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서리스.”
워너힐 아카데미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크라페가 이쪽으로 왔다.
그 또한 악취를 느낀 듯하였다.
“크라페, 흑마녀랑은…….”
“달라.”
그때와는 다른 냄새가 난다는 크라페는 코끝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약해. 그리고 다수.”
다수라는 말이 서리스는 마음에 걸렸다.
혹시 조력자들이 움직인 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느껴지는 기세가 강했다.
지난 악스달 때를 통해 광견 이후로 여러 조력자를 만나봤던 서리스는 그들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음에도 이 정도로 소름 끼치고 꺼림칙한 느낌은 세계 침식자가 아니라면 내지 못 한다.
설마, 과거로 돌아오기 전처럼 알리즈에게 접근할 속셈인가?
‘아니, 예전과 달리 지금은 불가능해.’
알리즈는 이제 예전의 알리즈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되찾으며 유약한 심상을 버리고 일어났으니까.
인제 와서 세계 침식자가 꼬드긴다 한들 거기에 넘어갈 그가 아니다.
‘그럼 결국 지금 움직이고 있는 세계 침식자는…….’
혹시 흑마녀 때와 같이 자신을 노리고 온 게 아닐까.
만약 그게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움을 청해야 하나?’
한다 한들 누구에게?
이미 흑마녀라는 수상쩍은 선례가 있었다.
그런데 연이어 다른 세계 침식자가 자신을 노리고 왔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나 또한 반드시 이 일에 대한 추궁을 당할 것이다.
당장은 이 일을 해결해도 또 다른 불씨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자칫 검은별을 지니고 있다는 게 걸리면, 세계 침식자들과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제 와서 검은별이 폭주할 일은 적지만.’
요치아의 가르침을 토대로 검은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둠은 모두 그림자로 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런 만큼 서리스가 세계 침식을 터트릴 일은 이제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다른 이가 보기에는 여전히 불안해 보일 수 있었다.
그러던 순간 서리스는 자신에게 시선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야기를 듣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대화의 흐름이 끊겨 버린 것이다.
“크라페, 지금 그 말은 세계 침식자가 다수로 나타났단 소리야?”
“아마 아닐 거예요. 전부 같은 별의 움직임이니까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다수의 같은 인물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네요.”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리온이 크라페 대신 설명을 덧붙이자 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분신체가 아닐까요?”
그런 순간 크라페가 급히 가는 걸 보고 뒤따라온 아이랑이 이쪽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소녀도 별로 만든 박쥐를 다루니까요. 세계 침식자 중에서도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자가 없다고는 못하죠.”
“일리 있네요.”
아이랑의 조언을 들은 아리온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워너힐 아카데미에는 아버지와 로렐라이 단장님께서 직접 치신 결계가 있거든요. 세계 침식자와 같은 이들은 내부로 침입할 수 없으니 분신체를 쓴 거겠죠.”
확실히 흑마녀도 워너힐 아카데미 바깥쪽을 돌았었다.
서리스가 있던 위치도 그나마 악스달과 가까웠을 뿐이지 내부와는 거리가 있었고.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어딘가 석연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워너힐 아카데미를 쉽게 활보할 수 있는 거지?’
서리스에게는 검은별이 있다.
그렇다면 결계 또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게 분명한데, 서리스는 그동안 영향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혹시…… 내가 아직 너무 약해서라던가.’
워너힐 아카데미에 본체보다 약한 분신체가 침입했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자신도 아직 결계에 걸릴만한 수준은 아닌 걸 수도 있다.
‘……이대로 계속 강해지면 언젠가는 워너힐 아카데미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는 건가?’
아직은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이내 서리스는 그 생각을 털어 내었다.
우선 지금은 아카데미에 침입한 세계 침식자가 먼저다.
앞에서 말했듯이 세계 침식자가 흑마녀와 같이 자신을 노리고 온 거라면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크라페, 여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어?”
“응.”
크라페는 어렵지 않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별들의 인도를 받는 천구나 검은별의 감각으로 상대를 쫓는 서리스 보다 크라페의 코가 훨씬 더 정확하다.
일단 상대를 추적하기로 한 서리스는 아리온을 돌아보았다.
“아리온 님은 어쩌시겠습니까?”
“아마, 내부는 지금쯤이면 아버지나 다른 단장님들도 놈들의 침입을 눈치채 알아서 대응하겠지만, 미개척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습격에 당할 수도 있으니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세계 침식자가 그들을 노린다면 분신체라 한들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빠르게 이 침입의 사실을 전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리스 님도 이거랑 비슷한 이유로 움직이시는 거죠?”
동시에 아리온은 서리스가 움직일 명분도 만들어 주었다.
서리스는 세계 침식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아내기 위해 움직여야 하지만.
모든 걸 주변에 밝힐 수는 없어서 다른 이들을 설득할 명분이 조금 부족했다.
다른 이들은 그가 세계 침식자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으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위험할 거예요.”
경고하듯 말한 아리온에게 서리스는 속으로 짧게 감사 인사를 했다.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긴 해도 그는 이런 상황에서 도움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더 위험합니다.”
서리스가 아리온의 말을 받았다.
남들 눈에는 두 사람이 마치 다른 이들이 겪을지도 모를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로 보였으리라.
‘이 기회에 확실하게 알아낸다.’
세계 침식자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했던 것처럼 알리즈와 같은 이들을 꼬드겨 워너힐 아카데미를 붕괴시키려는 것인지.
혹은 흑마녀와 같이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인지.
‘전자든 후자든.’
제 손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럼 무운을.”
아리온은 손을 흔들어 보이곤 숲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서리스가 크라페와 함께 움직이려는 순간, 그의 옷깃을 탁하니 잡는 사람이 있었다.
“서리스 님.”
그건 다름 아닌 아이랑이었다.
서리스와 같이 흑마녀를 겪었던 그녀는 세계 침식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 아리온이 서리스가 움직여야 할 명분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위험한 건 마찬가지.
그녀가 말리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소녀는 못 따라가요.”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좀 뜻밖이었다.
그녀는 그를 말릴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녀는 아직 세계 침식자와 맞설 수준이 못 돼요. 그러니 죄송해요.”
그러나 아이랑은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먼 훗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이 서리스를 따라가 봤자 방해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뭐가 죄송하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아이랑의 생각을 눈치챈 서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랑 님 같으신 분들이야말로 세계 침식을 맞서는데 가장 적합한 분들입니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때론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내기도 하나.
대부분은 실패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만큼 현실을 자각하고, 그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계 침식에 맞서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아이랑은 지금 그녀의 위치에 맞는 적절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덕분에 서리스는 아이랑을 더 높게 평가하며 신뢰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잘 아는 이야말로 동료로서 최고의 인재였기 때문이다.
“대신, 교관님은 소녀가 어떻게든 할게요.”
그러고 보니 알렉산도르가 있었다.
그를 잊고 있었던 서리스는 아이랑에게 뒷수습을 맡기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혈 교관인 그라면 서리스를 말리려는 것은 물론 본인이 직접 나서려고 할 테니까.
“이제 가?”
이야기가 끝났냐는 듯 크라페가 앞을 가리키자 서리스가 몸을 돌렸다.
그러던 중 그는 한 가지를 떠올리곤 아이랑을 돌아보았다.
“아이랑 님,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소녀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알리즈 형님을 한 번만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계 침식자가 알리즈를 노리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지만, 확인 한 번 해두는 건 나쁘지 않았다.
“우애가 깊으시네요.”
그 사실을 아이랑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안내해 줘. 크라페.”
어찌 되었든 아이랑에게 일을 맡긴 서리스는 곧장 크라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자의 아카데미 습격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 *
“엑…….”
뒤쪽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엑스…….”
그는 정신을 빼고 있는 상대를 거세게 부르짖었고.
“엑스널!”
끝내 그의 등짝을 세게 때리며 정신을 차리게 도왔다.
그 남성이 부르던 사람은 다름 아닌 마키나 엑스널.
어딘가 넋을 놓은 듯 있던 엑스널의 시선이 남성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뭔 정신을 그렇게 빼고 있냐! 정리 끝났으니까 이만 가자.”
“……죄송합니다. 선배.”
그를 부른 것은 같은 악스달 소속 선배였다.
평소와 같이 세계 침식 뒷정리하던 엑스널은 자신이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마른세수를 하였다.
그날, 알리즈에게 속마음이 꿰뚫린 뒤.
엑스널은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의 엑스널이 고작 속마음 하나 들켰다고 이 꼴이 난 게 우습지만.
아쉽게도 자신은 그리 썩 좋은 정신력을 지니지 못한 모양이었다.
“선배, 저 바람 조금만 쐬고 들어갈게요.”
“뭐? 하아, 그래, 그렇게 해. 오늘 너 상태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
선배의 아량에 엑스널은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숲이 넓게 보이는 산 위였다.
2학년 사이에서는 전망 좋은 곳으로 유명한 장소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마침 자신이 있던 곳과 그리 멀지 않던 곳이기에 그리로 향한 엑스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았다.
차가운 산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니 조금은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이제는 슬슬 정신을 차릴 때다.
“허튼 짓거리도 그만해야지.”
워너힐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자신은 마키나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단 한 번도 락스카를 넘어서지 못하고 끝나게 되는 거지만, 가문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
“정말 어쩔 수 없을까?”
그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어딘가 자신과 많이 닮은 목소리를 쫓아 엑스널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자신이 있던 바위 끝자락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고, 엑스널 보다 대략 10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엑스널보다 긴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은발은 마키나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엑스널의 눈동자에 당황이 섞였다.
현재 워너힐 아카데미를 다니는 이중 마키나는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누구긴 누구겠어.”
남성은 그 말을 하고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엑스널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왜냐하면 남성의 얼굴이 무척이나 낯익어 보였기 때문이다.
“반가워. 마키나 엑스널. 과거의 나.”
상대는 자신의 10년 후라고 하면 딱 맞을 정도로 자신과 똑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