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저 친구, 눈여겨 보도록 하지
“건이형. 머리 잘랐어? 느낌이 좀 달라보인다”
“아니, 그냥 옆으로 넘겨봤어.”
“잘생겨서 좋겠다. 나중에 팬 진짜 많겠다. 나두 키 더 크겠지? 볼 살도 좀
빠졌으면.”
지호가 부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릴리가 매서운 솜씨로 헤어라인을 정리해버려서 머리 스타일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많이 뽑히진 않았지만.. 이거, 다시 나는거겠지?
차라리 손으로 쥐어 뜯기는게 낫지.
“볼 살은 금방 빠질거야. 아니면 운동을 좀 해봐.”
지호는 올해로 열 아홉이 됐다.
키가 더 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운동은 여러가지면에서 좋다.
내 권유를 못들은 척 한 지호가 재빨리 회의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건이형, 자리 맡아놨어! 내 옆에!”
우리는 매일같이 리뷰 시간을 가진다.
특별한 건 없지만 솔랭에서 만난 특이한 픽이나 새로운 정보, 독특한 플레이
방식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질구레한 일상 이야기로 빠지기 일쑤지만 가끔 특이한 의견이 있기도 하다.
“들어보세요, 너네도 봐봐. 이건 진짜 혁신적인 픽이야.”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그러지.”
유찬이가 발언권을 요청하자 창민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창민아. 쓸데없는 소리는 없어. 들어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감독님이 창민이에게 엄중하게 주의를 주자 창민이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탑 마오차이. 이건 [진짜]에요.”
“창민아, 네 말이 옳았다.”
감독님이 슬쩍 창민이 편을 들어줬고, 창민이는 금세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보
였다.
사람 참 잘 다루네.
“아니에요, 봐봐. 한번 봐봐.”
유찬이가 저런 뜬금없는 픽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뭘까?
탑 마오차이는 프로 리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LKL, FL 두 리그의 최근 5년 내의 픽 수를 합쳐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은데.
“이게요. 띠모 상대로 진짜 괜찮아요. 스킬이 뭔가 딱딱 맞아떨어져요. 잠깐
잠깐, 더 들어보시라니까요.”
앞뒤없이 허둥거리면서 설명을 하는데 내가 들어도 못 알아듣겠다.
무언가를 느낀 것 같은데 ‘어떤 상황’에서 그런건지, ‘어떤 메커니즘’으로 유
리한건지, 이 챔피언을 뽑았을 때 팀에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 지 등 아무
것도 설명을 하지를 못한다.
힌트라도 주면 코치님이 가공이라도 하지.
“나도 본 적은 있어. 하는 사람이 있긴 하던데. 근데, 띠모 상대로만 괜찮은
거야? 띠모는..”
프로 리그는 커녕 솔랭에서도 자주 안나오잖아..
코치님이 말을 삼키는 것이 분명했다.
LOS의 챔피언은 일반 게임에서도, 프로 게임에서도 평등하지 않다.
“그건 확실하구요! 근데 어지간한건 다 괜찮을 것 같아요.”
“글쎄. 혹시 이 픽에 대해서 보거나 느낀 적 있는 사람?”
코치님이 주변을 둘러봤고, 몇 명이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한타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픽인것 같다던가 하는 부정적인 의견에서부터.
잘만하면 그윈이나 친 짜오처럼 어그로를 빼는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할 수 있
다는 긍정적인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워낙 더 좋은 챔피언들이 많기 때문에 해보면 재밌겠다 정도의 의견일
뿐, 승리가 중요한 리그전에서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일단 데이터만 확인 해보는걸로.”
“저 정말로 마오 해보고싶은데.”
“그렇게 확신해?”
“네. 네네네! 진짜 괜찮은 것 같아요.”
“음. 그럼.. 다음 경기도 두 번 다 이기면 조합 짜볼테니 스크림에서 한 번
해봐.”
“오우!”
잘 나오지 않는 픽은 이유가 있다.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이 첫번째고, 그 픽과 어
우러질만한 팀 구성을 짜기 위해 아군의 챔피언 폭을 생각해봤을 때 난처해지
는 것이 두번째 이유다.
이건 솔랭이 아니니까.
하지만 감독님과 코치님도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스크림에서는 뭐든지 해볼 수 있기도 하고.
또 본인이 저렇게 강하게 원한다면야.
스스로 포기를 하건, 의외의 꿀 픽을 찾건간에.
그리고 정말로 다음 경기를 다 이긴다면, 1라운드 9경기 중 4경기를 연승으로
시작하는 셈이니 팀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다.
유찬이는 묘목을 던지는 시늉을 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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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찍 와있었네.”
양태진 감독은 주간 회의 장소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구태양 코치를 보
고 반갑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마오 어때?”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어느정도 말이 되는 것 같긴 한데요.. 최근에 꽤 올라
오고 있기도 하고.”
둘은 정말로 마오차이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진행하고있었다.
“일단, 띠모 말고도 생각보다 특정 챔프 상대로는 카운터로 쓰이더라구요. 하
지만 애들이 말한대로 팀 게임이 어려워요. 정말 카운터라고 딱 잡아 말할 수
도 없구요.”
“음. 나도 유찬이 리플레이 보긴했는데, 내용에 거품이 너무 많아서 잘 모르
겠어.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확신이 있다면 좋은 카드가 될 수 있긴 하지.”
“유찬이는 항상 우리에게 숙제를 내네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그래도 벌써 두 번이나 이겼어. 우리가 1등이야.”
“아, 감독님. 이제 1주찬데 제발 그런 클리셰같은 말 좀 하지마세요.”
“뭐 어때?”
양태진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잠깐이라도 1등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중위권에라도 머물렀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기세라면 혹시, 혹시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
었다.
“아직 약팀들이었으니까요. 이제부터가 진짜긴한데..”
“진짜긴한데?”
“저도 좋아요. 으흐흐흐, 솔직히 기분이 좋아요. 이게 뭐라고.”
구태양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당장의 문제들은 사소하게만 느껴진다.
“뭔데 그렇게 웃고있어?”
“아, 진현이형님.”
어느 새 회의 시간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1군 감독인 박진현이 코치들과 함께 문 앞에 서있었다.
편안한 후드 티를 입은 박진현 감독은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1세대 프
로로서 업계에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이미지를 유지하
고 있었다.
“아시면서.”
양태진이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 웃는거 보니까 알겠다. 이야기 들었어. 이따 그 이야기도 해보면
좋겠다.”
1군과 2군은 메타와 분석 정보 등을 공유하기 위해 매주 만나 주간 회의를 가
졌다.
사옥 내에 연습실이 함께 위치한만큼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긴 하지만, 주간
회의는 중요한 공지 사항 등도 함께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자유로운 분위기로 꾸며진 회의실에 참석자들은 각자 자리를 잡았다.
곧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퓨처스 리그 경기에서 나오는 픽들 보니까, 실제로 우리가 예상했던 픽이랑
비슷해.”
“이번에 1군 애들이 성남 스톰이랑 스크림을 해봤는데..”
“대구 유니버스의 연습 데이터 자료인데요, 아무래도 이번 시즌에도 지난 시
즌과 비슷한 스타일의 플레이를..”
회의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주제는 이번 시즌의 OP 챔피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음. 지난 대규모 패치 때 나온 아이템들이 영향력이 너무 커. 몇몇 챔피언들
이 너무 부담되는데. 특히 야쓰오! 너무 좋아져버렸어.”
“요즘 OP들은 대부분 라인 스왑이 가능한데, 선수들이 숙련도 때문에 조금 부
담스러워하네요.”
“다른 팀들도 그렇긴 할거야. 그래도.. 우리 팀에서는 야쓰오를 쓸 라인이 탑
밖에 없으니, 1픽으로 뽑아봤자 상대팀도 다 알거야. 아, 저거 탑이구나 하고.”
“휴.. 다른 팀에서 가져가면 탑인지 미드인지 원딜인지 알 수가 없는데. 이제
정글도 도는 거 아니에요?”
“사실 야쓰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즌엔 정말 까다로운 픽이 많아요.”
이야기를 나누던 1군 감코진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챔피언 폭이 좁다는 것은 특정 챔피언을 고를 수 없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다루지 못하는 챔피언이 뚜렷하게 보인다면 상대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전략
을 짜온다.
상대는 할 수 있지만 아군은 할 수 없는 챔피언이 OP라면.
상대는 밴 카드를 아낄 수 있고, 아군은 상대의 손에 OP 챔피언이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밴 카드를 허비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십중팔구는 불리한 싸움이 된다.
“그래, 이번에 태진이네 팀에서 서폿 세츠하겠다고 뽑았다가 탑으로 돌렸었잖
아. 그건 어땠어?”
“원딜 일도가 자신감을 보여서 계획이 좀 바뀌었는데, 탑에서 받아주니까 확
실히 편하더라구요. 그리고..”
“잠깐만. 일도가? 그 친구 자신감이 없는 타입 아니었어?”
“첫 날에는 긴장해서 약도 먹더니 바로 다음 날에는 자길 믿어달라고 말하면
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더라구요.”
“반가운 소식인데? 그러기 쉽지 않은데, 일도가 자신감이 붙은 계기가 있어?”
박진현은 턱을 앞으로 괴며 몸을 기울였다.
양태진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음, 그 말씀도 꼭 드리고 싶었는데.”
양태진이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팀에 말도 안되는 애가 하나 있거든요. 권건이라고. 그 친구랑 하면 일
도가 플레이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 된대요.”
“아. 들었어요. 1군 애들도 그러던데요. 솔랭에서 만났는데 걔만 만나면 이긴
다고.”
권 건 이야기에 다른 코치들도 가세하며 분위기가 조금 따뜻해졌다.
“솔랭도 그렇고.. 정말, 정말 스크림 보면서 혹시나 했는데. 이번 주 경기,
저희 다 이겼잖아요. 아시죠?”
“알아 알아. 자랑 실컷해. 그리고 또 이겨라.”
“얘 보이스만 따로 떼서 보내드리고 싶네요. 듣다가 소름 돋았잖아요. 판단이
너무 좋아요. 그냥.. 좋은 의미로 요즘 애들이 아닌 것 같아요. 꼭.. 형님 옛
날 모습 보는 것 처럼?”
“야, 그건 건이한테 실례지.”
박진현이 웃으며 손사래쳤다.
“근데 그 친구, 이번에 성남 스톰에서 건너온 거 아니야?”
“왜 놔줬지 싶어서 찾아봤는데. 지난 시즌 모습 보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긴
해요. 잘하긴 하지만 스톰 1군에 이번에 유학파 선수 들어오면서 기존 정글러
샌드다운 고려하고 있는 것 같기도하고. 수상 이력있는 아카데미 선수도 당겨
갔어요. 좀 복잡하다보니.. 그러다가 여기로 온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가 운이 좋았네. 정말 애들은 금방 크는구나. 한달만 지나도 확
불타오르기도 하지. 꼭 마법처럼.”
박진현 감독은 짧게 올려친 옆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일단 우리 팀에서 좋은 성적 보이고 있는 쪽이 있으니 기분 좋네. 이
번 시즌에 우리 애들도 잘 해줘야 할텐데.”
1군 감독 박진현은 부담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권 건 그 친구, 눈여겨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