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66화 (67/326)

066화. 탑의, 차이

우리 탑은 약하다.

LKL에는 10개의 팀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력 수치로 봤을 때 가장 안좋다.

물론 이건 애매한 피지컬 정글러와 섰을 때 얻은 지표다.

문봉구는 랭커다.

최소 국내 0.1%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다.

그럼 랭크 게임에서 고작 서너가지의 챔피언만 할 리가 없다.

당연히 문봉구도 온갖 챔피언을 다룰 줄 알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벽을 느끼

게 했을 것이다.

스크림을 할 때는 솔로킬 머신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 무력 수치가 나쁘다는 건 완전히 잘못 알려진 정보인가?

그렇지는 않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한정된 자원을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미드 바텀 쪽으

로 투자하는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리고 꽤 오랫동안 이런 것들이 문봉구의 몸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일종의 교착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네 탓이 아니다. 우리가 좀 더 완벽히 대처했어야했어.”

박 감독님은 침착하게 문봉구를 달랬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방금 세트, 탑은 박살이 나다 못해 마구 짓밟혔다.

심지어 상대는 스킬샷 사이사이 인장을 띄우기까지 했다.

리그에서의 인장이란.

예전에는 금지되어있었지만, 어느 순간 풀렸다.

어디까지나 인장도 게임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근데 가끔 이것도 논쟁거리가 될 때가 있다.

이게 참 복잡한데, 게임에서 인장을 띄우는 것이 가끔은 친목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너 나 못이겨’ 따위의 도발이 되기 때문이다.

이기고 있는 팬 입장에선 환호할만한 재미, 지고 있는 팬 입장에서는 분노 유

발이다.

종합 격투기에서도 상대의 가슴을 툭툭 치며 도발하곤한다.

심지어 야구나 축구를 할 때도 빠던이나 넛메그 등이 있지 않은가.

뭐, 그거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당하는 입장에서 틀림없이 평정심을 흐트러뜨리는 요소다.

내가 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그 불편감.

스톰 탑 최영광은 본인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다.

일대일로는 거의 져본 적 없는 자신감.

꽤 오래 같이 생활을 해봤는데.

확실히 자신감 넘치고 도발적인 선수다.

인장질을 실컷하고 결국 지면 상당히 민망하기 때문에 아끼는 선수들도 많은

데, 이 선수는 그런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다.

다행히 이 도발이 문봉구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입히지는 않은 듯 하다.

문봉구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겉으로는.

“아임다. 첫 판에도 탑 후픽한다고 많이 밀렸잖어요.”

“이번 세트도 그렇게 가져가는 게 맞긴 할 것 같다.”

“어차피..”

문봉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뭘 가져가도 제가 집니더. 글로리 선수, 엄청 세거든여.”

뜻밖의 인정.

하지만 속이 편할 리가 없다.

“저 때문에 졌지 않슴까. 솔직히. 완전 저 때문이었는데. 쪽도 못 쓰고 져버

리는 거, 너무 미안합니더. 다들, 미안해. 내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하는긴데.”

문봉구가 사방을 둘러봤다.

“야. 봉구야.”

한참 가만히 있던 곽지운이 입을 열었다.

“너 물고 늘어지겠다고 하는 거 웃긴다?”

너무 태연한 말투여서 다들 당황했다.

“깍지 너 그만..”

곽지운은 최은호 앞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뭘 물고 늘어져. 그럼 걔가 물려 준대? 그냥 하면 돼. 자원 달라고 하고, 탑

중심으로 하자고 해. 왜 그렇게 말하냐?”

곽지운은 평소의 말투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기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가 나거나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형..”

“얻어터지다보니 정신도 그렇게 됐냐? 아니잖아. 너 트릭스터 오드도 이겼어.

니가 제일 좋아하는 픽 해. 우리가 뭐 언제는 맨날 이겼냐? 건이가 멱살 잡고

캐리한거지. 우리 원래부터 좆밥이야.”

곽지운의 말에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다들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냥 부족한 거 인정하고 할 수 있는만큼 최선을 다해. 그게 우리 팀이잖아.”

곽지운은 할 말을 다 했는지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운아..”

모두가 잘 안다.

으레 원딜들이 그렇듯이.

우리 팀 원딜러 곽지운도 자존심이 강하다는 걸.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럼, 저.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겠심다.”

문봉구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FWX는 약한 팀이다.

분명히 그렇다.

근데.

약한 팀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음, FWX에서 좀 더 강경 대응을 할 줄 알았는데요.”

“이번에는 좀 더 단단하게 가져갑니다. 아까는 덜 단단해서 맞은거다, 그렇게

판단한 걸까요? 요른이 나왔습니다.”

- 그저 탱커 원툴ㅋㅋㅋ

- 그럼 그렇지ㅋㅋㅋ

- 이번 게임도 노잼^오^

- FWX 화이팅..

“반면 스톰에서는 카뮐을 가져가면서 글로리 선수의 무력을 제대로 보여줄만

한 게임이 될 것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미드에서는 킹 선수가 다시 한 번 죠이를 꺼내들었구요. 탑을

맡겨놓고, 미드에서 라인전을 강하게 압박해보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 세

트에서 라온 선수의 라인전이 꽤 거셌거든요.”

“권건 선수는 그브로 비예고를 상대합니다. 그브가 좀 할 거 없을 때 픽되는

경향도 있어요. 스톰이 밴을 잘했기 때문일까요. 그브가 참 균형잡힌 챔피언

이긴 한데, 균형잡힌 챔피언들이 또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렵죠.”

해설진은 밴픽이 완료된 두 팀을 보며 각각 의견을 내놨다.

“결과적으로, 스톰은 1세트에서 보여줬던 체급 차이를 이용해서 찍어누르면서

비예고가 마무리를 하는 그림으로 보이구요.”

“FWX는 중반부부터 힘을 쓸 수 있는 챔피언들과 다양한 CC를 이용해 메이킹을

노려볼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FWX가 스톰이라는 거대한 벽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자, 지금부터 2세트

경기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 세트를 지고 들어가는 건 불리하다.

트릭스터가 그랬듯, 이번 세트를 져버리면 바로 매치 패배를 하게된다는 압박

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탑으로?”

“아니. 괜찮어.”

하지만 나는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얼씨구. 쟤 수확낫 시작인디?”

“어, 이득. 우리 봉구 라인전 버틸만 하겠네.”

“이게 뭔 이득인고?”

“아무렴 무장하고 오는 것 보다는 낫지. 그럼 우리 봉구 두 번째 웨이브에서

죽었을텐데.”

“허이고, 진짜로. 됐다. 마.”

이 팀은 지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지는 데에 익숙하다.

그래서 확실히 덜 무너진 것 같다.

그리고.

“형들. 이 경기 이기자.”

“예성이 니도 나랑 같은 마음인가배.”

“최소 무승부 고.”

“무승부가 어딨냐? 다 집중해.”

왠지 아까보다 훨씬 더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건이가 다시 스톰 간다고 하면 어떡하냐?”

“절대 안보내지. 건이 우리랑 60년 계약한거 몰랐냐?”

“진짜?”

“구라지.”

아무래도 그건 나 때문인것 같다.

“...”

조금 웃기다.

계약을 뭐 새끼 손가락 걸고 한 것도 아니고.

“붐보이도 잘하던데.”

“야. 은호야. 저기 붐보이 대신 건이가 가있다고 생각해봐.”

“와우, 존나 끔찍한걸?”

“이제 어때?”

“다시보니 만만하네.”

분위기는 오히려 좋아졌다.

다른 팀에서 첫 세트 패배를 하고나서와는 많이 다른 결이지만, 어쨌든.

하지만 중요한 건 탑이다.

결국, 탑.

“이야, 팬시 선수. 기 죽지 않았는데요? 제대로 이를 갈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역시 요른 권위자인가요? 하지만 글로리 선수도 충분히 좋은 성장

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지금은 굳이 싸움을 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미드에서는 두 선수 모두 꾸준히 잘 해주고 있습니다. 라온 선수의 아라가

킹 선수의 시그니처 픽 중 하나인 죠이를 상대로 훌륭하게 딜 교환을 하네요.”

“방금 귀환을 끊어 준 건 상당히 좋은 플레이였어요.”

“바텀은 이즈 노틸과 셰나탐 조합이 맞붙었는데!”

“아, FWX가 살짝 스펠 교환 해주면서 다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다보면 결국 어느 쪽 정글이 오냐가 중요하죠.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네요.”

각 라이너들은 최대한 열심히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전에 몸을 적당히 사리던 것 보다 훨씬 더.

한 라인이 몸을 사리면, 다른 라인이 위험해지니까.

모두 같이 위험 부담을 나눠가지겠다는 거다.

“나 문봉구, 포기를 모르는 남자.”

나는 말로 팀원들의 멘탈 관리를 해주는 데에 큰 재능은 없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정확한 정보를 주면서 꾸역꾸역 성장하는 것과.

결국 힘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플레이를 선보이는 것 뿐.

“아! 지금 권건 선수가 과감하게 카정을 들어가는데요.”

“비예고 동선이 파악된 상태니까 들어가서 깽판을 놓겠다는 심산이죠?”

“밀어내는 데에 부족함은 없어요. 약간의 이득을 챙깁니다.”

탑 차이를 눈으로 목도한 이상,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다.

심지어 늙은 너구리 최영광은 문봉구가 만만하다는 걸 눈치채고 좀 더 먼 미

래를 그리고 있다.

확실하게 우리 팀을 밟아버릴 계획을.

“할 수 있겠어요?”

“가자. 할 수 있다. 꼭.”

그래서 해야한다.

문봉구도 알고 있다.

개인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어떤 확신이 있나요, FWX? 바로 전령 쪽으로 몰립니다!”

“어, 지금 상당히 이른 타이밍이에요! 양 쪽 서포터들은 아직 5레벨입니다!”

그리고 1 세트에서는 내가 이니시를 나눠들어주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제 자신이 이니시의 핵심이라는 걸.

- 곧 멸망 예정ㅋㅋㅋ

- 또 CS 차이 나는데ㅋㅋㅋ

- 저러면 탑 가줘야하는 거 아님? 왜 정글 RPG만 함?

- 망한 라인 가서 같이 망할 일 있냐

- 고작 이게 다냐 FWX? 고작 이게 다냐 FWX? 고작 이게 다냐 FWX?

“전투, 전투 보나요! 빼지 않습니다, 스톰! FWX한테 전령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요!”

“FWX, 전령 먼저 치기 시작합니다!”

확실히 불어난 적의 수.

그리고.

“나, 너네 믿는다잉.”

아주 찰나.

‘적절한’ 각이 겹치는 순간.

“봉구 형.”

빨려들어가는 큰 호흡.

“요른, 요른! 뿔피리!”

“뿌우우우우우우!”

꽤 오래 연습해온대로.

문봉구는 숨을 반 박자 빠르게 몰아쉬고.

“지금.”

“..꽈앙! 엇박자아아아아!”

“요른의 점멸 빨리 박기! 반응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나머지 호흡은 팀원들과 다함께.

정신없이 빠르게 몰아쉰다.

“노틸이 함께 들어갑니다! 그랩!”

“이즈, 이즈, 이즈 궁극기! 그브 프리딜! 프리..!”

“순식간에! 순식간에에에에에! 한타에서 대형 득점을 기록합니다, FWX!”

“추격, 추격! 죠이가 간신히 살아갑니다!”

“진짜 미친 리듬감! 적이 합류하는 그 순간 바로 돌아보면서, 요른의 진짜 가

치를 보여줍니다!”

“실패가 무섭지도 않았나요! 팬시! 이건 대체..! 이렇게 간이 큰 선수였어요?”

“호응이 안되거나 빨리 박기에 실패하면 궁극기에 점멸까지 빠진 거나 마찬가

지였는데!”

“이게 스톰이 방심했다기보다는 이렇게 크게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서로의 서포터가 6레벨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그 점을 노렸죠. 하지

만 동시에, 아군 노틸도 6레벨을 찍지 못해서 부담감이 있었을 텐데..”

“이거, 일종의 요른 잡기술이거든요? 하지만 띄운다고 바로 연계 될 걸 확신

할 수 있었는..”

“나이스!”

“문봉구 신뢰의 박치기 지렸다.”

“믿는다잉 이 지랄.”

“나, 문봉구. 탑의 승리보다 팀의 승리를 바라는 진정한 탑.”

“인정.”

그 한타의 끝에서.

문봉구는 상대를 이길 방법을 알아차린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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