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다음날, 서리스는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를 읽는 중이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잔루크가 만든 용병단 소식이었다.
덕분에 용병단은 자리를 잘 잡았고, 지금은 세계 침식 대응 쪽 일도 맡으면서 꽤나 수익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도 능력이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보니 자리를 깔아주니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서리스는 그를 통해 세계 각지의 정보도 확실하게 듣고 있었다.
흑마녀의 일이 있고 난 이후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어디까지 바뀌었는가를 서리스도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상황은 전과 같나.’
예전에도 세계 신문은 구독해서 챙겨 보던 서리스다.
현재, 흑마녀 건만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흐름은 대부분 전과 같았다.
‘당분간은 쭉 이랬으면 좋겠는데.’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지내야 하는 기간을 감안하면 흐름이 크게 바뀌지 않는 쪽이 자신에게 월등히 좋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리스는 검은별이 있는 목 뒤편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지난 5년간 함께한 만큼 이제 검은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서리스지만.
왠지 미래를 바꾼 그 여파가 커다란 해일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꺼림칙한 불안감이 가슴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와서 자제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지만.’
찝찝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흑마녀의 행보도 그렇고.
알리즈 건도 그렇고.
거기에 마제 스타린과의 만남도 포함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 유달리 최근에 많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리스는 편지를 구겨 넣곤 점심용 도시락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문뜩 반찬 하나가 줄었음을 깨달은 서리스가 옆을 돌아보자 거기엔 어느새 밥을 다 먹은 크라페가 뒹굴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내 반찬 빼먹었냐?”
“밥이 많았어.”
왜 크라페는 날이 갈수록 못 미더워지는 걸까.
변명조차 안 하는 그를 보며 서리스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소녀 거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거의 다 먹긴 했으니까요.”
아이랑의 배려에 감사하며 서리스는 남은 도시락을 해치웠다.
“다들 점심은 다 먹었나?”
그러는 사이 교관 알렉산도르가 서리스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 그들은 훈련으로 5성급 세계 침식 돌이를 하고 있었기에 미개척 지역 숲속이었다.
그런 만큼 식사 후 또다시 바로 세계 침식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이 한둘도 아닐 텐데. 참, 아직도 세계 침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여기도 사람 살 곳이 못 되긴 하네요.”
“동감.”
아이랑이 푸념하듯 말을 내뱉자 크라페도 거기에 동의했다.
녀석은 숲 밖으로 나오고 나서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코에 두건을 차고 있었다.
보아하니 세계 침식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를 견디는 나름의 방비책을 찾은 모양이다.
“크라페, 그럴 거면 그냥 후각을 차단해주는 마법 물품이라도 사지 그래.”
하수도 청소 같은 일을 할 때 쓰는 물건을 떠올린 서리스가 묻자 크라페는 고개를 저었다.
“익숙해져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 또한 흑마녀 때 코가 마비되어 정신을 못 차렸던 걸 떠올리고 있는 듯하였다.
본인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녀석들 푸념 말거라. 미개척 지역만큼이나 세계 침식에서 단련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후에 너희가 어디로 간다 한들 큰 도움이 될 거다!”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미개척 지역만큼 여러 세계 침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곳도 없으니까.
‘단지, 보통이라면 1년 정도는 되어야 돌아볼 세계 침식을.’
거진 일주일 만에 다 돌아본다는 점이겠지.
이렇게 보니 왜 워너힐 아카데미를 나온 사람과 안 나온 사람이 그렇게나 차이가 나는지 알겠다.
훈련 강도도 강도지만 경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 높은 장벽이다.
‘괜히 여러 가문이 자신의 직계들을 워너힐 아카데미로 보내는 게 아니겠지.’
이곳에서의 경험은 반드시 도움이 될 테니까.
“테르넬에 오면 이런 훈련을 매일 경험하게 될 테니! 모두 오늘도 힘내서 해보자고!”
“테르넬로 오는 사람들은 전부 변태인가요.”
“이해 불가.”
테르넬 단장을 형으로 둔 서리스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 * *
드넓게 펼쳐진 황야.
본래라면 초목으로 푸르러야 할 숲에서 말발굽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세차게 달려드는 말들을 향해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쥐고 걷기 시작했다.
놈들은 샛노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놈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살기는 그들이 마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히이이잉!”
소리를 내지른 말들이 서리스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녀석들은 투레질 소리와 함께 강철 같은 발굽을 서리스를 향해 내려찍었다.
쿠웅!
그러나 그들이 두드린 건 다름 아닌 무형의 막이었다.
황금빛 싸라기들이 서리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그것은 크라페가 만들어낸 황금의 방패 조각이었다.
“성능 확실하네.”
말 마수가 당황한 찰나 서리스는 그 즉시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갈랐다.
퍼걱!
뒤이어 바닥을 박차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랑이 연달아 말 마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비명을 내지르며 말 마수를 전부 처리한 서리스는 이제는 익숙하게 검은별로 그들을 몰래 흡수한 뒤 한숨 돌렸다.
“흐음, 다들 호흡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러는 사이 멀리서 서리스 내를 지켜보던 알렉산도르가 다가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의 호흡은 상당히 잘 맞았다.
“소녀와 서리스 님이니까요.”
“나도 있어.”
“덤으로 크라페 님도요.”
어쩐지 크라페에게는 칭찬이 박한 아이랑이었다.
“좋다. 슬슬 주인을 정리하고 다음 세계 침식으로 가보자고!”
그런 세 사람을 보고 알렉산도르는 신난 듯이 외쳤다.
논스톱으로 세계 침식을 오간다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깨닫게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저희 다음 세계 침식에서는 좀 더 천천히 할까요.”
아이랑과 크라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개 정도 세계 침식을 더 마무리한 서리스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은 아직 푸르지만 조금만 있으면 붉어져 노을이 질듯싶었다.
“흐음, 이 주변에는 더 이상 세계 침식이 없는 모양이군.”
뒤이어 밖으로 나온 알렉산도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 이동 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치고 다음 세계 침식을 마지막으로 오늘 일정을 끝내도록 하지!”
“도망칠래.”
서리스는 숲속으로 발을 뻗는 크라페의 뒷덜미를 잡았다.
“놔줘.”
“동료는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 법이야.”
“연을 끊어줘.”
크라페는 허망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서리스도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세계 침식에서 온종일 구른 덕분에 제복이 엉망진창인 건 물론.
몸 전체에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땀과 체력 소모로 노곤함이 느껴지는 몸이 더욱 피로를 불러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깨끗하게 씻고 눕는다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되찾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건 쉽지 않을 듯싶었다.
“쟨 왜 깨끗해.”
그러는 사이 밖으로 나온 아이랑을 보고 크라페가 불합리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이랑의 옷은 먼지 한 톨도 묻어있지 않았다.
“소녀는 언제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거든요. 이 정도야 기본이죠.”
물론 그리 말하는 아이랑 또한 상당히 지친 표정이었다.
겉모습만 깨끗하지, 고생한 건 같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세계 침식도 조만간 하나 찾아봐야겠군.”
문제는 그런 와중에도 열혈 교관 알렉산도르는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귀에는 훈련생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는 듯싶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서리스가 기척 하나를 느끼고 고개를 돌린 것이.
“어라, 별들의 속삭임이 저를 이쪽으로 안내한다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수풀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한 남성이었다.
그는 서리스를 보자마자 푸른색 눈을 휘며 미소를 지었다.
천구 아리즈 아리온.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별님들도 참, 무언가 말해주시고 싶으면 길이라도 편하게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그는 사람이 다니기 힘든 길을 뚫고 온 듯, 옷 여기저기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둘 떼며 말했다.
서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알렉산도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천구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천구라면 아리즈 아리온 님?”
알렉산도르의 반응에 아이랑도 그를 돌아보곤 내 쪽을 보았다.
“서리스 님, 아리온 님이랑 아는 사이셨어요?”
“악연입니다.”
“호오.”
분명 악연이라고 했는데, 왜 면사포 너머 그녀의 눈이 더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질까.
“별님들이 아는 지인이랑 이야기 좀 하라고 하시네요.”
그러는 사이 아리온은 알렉산도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서리스의 지인이라 소개했다.
그 모습이 퍽 어이가 없어 서리스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밥값 떼먹고 도망간 뒤. 뻔뻔하게 지인 행세입니까?”
“아, 그때 그거? 멋진 척하고 가려다가 별님들이 알려줘서 뒤늦게 알았답니다.”
그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의도한 건 아니라는 소리겠지.
서리스는 짧게 한숨을 쉬곤 그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뭡니까?”
그러자 아리온은 서리스에게 자리를 옮기자는 의미로 숲 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서리스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숲 안쪽으로 향했다. 이내 아리온은 다른 일행들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왔단 걸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아마 별님들이 저를 여기로 인도한 건 당신께 이 사실을 전하라는 소리겠죠.”
그러면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는 몸을 굳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세계 침식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립니까?”
“네, 최근에 흑마녀를 만난 적 있으시죠?”
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허공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흑마녀는 멸망을 부르짖는 예언가랍니다. 추측건대 그녀의 눈은 아마 저희와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을 거예요.”
“……그 보고 있는 세계 중에 제가 노려질 만한 게 보인 겁니까?”
“흑마녀가 서리스 님을 노리고 온 모양이네요?”
이건 몰랐던 건가.
아리온은 서리스가 검은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날의 대화에서 그는 그 사실을 말해왔으니까.
천하오장성, 그리고 천상사성과 삼무제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검은별을 아리온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만큼 서리스는 이 기회에 그와 협력 관계를 만들어 두기로 결심했다.
세계 침식자보다야 천구가 훨씬 나으니까.
“네, 저를 보고 나서 지칭하는 말 같은 걸 했으니까요.”
“흑마녀가 어떤 걸 보는지까지는 저도 자세히 몰라요. 단지, 서리스 님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았다는 건, 아직은 두고 볼 필요가 있단 거겠죠.”
아리온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가 하고픈 말은 검은 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거예요. 만약 그 움직임이 별들 전체를 흔들어 검은 은하수가 된다면.”
“흑마녀에게 노려진 저도 휘말릴 수 있단 겁니까.”
“그런 셈이죠.”
그걸 말해주려고 온 건가.
결국, 큰 흐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보다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강해져야 할 이유는 많은데.’
강해지는 건 쉽지 않으니.
펜타니엄과 소드란의 별을 의식한 서리스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는 검은별에서 저릿하고 느껴진 감각에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아리온 또한 뭔가 느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곤 워너힐 아카데미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
“네, 별님들도 속삭여 주셨습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무언가 상당히 기분 나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것도 검은별과 관련된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