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77화 (78/326)

77화. 봄비

[ 좋아 보인다. ]

“뭐가.”

[ 아니야. 요즘 나도 기분이 좋네? ]

릴리는 자기의 납작한 배를 툭툭 치며 쌔액 웃어보였다.

나도 조금은 느끼고 있다.

폐허가 된 줄 알았던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씨앗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이게 충격 요법이라는 걸까?

최악을 보여준 다음에 점점 더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

어쩌면 밀당은 내가 당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FWX, 당신들은 대체.

“아직은..”

그럼에도 불편하다.

계속 이겨야 하는데.

휘청휘청 할 때마다, 이 팀의 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해야할 일들이 남아있는 것처럼 마음의 거스러미가 사라지질 않는다.

“부족해. 중국 팀은 만만치않아. 지금 월챔은 완전히 중국판이야.”

[ 벌써 세계 무대를 꿈꾸고 계시는.. ]

“아.”

릴리가 한 쪽 입꼬리를 말더니 기분좋게 웃었다.

[ 괜찮아. 응원해. 너의 게임을. ]

마른 땅에 한 줄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내가 입을 다시 열려고 할 때.

- 똑똑

“건아, 있어?”

늘 그렇듯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방 밖에서 김예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오더를 하려면..”

릴리는 이미 사라졌다.

나는 문을 열었다.

창 밖을 보니 이른 봄비가 올 것 같았다.

#

빅스와의 경기 다음 날.

“드디어 끝났다! 지옥의 3연전!”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구먼.”

“야, 수고들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강팀 다 이긴 정글러 됐다. 개꿀.”

“윤도형 미친 소리 자제 좀.”

“설마 우리도 ‘강팀’이 되어버린 것인가..”

FWX 선수들은 휴식 시간에도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저 묘한 설렘과 긴장이 가득한 분위기.

구석에는 팀에서 설치한 작은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봉구, 너 이거 봤어?”

“먼데요?”

“너 설마 팀 채널 구독 안하니?”

문봉구의 손이 갑자기 바삐 움직였다.

“안 한 사람 있는감? 거수.”

“야.. 문봉구..”

“엣큥?”

최은호는 코 평수를 넓히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피드백 모니터 앞 소파에 앉았다.

“이번 다큐 영상 반응 되게 좋더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회수 잘 나오길래 콘텐츠 팀에 물어봤지. 지표 볼 줄 몰라?”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소파에 반 쯤 누워 쉬고있던 곽지운이 아무말이나 던져댔지만 최은호는 신경쓰지 않고 피드백 모니터에 자신의 화면을 미러링했다.

“뭐야? 뭐야? 이건 진짜 어떻게 하는 건데!”

“그냥 하면 되는데.”

“아 무냐고!”

곽지운은 벌떡 일어나서 최은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알려주세요, 은호에몽! 내가 하면 화면 자꾸 이상해진다니까? 세로로 뜨고 그래!”

“개시끄러워.. 컴맹.. 아.. 엔지니어님한테 물어보라고..”

사실 최은호도 몇 번 알려줬다.

폰이면 폰, 컴퓨터면 컴퓨터.

하지만 여전히 곽지운이 컴퓨터를 켜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LOS 뿐.

프로게이머 중에서도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다.

물론 프로게이머가 컴맹이라도 상관은 없다.

컴퓨터공학도와 컴퓨터 조립력의 관계 정도.

관심을 가질 만한 환경은 충분하지만, 반드시 잘 알 필요는 없다.

그 중에서도 곽지운은 아주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근데 이거면 우리 피드백 시간에 내 맘대로 화면 바꿔버릴 수 있겠네?”

“그게.. 참 나, 그렇게 해서 뭐하게?”

“막 해킹되는 거 아님?”

“이 새낀 해킹이 뭔지도 모르는 게 틀림 없다. 헤드폰 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랑 말 안해요.”

곽지운은 이미 USB부터 헤드폰 어댑터까지 모조리 아무데나 꽂아서 멀쩡한 부품을 여럿 파손한 이력이 있다.

“아니 알려달라고 최은호! 이거 최신 기술이냐고!”

최은호는 익숙하게 곽지운을 무시했다.

[ 시즌의 끝을 잡고 | Burn it up all EP.3 ]

미러링 화면에는 최근 팀 채널에 올라간 콘텐츠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이 따로따로 진행한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 Fancy (TOP) : 저점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봉구야, 너 나온다.”

“목소리 개 진지한데? 왜 사투리 안 씀?”

- RAON (MID) : 아, 또 실패하면 어쩌지. 또 잘못 되면 어떡하지.. 하고.

“예성이 어깨 좀 봐.”

“니도 운동을 해.”

- Poly (JUG) : 너무 크게 넘어졌어요. 쓰러져서 엉엉 울고 싶은 기분만 들었죠.

- 최수철 (Bravo) 코치 :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저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리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기본이고, 최선이었으니까요.

다소 무거운 초반 분위기.

최은호는 빠르게 화면을 넘긴다.

권건의 콜업, 그리고 승리했던 화면들.

익숙한 해설진의 외침이 들린다.

어느새 하나둘 자리를 소파로 옮긴 선수들이 잠자코 화면을 바라봤다.

최은호도 손을 멈췄다.

트릭스터 전.

- 우리가! 우리가 이겼어! 얘들아! 우리가 이겼어! 할 수 있어!

- 우리는 자판기도 쓰레기통도 아니였어!

- 건아! 건아! 건아아아아!

언제 촬영했는지, 누가 지르는 건지도 모를 환호 소리.

말한 본인도 언제 저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seZa (AD) : 구원이죠. 수호천사구요.

- Class (SUP) : 사실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 박진현 (PerBe) 감독 :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 GwonGun (JUG) : 다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 박진현 (PerBe) 감독 : 절대 한 사람의 등에만 짐을 지우지 않을 거예요. 이제 이정표가 생긴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함께 판단하는 팀이 될 겁니다.

영상은 끝났다.

개인 인터뷰 내용들이 꽤 진지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뽕이 쫌 차긴 하는데.. 엄청 오글거리네잉?”

“야, 우리 강팀 된 기분이었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 더 열심히 해야 돼.”

“댓글에서 팬분들이 다 응원해주고 계셔. 너네도 꼭 읽어봐.”

“근데 너 진짜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

“아 당연하지!”

“그럴리가? 최은호 구라치는 것 같다.”

바로 이어진 다음 동영상의 유쾌한 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풀어진다.

“어, 얘들아. 잘 쉬고 있었어?”

1, 2군 통합 회의를 마친 박진현 감독과 코치진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밥은? 밥 먼저 먹고 있지.”

“감독님!”

“오셨어요.”

“문봉구 인터뷰할 때만 사투리 안 쓴대요!”

“아니, 형, 그거이 아니고.”

“우리 오늘 치킨! 치킨 먹어요!”

갑자기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감코진을 향해 다가간 선수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댔다.

“치킨은 특별한 날만 먹는거라더니.”

“그러니까 오늘은 치킨이다!”

어리둥절해하던 박 감독은 웃었다.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

개인 연습은 솔랭에서 진행된다.

- STM 강수달 : 안녕하세요^^

- STM 강수달 : 사미레하고 싶은데 혹시 탱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서 때론, 아니 꽤나 자주.

얼마 전에 상대한 선수를 만나거나.

- 신선한사이다 : 저

바로 다음에 상대할 팀의 선수를 만나곤 한다.

- 신선한사이다 : 혹시 탑 좀?

- 종잇조각 : ㅈㅅ

- 신선한사이다 : 말파 할게요

- 신선한사이다 : 진심픽

아뿔싸.

또 너냐, 이렐 서폿?

- STM 강수달 : 혹시 다른 건 안될까요? 노틸이나..

- 신선한사이다 : ㅠ

- STM 강수달 : 꼭 하고 싶으시구나ㅎㅎ

강수달은 스톰의 원딜러, 신선한사이다는 다음 대진인 F.L.E의 서포터 유상준.

강수달은 심성이 아주, 아주 고운 원딜러다.

유상준은 같이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음.. ‘솔랭 그 녀석’이다.

- STM 강수달 : 그럼 저도 야쓰오 해드릴게요 ^^*

- coke500 : 진심? 딴거 안됨?

- 종잇조각 : 차라리 칼리가 낫지 않음?

인정.

- coke500 : 우정권인데

- coke500 : 닷지 유도 안 받아요, 저 닷지 안 함

왜 닷지 안 하는데.

- STM 강수달 :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

- 종잇조각 : 공중에 뜸 조합임? 그럼 난 탑 사이언

- coke500 : 그럼 미드 요른

설마.

고도의 심리전이겠지?

- STM 강수달 : 재밌겠다^^ AP가 부족하니까 권건님은 AP 쟈크 어떠세요?

- 종잇조각 : 굿굿 52려 좋아

- 신선한사이다 : 가보자고

진짜야?

다들 왜 이렇게 화기애애해졌어?

사람들이 미쳤어요.

이 큐에서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닷지를 모르는 남자.

절대 누군가 닷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알량한 마음가짐따윈 없다.

그래.

그래서 나는 쟈크를 들고 이 조합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 종잇조각(사이언)님이 가고 있음

그리고, 게임이 되고 있다.

솔랭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재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 신선한사이다(말파) : 1430top 1610jg 1630top tp

아주 옛날 생각을 해보자면, 나는 이렇게 연습이 되지 않을만한 판이 걸리면 내심 짜증이 나곤했다.

닷지를 위해서 계정을 여러개 두기도 했고.

닷지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긴 한데, 요는 나만 승부에 진지한 것 같아서다.

트롤이 있어서건, 이상한 픽이 있어서건.

이게 진짜 열받는거거든.

근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리니까 희석되긴 하더라.

가끔은 참신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평범한 구도는 이미 충분히 많이 만나봤으니까.

- 신선한사이다(말파) : 4

- STM 강수달(야쓰오) : 나이스^^

- 신선한사이다(말파) : 1430top 1610jg 1630top tp 18ad

그리고 사이다는 랭크에서도 스펠 체크가 성실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정말로 항상 픽도 게임도 '진심'인거다.

프로들도 솔랭을 할 때는 다양한 이유로 스펠 체크를 쉬기도 한다.

근데 그냥 관성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연히 도움이 되니까.

내가 상대 스펠을 기억한다고해서 아군들도 기억하고 있길 바라는 건 어느 랭크가 됐건 과욕이다.

디테일에도 선수들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룬이나 아이템 효과가 들어가는 계산은 리그전에서만 한다던가.

몇 초 단위는 절삭한다던가.

어쨌든.

말도 되지 않는 게임을 이긴다는 건 솔랭에서도, 리그에서도 종종 나오는 일이다.

내 쟈크는 하늘을 날고.

요른이 길을 깔아주면 그 위로 사이언이 달린다.

“봉구야! 봉구야! 큐 잡혔다! 뛰어!”

그리고 그 뒤에서 말파가 들이받으면서..

“어억!”

야쓰오의 궁극기가 슥삭 적을 베어내는 그림같은 한타.

“와이구야, 수락! 수락!”

딜에 올인하면서 몸이 말랑말랑해져 산산조각난 내 쟈크 위로.

“봉구야.. 바닥에 흘린 젤리 다 치워라.”

위기의 순간, 스펠을 교체한 말파가 나를 위해 텔을 써준다.

“건이야. 이거 젤리 묵을래?”

“아뇨, 바닥에 떨어진거잖아요.”

“우찌 알았지. 쌉고수.”

이렇게 엉망진창인 솔랭이라도.

꽤 재밌을 때가 있다.

“야, 니들! 허리 펴고! 스트레칭하면서 해! 손목 나간다!”

“은호 형 잔소리 때문에 귀가 찢어지것다. 그쟈?”

FWX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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