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휘익.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바람 소리가 끝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느꼈다.
귀가 먹먹해진 듯한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 비춘 것은 단 하나.
추락하던 태양이 반으로 갈라졌다는 사실과.
그 너머 하늘 위, 구름 또한 반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뿐.
“미친.”
누군가 조용히 내뱉은 한마디를 시작으로 날아든 후폭풍에 사람들이 휘말려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건물들이 뒤흔들리며 소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휩쓸어 간 듯한 광경이 대련장에 펼쳐졌다.
하나둘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대련장을 본 순간.
거기에 있는 건 넋을 놓은 듯 주저앉은 이바드라와 검을 회수한 서리스가 있을 뿐이었다.
승부는 누가 보아도 결정 나 있었다.
“와아아아아!”
“염성, 염성을 꺾었다!”
“몰락한 삼남이 염성을 꺾었다고!”
대련장을 보던 관객들은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몰락한 망나니로 유명했던 삼남이 일곱별 중 하나인 염성을 압도해 버린 경악할 상황.
얼마 안 가 세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걸릴 만큼 큰 이슈였다.
당연히 그런 상황을 제 눈으로 봤으니 사람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뭔가 거대하고 새까만 검이 지나간 것 같았데…….”
그리고 개중에는 어딘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엿본 듯이.
그들의 눈은 홀린 듯 멍하니 서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왕월영도는 아직 확실하게 쓰기에는 무리인가.’
서리스는 떨리고 있는 팔을 내려다보며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수준으로 제왕월영도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힘들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몸이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치아가 제왕월영도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이걸 완성하기 위해서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벽을 넘어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이제 겨우 벽 하나를 넘어섰으니.’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시 수련과 경험이 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리스는 이바드라를 힐끔 보았다.
마지막에 이바드라가 쏟아부은 기술은 서리스가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제왕월영도를 익히기 전이었다면, 몸 성하게는 못 막았을 법한 기술.
분명 바르크의 현 가주는 재능에서 큰 빛을 발하지 못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말인즉슨 가문비기를 익힌 건 스스로의 노력이었을 텐데.
새삼 일곱별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이쪽은 별 두 개에다가 검은 별까지 써서 겨우 여기까지 올랐건만.’
저쪽은 별 하나로, 그것도 기연 없이 순수 재능만으로 올랐다는 것이 참.
‘결국 천재란 그런 거지.’
날고 기는 놈들 보면서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천재를 꺾은 이상, 자신 또한 규격 외의 존재로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으니까.
“서리스 승리.”
뒤늦게 다트론이 승리 선언하자, 셀링이 급히 와서 이바드라를 데리고 치료실로 옮겼다.
아직도 넋을 놓은 이바드라가 제정신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서리스는 그걸 보고도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편법과 여러 기연을 통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그다.
아직은 벽을 성큼성큼 뛰어넘고 있으나, 언젠가 편법과 기연만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된다면 천재의 재능을 어느샌가 부러워할 날도 오겠지.
‘그러니 지금은 내가 이겨도. 나중은 모르는 법. 상대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한 번 벽에 막혀 보았기에 서리스는 그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서리스 청랑호법님!”
그런 생각을 품으며 대련장을 내려온 순간, 서리스는 자신에게 달려든 클로나를 멈칫하며 받았다.
자신을 껴안은 채 꺅꺅거리는 클로나를 보고 있으니, 저 멀리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한 청랑단원들이 보였다.
서리스는 잠시 대결에 열중한 나머지 잊었지만, 이걸로 청랑단이 친선 대결에서 승리한 셈이다.
이 뒤에 있을 것은 무료 술과 연회.
당연히 승자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이들이었으니.
“다 와.”
서리스가 씩 하니 웃으며 한마디 하자 모두가 달려들었다.
승리는 다 같이 나누어야 즐거운 법 아니겠는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환호성과 함께 서리스가 축하받을 무렵.
바르크는 사실상 초상집 분위기였다.
자신 있게 온 친선 대결에서 패배해 버렸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돌아가자마자 급격히 올라갈 훈련의 강도에 착잡해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르크의 별이 패배해 버렸다는 것.
같은 가문별과의 싸움도 아니었으니, 그 패배는 다른 이가 이바드라의 실력을 의심케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대결을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는 문제는 이바드라가 아닌 서리스가 괴물이었다 하고 소문낼 수 있으나.
무릇 소문이라는 건 제멋대로 와전되기 좋은 법이다.
바르크의 별이 추락했다는 말조차 돌지도 모르는 상황.
가뜩이나 현세대의 인재를 배출 못 한 바르크 입장에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바드라였다.
“……졌다.”
정신을 차린 뒤,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 이바드라가 중얼거렸다.
친선 대결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인지, 각종 치료에도 불구하고 몸이 성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몸보다도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마지막에 보았던 거대한 그림자의 대검.
그걸 본 순간 이바드라는 깨달았다.
자신은 평생 저 괴물을 넘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 몸은 앞으로.’
더 이상 별이라는 이름을 달고 빛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화려하게 빛나던 이바드라는 한순간에 모든 빛을 잃은 기분에 휩싸였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매일같이 바르크의 미래를 걱정하는 수뇌부들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려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 가주의 실력 부족으로 생긴 반역 잔당은 여전히 바르크 내부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 번 대대적으로 반역 세력을 뿌리 뽑았음에도, 남은 이들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들에게 명분을 주기에 너무도 좋은 상황이었다.
어깨가 또다시 짓눌리기 시작했다.
자기 누이와 자기 손에 대가문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미래가 모두 달려 있다는 것이.
토악질 나올 정도로 무거웠다.
패배의 쓰린 맛은 도저히 그의 얼굴 위에 모든 것을 감당하는 오만이라는 가면을 씌울 수 없게 만들었다.
“이바드라 님.”
그런 순간 병실 문을 열고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흑청색의 머리카락과 주홍빛 기사단의 제복.
셀링이었다.
“더 누워 계시죠. 몸이 아직 엉망이십니다.”
“……패배해서는 안 되었다.”
이바드라가 입을 열자 셀링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었다.
그리고 이바드라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그의 옆에 의자를 빼 앉았다.
“한 번 진 거 가지고 풀 죽지 마세요.”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란 말이다.”
이바드라가 입술을 짓이길 듯 깨물었음에도 셀링은 태평했다.
대신 그녀는 대뜸 이바드라가 누워있던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그의 머리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이바드라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셀링은 그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니 저라도 더욱 쉽게 말해 주어야죠. 이바드라 님이라면 또 책임감만 잔뜩 느끼시면서 힘들어하실 테니까요.”
속삭이듯 말해 준 셀링의 얼굴이 히죽 웃었다.
“이바드라 님이 지시든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이바드라 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이니까요.”
전폭적인 사랑.
설령 이바드라가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반란을 도모한 것으로 인해 가문이 멸문당하고, 가문의 이름마저 잃었음에도.
그 가문의 직계였던 자신을 구해 준 건 바로 이바드라였으니까.
“그러니 괜찮아요. 누가 옆에서 지랄하면 바르크도 버리고 도망가시죠.”
“너, 욕 줄인다더니.”
“지랄 맞은 건 지랄 맞은 거니까요.”
예쁘장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걸쭉한 말을 내뱉으며 셀링은 이바드라를 토닥거렸다.
그 따스함은 이바드라에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의 불보다도 셀링의 이 말들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괜찮을까.”
“네, 괜찮습니다.”
불안함을 해소해 주듯 말해 준 셀링의 목소리의 이바드라는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그것보다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속셈이냐. 셀링.”
“어머, 속 보였습니까?”
그러곤 곧 평소와 같이 오만이라는 가면을 쓴 그의 말의 셀링은 마지막으로 그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주었다.
“또 풀 죽으면 키스라도 갈겨 버릴 테니 알고 계세요.”
“아쉽게 됐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셀링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의자로 돌아갔다.
똑똑.
그런 순간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바드라가 들어오라는 대답을 하자,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4기사단이었다.
“무엇이냐.”
“죄송합니다!”
그 순간 안으로 들어온 전원이 이바드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홍빛 기사단이 패배한 것은 마치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사죄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이바드라는 눈을 한 차례 깜빡이더니 곧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들 나름의 위로라 이건가.
참, 머릿속이 꽃밭인 놈들이다.
그래서 아끼는 놈들이고.
“전원 돌아가면 훈련이다.”
“예!”
“그리고 이 몸도 참여하지.”
이바드라의 말을 듣고 4기사단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만을 가득 드리운 미소는 그를 바르크 이바드라라 말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패배는 없다.”
한 번 무너져 본 천재는 더욱 강해질 테니까.
* * *
친선 대결이 끝난 후, 회포를 풀듯 시작된 연회도 어느샌가 날이 밝으며 끝났다.
죽어라 마시던 청랑단원들이 숙소에 반쯤 실려 가듯 옮겨지는 동안 주홍빛 기사단은 빠르게 바르크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바르크의 주요 전력인 만큼 그들도 혹시나 있을 세계 침식을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청랑호법 중 한 명으로서 서리스는 푸른 잠자리 여관 앞에 도착했다.
“다들 생각보다 밝네.”
서리스를 따라온 아카펠이 신기한 듯 말했다.
어제 친선 대결에서 패배했음에도 밝아 보이는 모습은, 그들의 굳건한 심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눈에 이바드라가 들어왔다.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그는 서리스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펜타니엄 서리스.”
서리스의 이름을 부른 이바드라는 그의 앞에 당당히 섰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선전포고라 이건가.
어제 일로 낙심했을 법도 한데 생각 이상으로 쌩쌩했다.
천재는 패배해도 다시 딛고 일어나는 것 또한 빠르다 이건가.
“기대하지.”
서리스가 가볍게 응수하자 그는 콧방귀를 내쉬곤 가 버렸다.
그런 이바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리스는 아카펠을 돌아보았다.
워너힐 아카데미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홍빛 기사단이 출발 준비를 마친 듯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기사단장인 엘다리트가 어딘가 석연치 못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지만, 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우리도 돌아가자.”
술 먹고 엉망이 된 선배들 뒤처리 정돈 도와야 할 듯싶으니 말이다.
펜타니엄에서 청랑단 본부로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서리스가 주홍빛 기사단을 떠나보내고 돌아가고 며칠 뒤.
주홍빛 기사단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급보로 들어온다.
그것도 세계 침식자의 조력자.
광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