거기다 아시안 게임이나 이벤트 전이 더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경기가 너무 많아서.. 그럼 실패 가능성이 높잖아!”

나는 그걸 우승할 수 있는 찬스가 더 많다는 쪽으로 생각했는데?

“하면 되지 뭐가 문제임? 혹시 사서 걱정하는 타입임? 거니 형님이랑 내가 캐리해드림.”

“고맙긴 한데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휴, 이 둔감한 새끼들 진짜.. 답답해.”

“겁쟁이임?”

“아니, 그러니까.. ‘질 때 됐다’는 말도 있잖아.. 나는 그게.”

최은호의 말은 대단히 착각이기도 하지만 이해도 된다.

일상생활로 따지자면 ‘이만큼 꾸준히 복권을 샀으면 당첨될 때도 되지 않았냐’ 정도?

그런 사람들 있잖아.

하지만 사실 당첨 번호에는 규칙이 없고.

기계 조작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1등의 당첨 확률은 늘 같다.

최은호의 말과 복권 당첨 확률의 차이점이라면 희망과 걱정, 둘의 차이다.

이게 사람이 하는 경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뭐.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거든.

나는 우승을 못 했을 때, 최은호는 우승하고 나서라는 게 다르지만.

지금의 나는 우리가 경기력을 유지한다면 언제나 확률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불안은 늘 찾아온다.

성적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니까.

기억도 양심도 없이 다만 결과만 있을 뿐.

변수가 있다면 이런 ‘두려움’이 그렇겠지.

하긴.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우리 티타임이 언제죠.”

그냥 어리광을 한 번 받아줄 때가 됐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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