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53화 (253/326)

253화. 우리 지구 푸르게 푸르게

오래된 스킨들이 있다.

아주 과거.

LOS가 그리 큰 명성을 얻지 못했을 때 출시되었던 스킨들은 고유의 세계관보다는 국제적 이벤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나마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는 한국 유저들도 이해하기 쉬웠지만.

태초의 근원이 북미에 있었던 만큼 다소 알기 어려운 시즈널 스킨들이 존재한다.

그나마 알려진 부활절을 비롯해 세인트 패트릭, 추수 감사절 등이 그렇다.

새로 출시하는 일은 드물지만 여전히 심심하면 축구 팬들이 사용하는 스킨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축구 축제를 맞아 출시된 스킨들이 그렇다.

국가 대표, 공격수, 스트라이커, 레드카드, 축구광, 플레이 메이커, 리베로.

공통점은 제법 오래된 스킨들이라 풍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어억, 저 개 같은 거.”

트릭스터 원딜 목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 씨바 무료 스킨 같이 생긴 저거는 대체 근본이 뭐야?”

“2010년 출시.. 골키퍼.. 블릿츠..”

“그런 거 물어본 거 아닌데.”

“권건.. 쟤도..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

“뭔데?”

“스킨에.. 대한.. 미적.. 감각..”

“마오 야옹이 스킨 버려?”

“어.. 권건은.. 골키퍼.. 마오차이..”

서포터가 대답을 읊은 순간.

“어? 그 스킨 혹시 묘목이.”

쪼르르 걸어 나온 축구공이 터진다.

“축구공.. 모양이냐고..”

맞다.

“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공 저어어어어어어어어엄멸!”

목해인은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을 느꼈다.

“때애애애앵겨어어어어어어억!”

불의의 희생자 역할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발이 완전히 풀린 사이다의 블리츠가 하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묘목은 덤!”

아니, 둘 다 골키퍼 스킨이면서 왜 이러는데.

혹시 병지 선생님이세요?

“세자의 커어어어어어어튼 콜!”

총알이 빗발친다.

“헤인즈! 도망칠 수! 없습니다! 속박으로는 커튼콜을 멈출 수 없었어요!”

“이거 현실 총인가요?!”

“오늘도 FWX의 원딜은 행복합니다!”

아.

골은 다른 사람이 넣었구나..

#

탑은 썩었다.

바텀은 터졌다.

미드는 상처 입었다.

“지금, 여기, 결승 무대인데! 어쩐지 이거 분위기!”

“아주 싸늘해요! 지금 트릭스터 선수들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분위기입니다!”

“앞서 클래스 선수가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사이다 선수가 잘 받아내고 있죠!”

“그랩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지금 블츠가 나왔는데 마오가 같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에요! 묘목 밟으면 무조건 그랩 들어간다!”

“이게 블츠 입장에서 정말 부담이 적거든요! 불리한 팀의 블츠는 항상 뭘 보여줘야 해서 정말 힘든데!”

“지금은 그랩률 100퍼센트! 그 뒤에는 대자연의 마수가 있다! 이거 완벽한 압박이거든요! 이 스킬, 느리지만 아예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철벽의 수비! 그리고 그걸 공격으로 전환해 주는 역할의 챔피언이 사이다의 블츠입니다!”

“트릭스터 장점이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팀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팀이 아닌데요!”

어쩌면 어떤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이었을 상대 미드는 불행 속에서 몸부림쳤다.

아자르라는 챔피언이 좀 그렇다.

정말 한없이 사기챔인 것 같다가도.

“리뉴, 리뉴, 리뉴! 해 줘!”

“일단 그냥 한번 해 줘, 해 줄 수 있잖아요!”

한없이 요구받는 챔피언이기도 하다.

어쩌면 FWX의 서포터 픽처럼.

“슈퍼 토스 한번 보여 줘!”

“그냥 슈퍼 토스로는 안 됩니다! 슈퍼 울트라 하이퍼 미라클 토스 한 번 보여줘야 해요!”

- 테에엥 해줘시마시타

- 해줘 밈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 이거 다 받쳐 줘야 뭘 해주던가 말든가 하지

- 시1발 아직도 경기 봄? 난 껐음

- 봐야지~ 애들 우승하는 거 봐야지~

- 온다 온다 큰 거 온다

“기회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않거든요, 트릭스터!”

“기회를 엿봐야 합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 지금 킬 스코어 차이 꽤 벌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결국 바론 싸움.

객석은 숨을 죽였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기고 있는 FWX 팬들은 생각지도 못한 실수가 나오지 않기만을 빌었고.

지고 있는 트릭스터 팬들은 제발 비라도 내려서 경기가 중단되길 빌었다.

그만큼 상황은 불리했다.

“두 팀, 이거.. 분위기 심상치 않아요!”

아까까지 웃고 떠들던 선수들도 모두 이 분위기를 눈치챈다.

마지막 집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곽지운은 시비루로 트릭스터라는 강팀을 처음으로 이겼던 날을 떠올렸다.

김예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리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던 그날.

“바론, 알아차렸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나요. 트릭스터?”

“계속 서 있다가는 지속적인 압박으로 숨이 멎어갈 뿐입니다!”

“갑니다. 싸우러 갑니다!”

그때도 트릭스터는 바론을 두고 싸우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FWX는 김예성이 아자르로 텔을 타고 본진을 미는 뒤통수를 쳤다.

“FWX, 뺄 생각 없습니다!”

“정면 대응인가요!”

그땐 그랬다.

지금은 다르다.

협곡이라는 전장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곳은 어디일까.

기나긴 역사 속 수많은 전쟁이 있었겠지만.

아마 이곳 바론 둥지는 뺄 수 없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두 팀..!”

“접근합니다!”

철벅 철벅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이곳.

날이 스산할 정도로 추웠다.

트릭스터는 선봉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다.

썩은 냐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자르와 연계한 궁 셔틀 정도뿐일 것이고.

그나마 팀에서 쓸만한 아자르를 투입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바텀 듀오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간다.”

리싱이 무술인 콤보로 마오 한 명만 낚아오는 방법만이.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싱은 눈먼 수도승이었지만 나머지 일행도 다를 바 없었다.

어두운 안개를 간신히 걷어내며 타인의 영역에 침입한다.

철벅.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패앵.

어디선가 상대 원딜이 발사한 살상연희가 소리 없는 총성과 함께 몸 옆을 스쳐 지나간다.

치고 있을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동굴 시야에서는 공포가 극대화된다.

언제 어디서 기계손이 날아와 동료를 낚아채 갈지 모른다는 무서움.

혹은 그게 자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들의 머릿속에 피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박쥐 같은 음파가 날아간다.

메아리는 없다.

대신.

“음파 맞았어요!”

“블릿츠!”

확 드러난 절대 시야.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기는 어둠이 내린 강 위.

“블츠 그랩!”

암흑 속에 웅크리고 있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피..합니다! 처음으로! 그랩이 실패하면서!”

“이러면!”

한 호흡에 달려든다.

처음 계획은 온데간데없다.

“교전! 교전 발생!”

“무사의 리싱, 역으로 날아 들어가..!”

순식간에 꽂힌 트릭스터의 와드가 두 팀의 시야를 동등하게 만든다.

찰나였다.

추가 시야가 확보되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사가 드러난다.

“..지 않고 바로 방호!”

앞으로 돌파를 시도하던 트릭스터의 스트라이커가 바닥을 내려찍으며 우측으로 휙 돌아 꺾기를 시도한다.

팬텀 드리블.

“라온, 라온 신드리의 적구우우우운! 와해!”

하지만 등 뒤로 정통으로 날아와 충격과 함께 꽂히는 검은 공.

드리블을 하려고 했던 왼발은 비어있다.

“가!”

어차피 미끼였다.

“들어가!”

트릭스터의 정글러는 초시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최후의 지시를 내린다.

그 외침에 물 위를 순식간에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모래 병사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트릭스터, 트릭스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대륙에서 돌아온 황제의 손짓에.

강 위는 황량한 사막이 된다.

거친 모래 바람이 불고 있다.

“너의 황제가 돌아왔다아아악! 아자르, 들어갑니..!”

채지한의 아자르가 확보된 시야 측면을 노리고 들어간다.

완벽한 한타 계산.

힘의 차이가 느껴지는 상황에서의 유일한 답.

“FWX, 냐르, 냐르를 조심!”

간신히 분노를 게워낸 냐르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벽을 만드는 궁극기와 벽으로 밀어붙이는 궁극기가 합쳐진 궁극의 콜라보.

그 일보 직전.

“리뉴! 황제의..!”

지금 와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트릭스터 상체의 장점은 몸놀림이 날래다는 것.

“진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신드리, 라온 신드리 위험! 점멸 아홉 시 반!”

“냐르으으으으으으으!”

하지만 아자르가 미끄러지듯이 유사를 타고 고속으로 이동하는 그 짧디짧은 순간.

이 시대 최고의 빌런은 결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인데에에에에에에에엑!”

가장 깊은 강 중심으로 날아 갔어야 할 적 중.

“권건..!”

가장 중요했던 핵심 인물이.

“권건, 권건, 권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오히려 제자리로 돌아가는 황제의 움직임을 좇아 쭉 따라 들어온다.

선택 불가 상태로 궁극기를 흘려내며 끝까지 쫓아 들어와 버린 느리디느린 나무 정령이.

구우우우웅, 큰 소리와 함께.

“대자연의 마수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트릭스터, 비상, 비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제 점점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무 정령이 괴물의 형상으로 변한다.

모래뿐이었던 이 지역이 점차 초목으로 뒤덮여간다.

이미 적진 깊숙이 침략했던 냐르는 신드리의 목숨을 끊지 못하고 풀려난 힘에 의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트릭스터의 누군가가 퇴각을 외친다.

어디선가 칼이 울고 있다.

미처 흔적을 찾지 못했던 탑의 칼이 쩌렁쩌렁한 검명을 울린다.

“아아아아아아아! 차아아아아아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

“운명봉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돌풍에, 허리케인에 휘말린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아악!”

“F-W-X!”

그 앞에서는 어떤 저항도.

“이 팀 정말..! 이 팀 정마아아아아아알!”

어떤 발버둥도 소용없다.

한바탕 권건이라는 재연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뒤.

연약한 서포터 뒤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지한이 마지막 불씨라도 살려보기 위해 등을 돌린다.

죽었나?

누가 죽고 누가 살았지?

상황을 다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지난 결승, 이유찬이 요른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불씨만 남아있다면 숲도 불태울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철컥.

뭘, 밟았나.

묘목?

아니, 연꽃.

서벅서벅한 마른 모래 위로 한 줄기의 연꽃이 피어오른다.

개화.

핑, 머리가 도는 것 같은 순간.

사막 황제의 몸 위로 아로새겨지는 붉은 선.

“세에에에에에에에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타앙, 한 발의 총성.

“살상연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적주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툭,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목구멍에 걸려있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리는 소리였다.

“프흐억..”

입에서 혼을 뱉는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은 채지한은 이제 깨달았다.

압박.

리허설 때 권건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1세트, 2세트, 그리고 지금까지.

단 1초조차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것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FWX, FWXㅡ!”

밀려온다.

FWX가 밀려온다.

대자연의 마수보다 더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제 심장은 미친 듯이 뛰면서 두려움을 드러낸다.

그 앞에서 무력한 채지한은 그저 허둥지둥 간신히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모래를 모아.

아껴뒀던 시계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리뉴, 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2.5초.

암살자의 기본은 침착함이라고 했다.

채지한은 모든 미래를 하나하나 보고 온다.

그리고 그 속에.

“깡통, 깡토오오오옹 블릿츠으으으으!”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갑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악!”

"FWX가 찾은 마지마아아아악 조각!"

자신이 살아남는 미래는.

“사이다아아아아악! 그래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앱!”

없다.

“트릭ㅡㅡ ㅡ대의 끝ㅡ 도래했ㅡ!”

모래시계가 깨진다.

손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린다.

태초 과학의 손에 머리채를 쥐여 잡혀 숲으로 끌려들어 간다.

“세ㅡ! 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끝에서 연꽃의 주인이 총구를 들이댄다.

“ㅡㅡㅡ, ㅡㅡㅡ ㅡㅡㅡㅡㅡ ㅡㅡㅡ!”

모래 병사들이 허물어진다.

하나하나 허물어진다.

“안돼..”

트릭스터의 마지막 불씨는.

“안돼, 안돼..”

없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채지한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은 관중의 함성에 흔적도 없이 묻혔다.

산바람이 분다.

“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 ㅡㅡㅡ ㅡㅡ!”

모래가.

“ㅡㅡㅡ!”

산산이.

“ㅡㅡㅡㅡ!”

흩어진다.

“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 ㅡㅡㅡ!”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어온 바람은 끝내 모래 한 톨이나 유리 조각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날려 보낸다.

울창한 초목.

강 위로는 바위게만 기어 다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