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간택
벌써 8주차.
사실상 스프링 시즌이 다 끝나가고 있다.
최근의 LKL이 원탑, 투탑 체제로 굴러가지 않고 상위권 팀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동부와 서부가 갈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부는 올해 다소 강한 모습을 보인 인천 트릭스터를 바짝 따라붙는 네 팀.
서울 빅스, 성남 스톰, 광주 미라쥬, 대구 유니버스.
그리고 동부는 ‘수문장’ 수원 해머스를 필두로 한 부산 호넷, 대전 FWX, 제주 F.L.E, 울산 피닉스.
이 벽은 꽤 두꺼운 것이어서.
작년에도 해머스와 미라쥬가 자리를 바꾼 것 외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프로게이머 지망생들도 네임 밸류가 있는 팀으로 가고싶기 마련이니까.
분명히 그랬었는데..
제주 F.L.E 감독은 긴장감에 입술을 오므렸다.
지금 권건은 LOS판의 황태자였다.
오더면 오더, 챔프 폭이면 챔프 폭.
숙련도면 숙련도, 솔랭 1위에 유지까지!
상대가 압박 밴픽을 해도 긴장을 안해, 인터뷰 매너도 좋아, 얼굴도 잘생겼어.
그야말로 스타성 만점.
얼마전까지 스톰 2군에서 보여줬던 성적에서 지금의 상승력을 생각했을 때.
어쩌면 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더 나아갈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괴물은 타 팀의 팬들조차 한번 쯤 돌아볼 만한 매력덩어리였다.
권건이 나타나면서 낙수효과로 FWX의 팀원들의 매력도 하나하나 재조명되고.
듣기로는 의류 스폰까지 더 붙었다고 한다.
아니, 대체!
어디서 저런 황금 같은 선수가 FWX를 간택한 건가!
“와.. 부럽다. 진짜 너무나도 부럽다.”
몇 년째 숨을 참으며 2군 선수들을 육성하는 중인 F.L.E 입장에서는 땅을 칠 노릇이었다.
F.L.E 퓨처스는 우리도 엄청 강한데!
다른 팀에 비해서 대우도 훨씬 좋은데!
거기다 팀명도 비슷한데!
대체 왜!
우리 팀에 안오고 FWX로 갔을까!
혹시 한번 더 삶이 있다면 제발 F.L.E로 와주면 안될까!
“그러게요.”
“배가 아프다. 수민아. 배가 아파. 휴우.”
며칠 째 이런다.
F.L.E 코치 이수민은 감독 오지현의 투정을 들으며 묵묵히 입 안으로 밥을 밀어넣었다.
“또 이러신다.. 밥이나 드세요.”
“밥? 그래, 밥이 문제였을까?”
“뭐가요?”
“FWX가 밥이 맛있다고 소문 났잖아.”
“설마요.”
“우리도 맛집인데.. 촬영도 많이 오는데.. 양식 한식 선택권도 있는데..”
“그렇긴 하죠. 이건 뭐지, 마늘 후레이크인가.”
이수민 코치는 볶음밥을 뒤적였다.
마늘 후레이크에 따로 볶은 해산물, 계란 후라이까지.
손이 많이 간 티가 난다.
“퀄리티 좋네. 아니, 우리가 맛집 양대산맥 아니냐고!”
“추천금이 문제일까요?”
“추천금? 우리 지금 추천금 얼만데?”
“추천 선수 2군 로스터 등록 시 100만원이요.”
“괜찮은데? 그게 너무 적은가?”
“걔네 2군은 추천 시 문상이래요.”
“뭐?”
“문화 상품권요.”
“으아아아!”
오지현 감독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 끝을 떨었다.
“문상 얼마어치!”
“뭐.. 얼마인게 문제가 아니고, 그냥 물 건너갔다는거죠. 듣자하니 친구 추천이라는 것 같던데.”
“이 판에서 친구가 무슨 소용이야!”
“중요하죠.”
“그건 맞지.”
오 감독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아픈 건 배가 아픈 거고, 밥은 밥이다.
“트레이드 건은? 어떻게 됐어?”
“잘 안됐어요. 아시다시피 시즌 중 트레이드는 연습 시간 확보가 어려우니까. 아무래도 스토브 리그 시즌까지 봐야할 것 같아요.”
“쉽지 않네.”
“그러게요. 이제 우리가 지옥 대진인데..”
이 코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주 F.L.E의 남은 대진은 대전 FWX, 인천 트릭스터, 성남 스톰, 수원 해머스다.
어떻게 보면 FWX의 앞선 대진을 이어받은 것처럼.
하지만 이미 3연패 중.
FWX를 만나는 이번 타이밍이 그나마 ‘해볼 만한’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제 그렇지도 않다.
“도원결의는 다 죽었냐..”
하위권 삼형제, FWX, F.L.E, 피닉스.
8, 9, 10위로 내가 형이니 니가 형이니 도토리 키재기를 하던 세 팀.
하지만 FWX가 피닉스를 니픽쩔로 무릎꿇린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버렸다.
순간적이지만 7위도 찍어먹어 본 상황.
“다음 시즌.. 봐야겠지.”
제주 F.L.E의 이번 시즌은 사실 지난 주 부터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7주차까지의 성적이 4승 10패, 9위.
남은 대진까지 생각하면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은 어렵다.
작년처럼 꼴찌만 면하자는 심산이다.
“쟤들도 다음 시즌 볼걸요?”
정말로 권건같은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아니, 나타나도 올 시즌은 틀렸다.
이미 늦었으니까.
“나 다시 배가 아프다.”
“그만 부러워하시라니까.”
“아니. 진짜로. 화장실 간다. 이따 위에서 보자.”
“그럼 조용히 좀 가요, 제발.”
밥을 먹던 이 코치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
우리는 피드백 룸에 모여있었다.
분위기는 전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훨씬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
“어, 봉구 너 머리 잘 잘랐네. 웬일이야.”
“맨날 세 번 자를 거 한 번에 잘라오더니. 인물이 훤하다.”
짐을 좀 내려놓자, 이제는 주변이 좀 보이는 모양이다.
“마, 인자 게이밍 헤어 탈출이라 안하나.”
“아무튼 전에 가던 곳은 아닌 게 확실함.”
이런 부분에서 예리한 최은호가 가장 먼저 알아봐주자, 문봉구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우찌 알았지?”
“그건 너만 모를거야. 그곳이 블랙리스트라는 걸..”
“그래서 어디서 잘랐는데.”
“고마 예성이 따라.”
“역시 예성이.”
김예성은 딱히 머리를 자른 것 같지 않은데.
둘이 꽤 친해진 모양이다.
“잘 어울린다.”
“건이도 거기 다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있는 무난한 브랜드 미용실이다.
“쟤는 미용실이 문제가 아니야.”
“권건 게임 실력 vs 권건 외모.”
“존나 고민된다..”
“근데 쫌 비싸다. 전에 가던데는 만날 알아서 감으라 카던데.”
“좋은 데도 좀 가고 그래, 봉구야.. 돈 벌잖아.”
“좋긴 좋드라. 마사지도 좋고. 커피랑 과자도 계속 주고. 와플도 구워주고. 쫌만 더 있었으면 밥도 먹고 올 뻔했다.”
문봉구의 소박한 말에 나도 피식 웃음이 비져나온다.
정말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것들이 있는 줄 몰랐던 문봉구다.
“이런거 보면 뭔가 봉구가 상남자같긴 해.”
“잘 어울린다. 보기 좋네. 자, 이제 그럼 시작할까.”
박 감독님은 문봉구에게 따봉을 해주고는 화면을 조정했다.
가장 먼저 뜬 것은 최근 기록지다.
“우리 지금 완전 센 거 아니에요? 빅트릭스톰 다 이김.”
“은호야, 방심하지 마라.”
가장 신나보이는 건 최은호였다.
개인 SNS가 칭찬으로 도배된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LKL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서포터 중 하나인 바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바도의 대명사격으로 올라왔다는 점이 그랬다.
잠깐 반짝하는 정도지만.
이런 상황들이 여러 번 반복되면.
그제서야 그것이 시그니처 픽이 된다.
선수가 자신만의 시그니처 픽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리그에서 다른 선수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픽을 나 혼자 잘한다던가.
흔한 챔피언이지만 그 챔피언을 잡았을 때 유독 승률이 좋았다던가.
여러가지 이유에서 시그니처가 되지만, 이건 선수가 정하는 게 아니다.
해설진과 팬들이 만들어나가는 일종의 이미지.
“바도 또 보여달라는 말이 많아요.”
“은호 형. 휘둘리면 안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 반대로 선수 입장에서 함정에 빠져서 문제가 될 때도 있다.
팬이 경기를 관람한 뒤 하는 그 픽이 좋아보인다고 말해주는 칭찬과.
선수가 실제 한 플레이 사이에는 분명히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할까.
‘결과 중심적 분석’과 ‘과정’은 다르다는 이야기다.
만약 우리가 그 판을 졌다면?
바도는 쓰레기 픽이 됐을지도 모른다.
메타가 변한다면?
시그니처 픽은 스스로를 썩은 챔피언에 가두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판을 잘했다는 게 그 선수의 그 챔피언 숙련도를 말해주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칼바람.
생전 안하던 챔피언이 랜덤으로 걸려서 했는데 나도 모르게 캐리해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건이가 말 잘 해줬다. 대신, 다음에 각 나오면 꼭 한 번 더 해보자.”
“네, 좋습니다!”
최은호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날 향해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래도 이런 무기가 늘어나는 건 좋은 신호야.”
“맞죠. 그러니까 이번 F.L.E 전에서는 좀 더 다양한 픽을 써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음.”
박 감독님은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LOS도 기록의 스포츠다.
상대적 약팀과의 경기에서 다양한 챔피언을 사용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장기적인 데이터 전쟁에서 도움이 된다.
만약 그 픽이 ‘숨겨놓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긴 하지만.
당장 이번 시즌에서 P.O 진출권이 스스로의 손에 달려있지 않은 FWX 입장에서는 그렇다.
“상대 바텀은..”
결국.
시그니처 픽을 보유한 건 틀림없는 장점이다.
설혹 그 챔피언에 걸맞는 메타가 아니더라도, 시그니처 픽이 된다면 상대가 언제 그 픽을 꺼내들지 모른다는 점에서 팀에 도움이 된다는 것.
완전히 쓸 수 없는 메타라면 몰라도.
각이 나오는 순간 갑자기 나오는 픽은 상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건이, 최근 솔랭에서 쓴 정글 다 익숙하지?”
“네.”
“그럼 혹시 좀 불편하거나 손에 안맞는 정글은 뭐 있어?”
나는 잠깐 생각했다.
손에 안맞는 정글..
“유마?”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최수철 코치님이 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서있는 김한빛 코치님을 쿡쿡 찌른다.
“아, 웃기다. 한빛 형님은 블츠에 걸었거든. 스킨 내기했어.”
“하.. 서사 등급에서 골라라.”
“신화에 크로마까지는 주셔야지. 정확하게 맞췄는데.”
“그건 진짜 에바야. 솔직히 그 다음이 블츠였을걸.”
확실히 블츠 정글도 쉽지는 않지.
“대회, 솔랭. 기준을 어떻게 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
내가 진지하게 입을 열자 왠지 다들 웃었다.
“역시.. 건이 너는 한계가 없구나.”
제대로 알아들은 김예성.
“속보, 속보! 권건. 유마는 쓸모 없는 챔피언.”
선동과 날조의 곽지운.
“야, 건이가 언제 그랬냐? 유마의 매력을 모르는 니가 불쌍해.”
애묘인 최은호.
“하하, 건이도 역시 유마 정글까지는 안되는 건가배. 인간미 있네!”
그리고 나의 됨됨이를 칭송하는 문봉구.
“유마 삭제 좀.”
“멀쩡한 챔프를 어떻게 삭제하냐?”
하지만.
정글러와 챔피언의 한계를 정하는 이 대화?
불편하다.
“생각해보니 됩니다. 다음에 솔랭에서 아군으로 만나면 제가 유마 정글 해드릴게요.”
피드백 룸에는 두려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슈우우웅, 슈우우우웅.”
나와 점수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감독님만 입으로 유마 소리를 낼 뿐.
이게 바로 정글러의 영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