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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9화 (10/326)

009화. 탈모빔

벌써 2번의 승리를 챙겼지만 아직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 경기는 무수히 남아있었고 연습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아니, 경기가 모두 끝났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음 해,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경기는 이어진다.

여기서 도태되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번 생이건 다음 생이건 우승을 한다면 그 다음에 내가 뭘 해야할까?

아마 또 LOS를 하겠지.

프로를 계속 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지독한 LOS의 매력이 나를 놓아

주지 않는다.

그 때는 어떤 패치가 생기고, 또 뭐가 달라질까?

이 너머로 가고싶다.

#

“야~ 거니거니 권거니~”

“어, 차니차니~”

적당히 반응을 해주자니 옆자리에 앉은 유찬이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얘는 꼭 10살짜리 남동생같네.

“너랑. 나랑. 한 팀. 이것은. 승리.”

“너 서폿 갈레오 밖에 할 줄 모르잖아.”

연습 솔랭 중 유찬이와 같은 팀에 걸렸는데 유찬이의 포지션이 서폿이다.

“노노. 다른 거 보여드림?”

“아니.”

“진짜. 나 셰나도 할줄 암. 24분부터 하드 캐리.”

“24분에 뭐 있어?”

“아니? 보통 내가 그때 강해짐.”

“...”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네.

“오마이깟! 베이거다. 오마이깟! 저거 서폿이야. 100% 장담!”

이제 상대 픽에 나온 베이거를 두고 호들갑이다.

“왜?”

“전 판에 만났어! 저 개똥챔! 쓰레기챔! 진짜 개 쎔!”

아니, 쓰레기란거야 아니란거야.

헤드셋을 쓰고 있는데도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다.

“그냥 해.”

“권거니 무뚝뚝 극혐. 나한테 관심 안 줌. 디코 고?”

“안 해.”

“까비.”

게임이 시작되고 로딩 창이 떴다.

“오마이깟! 상대 미드 창민쓰!”

상대 미드라이너의 아이디에 FWX lilma, 화려한 신드리 스킨.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창민이도 소리를 지른다.

“오마이깟! 상대 써폿 차니형!”

아, 이 시끄러운 놈들 진짜.

“오마이깟! 오마이깟! 오마이깟!”

이제 양 쪽에서 난리다.

“차니형 전판에 1킬 9데스 박아버렸던데. 이번 판도 편하게 가자?”

“아 열받게하지마라, 진짜 캐리해버린다.”

“오케오케, 쏘리쏘리 아리가또.”

시끄럽게 시작된 게임은 좌충우돌이었다.

“갈레오 서폿 바로 사망했죠?”

“아 E를 맞아줬어야지~ 원딜이 날 안지켜주네?”

“누가? 원딜이? 형을? 왜?”

“어!! 우리 원딜이! 이거 둘 다 잡는 각이었는데?”

어림도 없다.

둘 다 잡히지 않은게 다행이지.

“아! 건이형 미드에 무슨 직선갱을 와?! 진짜 짜증나!”

“와우! 미드에서 직선 갱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창민이는 확실히 미드 정통 메이지에 익숙하다.

다만 자신의 컨트롤을 과신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점이라면 판단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

아쉬운 이야기지만 2군 팀에서는 흔한 케이스다.

만약 창민이가 더 적극적으로 새 챔피언 연구를 했더라면 이전 팀인 대구 유

니버스에서 좀 더 기다려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미드라인 밀러 갈게, 거니거니 바텀 먹어~”

“형이 뭔데 미드를 밈? 서폿 아님?”

“서포터 무시하지마라. 감히.”

서폿템을 들고 당당하게 CS를 먹는 유찬이는 음, 이건 솔랭이니까 이 판은 치

지 말자.

나는 솔직히 이유찬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왜 전에는 몰랐을까.

결국 잘 하는 선수들은 어디에 있건간에 눈에 띄게 되어있다.

칼챔을 선호하긴 하지만 탱커도 꽤 잘한다.

처음하는 챔피언도 연습 모드에서 10분이면 금세 플레이해내고, 남이 하는 뉴

메타를 보고 그 이상으로 소화해내기도 한다.

“어, 야, 창민아. 이거 버그같은데. 이게 왜 죽지?”

“완전 죽는 각이었는데? 2001년부터 죽는 각이었음.”

“그 때 LOS가 있었냐?”

“응 내가 해봄~”

“형님이세요?”

하지만 아마도, 유찬이가 뜨지 못한 이유는 이런 점 때문일거다.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확보되는 레벨과 구도, 아이템 등의

감각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천재적인 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공부에 소홀해진다.

패치노트나 상세한 스킬 설명같은 것들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로운 아이템이 나와도 일단 써보면서 몸으로 익히는 타입이고, 스펠이나 룬

도 느낌에 따라 정한다.

감은 절대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다.

단지 체득된 경험과 천재성이 뛰어나기에 항상 정답에 근접할 뿐이다.

피지컬 바람이 분 LOS 유망주 선출 기준에 잘 부합하는 선수다.

다만 프로 리그에 최적화되어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아! 이게 안죽어?”

“응 나 갈레오~”

“아니 솔직히 건이형 슈퍼세이브잖아! 나도 시팅받고싶다고! 아, 우리 정글

뭐해.”

“응 서폿차이야~”

“아 진짜 서폿 유찬이형은 줘도 안가져.”

“응 김창민 너 죽으면 리폿. 사유. 서폿한테 사망.”

“진짜 짜증나! 요새 신드리 못해서 그래!”

글쎄, 솔랭에서는 상관 없는 이야기들이다.

미드 신드리가 서폿 갈레오에 죽었다던가 하는 것들.

많은 코치님들은 좀 더 선수들이 진지하게 연습에 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

기를 바라겠지만 말이지.

“아~ 캐리. 너무 쉽다 김창민.. 너무 쉽다 바텀 라인전. 달다.”

신드리를 솔킬 낸 유찬이의 뒤에는 아군 원딜의 희생과 내 노고가 있었다.

당신이 이상한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잘 되는 느낌이라면, 그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어질어질하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을 모두 리폿하는 것 밖에 없었다.

#

솔랭을 연달아 돌리고 잠시 공용 휴게실에서 쉬던 중 안면있는 선수가 다가왔다.

“안녕.”

최은호.

LOS FWX 1군의 서포터 포지션 선수다.

“안녕하세요.”

이 선수 역시 특별히 두각을 보인 일은 없었지만, 지나간 생애 중 몇 번 정도

는 인사를 나눠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단체 소개에서 안면을 트고 오며가며 목례하는 정도.

따로 말을 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약간 묘한 기분이다.

“내 이름 알아?”

“네. 최은호 선수님이잖아요. 팬입니다.”

팬이랄 것 까지는 없지만, 최은호는 겉치레를 좋아한다.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지만 밉보일 이유도 없지.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최은호가 손을 내민다.

“뭘 그렇게 어렵게 불러. 형이라고 해도 돼.”

“네, 형.”

“우리 아까 솔랭에서 만났잖아. 너 잘하더라? 오더도 나랑 비슷하게 하고.”

최은호는 핑을 굉장히 많이 찍는 편인데 그걸 오더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그다지 의미 있는 핑이 없었기에 무시 옵션을 켜놓고 했는데, 다행히 눈치 채

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래요? 형이 잘 해주셔서.”

“아, 진짜?”

최은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니가 정글로 걸리면 내가 뭐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아. 완전 마음 잘 통하는

것 같더라고. 아직 듀오되면 좋았을텐데. 돼도 안받아주려나?”

그거야, 내가 최은호라는 사람은 잘 몰라도 게임 속에서의 스타일은 잘 아니까.

솔랭 정보가 노출된다는 것을 의식하는지 킬 관여율에 목숨을 건다.

그러니까, 나만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다.

그럼 당연히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밖에.

“아까 점 부쉬에서 친 짜오 잘랐던 거 기억나? 그거 진짜 괜찮았어. 블루 먹

고 돌아서 내려올 걸 알고 있었던거야? 어떻게 체크한거야?”

“일부러 바위게를 안 먹었거든요.”

“아. 근데 그 때 내 스킬 콤보 괜찮았지? 딱 좋게 벽 너머로 밀어버리고.”

최은호는 언뜻 동선 이야기를 질문하는 듯 이것저것 물어봐놓고서는 자기 이

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묵묵히 듣고 있자니 약간 피곤해진다.

“건이. 맞지? 권건. 아이디랑 이름이랑 똑같지?”

“네. 맞아요.”

“좀 무뚝뚝한 타입인가보네. 이런 스타일이 진짜 게임 잘하거든. 동선 이야기

더 하고 싶다. 친추해도 돼?”

실제로 동선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놓고, 최은호는 당연히 허락할거라는 표

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안 받아놓고 있던 친구 추가 요청이 몇개더라.

그래도 이렇게 말까지하는데 거절 할 수야 있나.

“그럼요. 친추 주시면 기쁘게 받을게요.”

“오키. 그럼 나 지금 연습실 가서 바로 건다. 형님 민망하게 만들면 안돼, 알

았지?”

거절에 두려움이 있는 타입이었나?

사실, 예전에도 나에게 몇번이나 친추 요청을 걸었던 사람이다.

받아 준 적은 없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은호는 손을 흔들고 멀어진다.

[ 쟤, 너를 부하 삼고 싶은가봐. ]

최은호가 멀어질 때 즈음, 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수염은 어디갔어?’

릴리의 코 밑에 붙어있었던 질리얀 수염은 감쪽같이 없어져있었다.

[ 아빠가 떼어버렸어. 난 아빠를 닮아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

오.

없어지면 악마 세상 같은 곳에 다녀오는 건가?

이건 세계관이 넓어진 기분인데.

‘수염이 없는게 더 잘 어울려.’

[ 그..래? 그럼, 뭐, 그럼, 음, 나 딸기가 먹고 싶어. ]

릴리는 조금 부끄러워하다가 새침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 아주아주 예쁜 딸기면 좋겠어! ]

칭찬해줬더니 말이나 돌리고, 조금 심술이 난다.

내가 무슨 과일 셔틀인 줄 아나.

그리고 아주아주 예쁜 딸기가 뭐야.

‘딸기? 내가 왜 딸기를 줘야 하는데?’

[ 왜..냐고? 왜? 어, 어.. ]

릴리가 할 말을 잃어버리고 허공에 손을 바르작거린다.

‘그건 계약에 없는데?’

[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도.. 나는 어.., 야, 왜 웃어? ]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순진해빠졌을까.

릴리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세상에는 간섭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냥 유령처럼 돌아다닐 수 있는 정도.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볼 게 이런 것 밖에 없다니 좀 걱정되기도 하고.

‘아니, 그냥.’

[ 걱정 냄새가 나는데? 나는 네가 걱정해도 될 만한 존재가 아니야, 내가 얼

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데. 아직은 조그맣지만, 엄마가 그랬어. 나는 정말 위

대한 존재가 될거라고. ]

‘그래, 그래.’

그래도 이 꼬마 악마가 찾아온 것은 선물같은 일이다.

정신만 침잠된 지루한 삶 속에서, 한 줄기 흥미 같은 것.

[ 진짜라고! 이.. 이, 못된 아이같으니라고. 벌을 주겠다! ]

릴리의 손에서 찌릿, 하고 정전기같은 것이 이는 것 처럼 보이더니 내 앞머리

가 우수수 빠진다.

뭐야 이거 X발?

진짜 무서운 힘이잖아?!

까불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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