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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8화 (9/326)

008화. 산뜻한 출발

한번 승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승리를 거둔 상대는 서울 빅스.

지난 시즌 유일하게 대전 FWX보다 아래 순위를 기록한 10등 팀이다.

그리고 오늘의 상대는 인천 트릭스터.

지난 시즌 7위를 기록했다.

“오랜만에 화이트 노이즈 들으니까 머리 띵하더라.”

창민이가 투덜거렸다.

“맞아맞아. 나도 그거 들으면 누가 양 옆에서 머리카락 당기는 느낌?”

일도도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연습실에서 게임을 할 수 있으면 좋

겠다고 했다.

경기장에서 게임을 할 때는 헤드셋에 노이즈를 집어넣는다.

주변의 소리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고, 해설 등으로 의도치않게 정보가 전달

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새롭게 데뷔한 선수들이 무대에서 잘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은 따로 연습한다고 해서 익숙해지기 쉽지 않다.

현장을 연출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큰 환호성에서 나오는 공기의 떨림까지 가려주지는 않

는다.

아직도 지호는 꿈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오늘도 이기는 거 아니야? 트릭스터 만만하잖아!”

“지호, 그런 말은 이기고 나서 하도록 하자.”

갑자기 나타난 감독님에 화들짝 놀란 지호가 도망치듯이 멀어졌다.

밥 먹은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출발할 때가 됐나보네.

#

“이번 시즌 산뜻한 출발을 한 두 팀이죠.”

“그렇습니다. 어제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팀 FWX와 지난 시즌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인천 트릭스터인데요. 지난 시즌 각각 9위와 7위를 차지한 두 팀

이 시즌 첫 날을 기분좋은 1승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를 갈고 돌아온 두 팀이 어떤 픽을 준비해왔을지 기대가 되네요!”

“이번 시즌, 아직까지 팀마다 좋다고 생각하는 픽들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

다. 그리고 FL에서는 어떤 픽이건 가능하죠!”

오늘은 일도의 컨디션이 괜찮아보였다.

아니, 급격하게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았다.

“일도야, 셰나-세츠?”

“음..안정적인건 셰나이긴한데 아펠에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아요.”

“음. 세츠 뽑아놨는데. 셰나가 낫지 않겠어?”

“캐리력은 아펠이 더 높아요.”

“그래도 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펠 가져오면 주도권 괜찮나?”

“그래도 조금 더 세게 밀어붙여볼게요. 저 할 수 있어요.”

코치님과 감독님이 의문을 표시했지만 일도는 다시 한 번 의사를 표시했다.

미리 구상해 온 계획은 미드 중심의 픽이었지만 상황은 언제든지 밴픽과 의사

표현에 따라 바뀐다.

아주 좋은 픽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세츠는 탑, 미드, 가끔은 서폿, 심지어

정글도 가능은 한 픽이었기에 자유도에 장점이 있다.

단지 지금은 갑자기 일도가 자신감을 내보인 바람에 세츠를 다른 포지션으로

돌려야 했다.

아펠과 세츠가 썩 잘 맞지는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코치님이 입을 열기전에 유찬이가 말했다.

“저는 좋은데요? 세츠 탑 가능.”

“그래. 그럼 일도 믿어 본다. 세츠 탑으로 돌리고, 서폿은 탐 진치로 가자.”

“아, 그..”

창민이는 무언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고, 나

는 정글 픽을 선점당해 다이아나를 픽했다.

“AP는 건이에게 맡긴다.”

“일단 정글링 최대한 집중할게요.”

“너라면 믿을만하지.”

밴픽이 계속 진행됐다.

그리고, 상대가 드문 픽을 꺼내든다.

[ 나 이거 처음 보는데. ]

릴리는 오늘도 내 책상에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다.

내 눈에만 보인다니.

뭔가 좀 귀신같기도 하고.

‘이건 할아버지 캐릭터. 질리얀.’

갑자기 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릴리의 코 밑으로 질리얀 같은 하얗고 긴 수

염이 자라났다.

뭐야 저게?

소리지를 뻔 했잖아!

‘뭐하는거야.. 저리 가있어..’

[ 히히, 나는 흰 수염이다! 히히. 나는 이거 하는 사람 보러 갈래! ]

주절거리던 릴리가 사라지고 팀은 상대의 픽으로 약간 분주해졌다.

“아. 쟤네 질리얀 연습 기록 있긴 하던데, 별로 많이 하진 않았을걸요? 장인

은 아님.”

“음. 창민아, 세라핌 가야겠다.”

“근데 저, 그.. 우리 팀 AP 부족하잖아요.”

“상대도 마찬가지야. 지금 이대로 가면 적 팀에 비해 유틸성이 너무 떨어져.

어제 좋았으니까 한번 더 가자.”

“네..”

창민이는 다소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세라핌을 마지막으로 픽은 완료 됐다.

오늘도 경기가 시작된다.

익숙하게 들려오는 환경음에 나도 모르게 또 설레고말았다.

어휴, 이 지긋지긋한 게임.

#

“어? 권건 선수가 드래곤을 칩니다.”

“바텀 주도권을 꽉 쥐고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 같은데, 6분이면 굉

장히 빠른거거든요.”

“하지만 만약 상대 미드가 아래쪽으로 조금이라도 무빙을 했다면 치다가 빠졌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 동의합니다. 아주 과감한 타이밍이네요.”

일도는 장담한 만큼 괜찮은 플레이를 보여줬고.

“아, 방금 트릭스터가 너무 실수 한 것 같은데요. 미드와 탑이 동시에 밀리고

있었는데 순간이동이 없는 레넥튼이 바텀에 모습을 보였거든요.”

“FWX 입장에서는 기동성에서 부족한 점이 없으니 불편할게 없죠. 2차 타워까

지 밀고 빠집니다!”

“트릭스터가 잠복을 해봤습니다만, 무위로 돌아갑니다!”

상대가 노릴 만 한 것들은 뻔했다.

“FWX, 세라핌이 있어서 지속력이 굉장합니다.”

“계속해서 돌려깎기를 하는데! 속수무책입니다! FWX가 턴을 주지 않네요!”

“아직까지 트릭스터도 포기해야할 상황은 아닙니다! 아직 한타력은 살아있거

든요! 한 번만, 한 번만 잘 싸우면 됩니다! 힘을 내요! 트릭스터!”

“아, 억지로 걸어야만 하는 트릭스터인데요. 딱 하나 희망적인 내용이 있다면

노려야할 FWX 딜러진들의 스펠이 대거 빠져있어요!”

“지금 채팅방에 너무 쥐어짜는 것 같다, 뭐 이런 의견들이 올라오네요. 하하하.”

이제 상대는 궁지에 몰렸다.

“아, 겁니다! 들어갑니다! 상대방을 도륙해버리겠다는 트릭스터의 의지!”

“일-도! 일도 선수의 아펠! 쏟아지는 군중제어기들을 초시계로 흘려냅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셔버립니다!”

“넥서스 두드리면서, GG!”

특이한 픽을 할 수도 있지.

글쎄, 근데 그렇게 새롭지는 않아.

차라리 띠모를 하지 그랬어.

그건 진짜 낯설거든.

이지.

#

“딕감독님! 우리 이러다가 우승하는거 아니에요?”

유찬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유찬아, 구화지문이다.”

감독님이 점잖게 말씀하시면서 고개를 흔들자 유찬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일도

를 쳐다봤다.

“말 조심하라고.”

“아! 오케이! 앞으로 우리 전략 비밀!”

오늘 POM을 받은 일도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고 모두 에너지가 넘쳤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사옥 주변의 적당한 뷔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도착

하고 나니 마감이 얼마남지 않은 시간이라 모두들 허겁지겁 입에 밀어넣기 바

빴다.

“창민아, 뭐해? 더 가져다 먹지.”

“저 그냥..”

창민이가 재빨리 휴대폰을 뒤로 감췄다.

주변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모두 달려들어 휴대폰을 뺏었는데 창민이는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아이디를

검색하고 있었다.

“야! 김창민 네이버에 자기 이름 검색한다!”

“어림도 없죠? 프로 골프 선수 먼저 나와버리기!”

“아무리 검색해도 너 안나와~”

웃고 떠들기에는 조금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모

양이다.

“차라리 갤러리 같은데 가서 봐.”

휴대폰을 돌려받은 창민이의 코 끝이 민망함으로 새빨갰다.

“거긴 이미 봤지.. 아무도 내 이야기 안하던데..”

“난 봤는데. 욕만 있어.”

“어, 나도.. 난 아직 나무위키 페이지도 없어.”

“난 이름은 있긴 한데. 정보가 다 틀려서 내가 수정함.”

“니 페이지는 삭제 좀.”

“야, 제발 커뮤니티 사이트 같은데 들어가보지마. 거긴 중독이야. 그렇게 보

고싶으면 내가 직접 읽어줄게.”

구태양 코치님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선수들 등을 한대씩 내려쳤다.

“뷔페 마감 시간 얼마 안남았다. 마지막 접시다. 빨리 출발해!”

“아 나 감자튀김 더 먹어야 됨!”

나는 그냥, 주머니에 몰래 포도나 몇 알 챙겨야겠다.

#

경기는 월요일과 화요일, 하루를 쉰 다음 목요일과 금요일에 진행된다.

내일이 경기가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연습 일정이 가득하다.

그래서 저녁 시간대는 짧은 휴식이었다.

모두 숙소에 돌아왔지만 즐거운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를 데려다 주신 감독님과 코치님은 들뜨지 말라며 주의를 주긴 했으나 두

사람이야말로 신나보였다.

편의점에 들른 두 사람의 손에는 맥주 봉지가 들려있었고, 아무 챔피언의 대

사나 닥치는대로 성대모사로 떠들어대며 돌아갔다.

그런 모습을 보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 이건 뭐야? ]

‘미국산 청포도 뭐 그런거일걸?’

릴리는 아직도 질리얀 수염을 달고 있었다.

[ 청포도? 좀 따뜻하네. ]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거라서 그런가?

좀 민망하다.

[ 그래도 맛있다. 고마워. ]

릴리는 환하게 웃었다.

아직까지도 악마라는 말이 이 아이에게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다.

‘릴리야.’

[ 왜? ]

‘왜 나를 선택했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선수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반응 속도를 가진 어린 친구들이나 일일히 패치 노

트를 읽지 않고도 적응해버리는 선수들.

지금이야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여전히 그런 빛

나는 선수들을 마주할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도 좀 더 빨리.. 그 욕망인가를 수확할 수 있었던거 아

니야?’

[ 음.. ]

청포도를 다 먹은 릴리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은 악마라기에는 너무 맑아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대답할까봐서, 후회하고 있다고 할까봐서.

[ 엄마가 그랬어. ]

‘엄마?’

[ 스포츠는 말이야. 몸으로 하는게 아니라고 했어. 정신으로 하는거라고 했어. ]

내 알쏭달쏭한 표정을 보더니 릴리가 배시시 웃는다.

[ 너, 마음 속에 열망의 불씨가 생겼네? ]

‘내가?’

[ 히히, 기분 좋다. 배불러. ]

릴리는 또 자기 마음대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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