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바드라의 굵은 눈썹이 팍 일그러졌다.
‘도발에는 도발로 응수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서리스가 씨익 하니 웃자 이바드라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작하겠다.”
그러는 찰나, 다트론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는 서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서리스는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주홍빛 기사단 대 청랑단 마지막 대결 시작.”
다트론이 시작을 알리며 빠지자마자, 이바드라를 중심으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하늘까지 붉게 만드는 그 강렬한 열기는 보는 사람을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의 불꽃보다 더욱 붉은색에 가까운 이바드라의 불꽃이 토해 내는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서리스는 그걸 보고도 덤덤하게 청운귀명으로 만들어 낸 검을 쥘 뿐이었다.
“그거 아나? 그림자는 불 앞에서 도망치는 것밖에 못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열기에 새빨갛게 물든 검을 쥐고 그가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대결장 일부가 녹아내릴 정도였다.
과연 염성이라 불릴 정도의 화력이다.
“그리고 너도 똑같이 될 거다.”
자신만 보면 도망치게 해 주겠다며 오만방자하게 웃는 이바드라를 보고 서리스는 무덤덤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이 너무나 가벼워 보여 이바드라의 심기를 다시금 건드렸지만.
서리스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그림자 검을 겨눌 뿐.
이바드라의 눈 속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분명 제로를 공격하려던 자신과 맞선 때와 다르게 서리스에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하게 검을 조금 휘둘러 봤을 법한.
고작해야 그런 범인(凡人) 같은 기세 말고는 서리스에게 느껴지는 게 없었다.
‘힘을 숨긴 건가?’
그것도 감히 자신이 이만큼의 화공을 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이가 없다 못해 열을 받은 이바드라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뭐라 해도 그의 행동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딴 짓은 다시는 못 하게 해 주마.”
그 순간 이바드라는 서리스와 한참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종으로 그었다.
화르륵!
그러자 그의 검을 따라 일어난 검격의 불길이 서리스를 덮쳐왔다.
날아드는 화염 검격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서리스는 덤덤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곧이어 물 흐르듯 움직인 서리스의 검이 이바드라의 화염 검격을 흘러 베었다.
그 행동이 군더더기 없이 무척이나 깔끔했기 때문일까,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마치 검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이윽고 서리스는 처음과 같은 자세로 돌아왔다.
고요한 그의 눈동자가 이바드라에게로 향했다.
그걸 마주한 이바드라는 이를 도발로 느끼곤 연격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화염 검격이 서리스를 덮쳐왔으나, 서리스는 처음과 같이 모든 검격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줌의 별도 안 느껴지는 것이 이바드라의 화를 더욱 치솟게 했다.
하지만 이바드라는 안달 나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은 분명 멸천화륜검과 잘 맞다.
그러나 겉은 불같되 속은 잔잔해야만 멸천화륜검의 진수를 끌어낼 수 있다.
타오르기만 하는 불꽃은 결국 다 타 없어질 뿐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바드라가 천천히 서리스를 조여 오기 시작했다.
저쪽이 자신을 얕보았는지 혹은 다른 수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바드라는 첫 만남에서 서리스의 강함을 확인했다.
그렇기에 자신도 오랜만에 호승심이 솟아오르기도 한 것이고.
“후우.”
이바드라가 짧게 숨을 내쉰 순간, 그의 발아래에서 휘몰아치던 불길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모든 걸 태울 듯이 날뛰던 불길이 잠잠해지자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바드라가 화력을 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리스는 이제부터 시작임을 눈치챘다.
처음 그가 쏟아 낸 불은 어디까지나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
이바드라의 진가는 쏟아 낸 불길을 제 몸 안에 다시 가두는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그 증거로 주홍빛이던 그의 머리카락이 새빨갛게 물들어가며, 끝은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바드라의 감은 눈이 서서히 떠진 순간, 서리스는 검을 틀어잡았다.
과연 2년간의 수련이 일곱별 중 하나인 염성을 상대로 어디까지 통할까.
서리스의 눈에도 호승심이 깃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바드라의 인영이 사라진 것이.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인지를 넘어설 정도로 이바드라가 빠르게 움직였음을 직감한 서리스는.
그 즉시 몸에 모든 감각을 끌어 올렸다.
채엥!
아래에서 솟구친 불길과 함께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발광보다 빠르군.’
직접 고안한 비섬류를 바탕으로 속공을 주로 쓰는 서발광보다도 빠른 속도에 서리스도 놀랐다.
과연 이게 염성 바르크 이바드라.
틀어잡은 서리스의 검이 상대의 검면을 쳐 낸 순간, 이바드라는 바닥을 박찼다.
그러곤 공중에서 검이 쳐 내진 힘을 역이용해 이바드라는 연이은 쾌검을 날려왔다.
2년간의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이바드라의 속공에도 불구하고 서리스는 모든 검을 받아 내었고, 이 막상막하의 대결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뜨게 만들었다.
“뭐, 뭐가 보이긴 하나?”
“소리만 들리네.”
“상대는 그 검성과 동급인 염성이라 안 했나? 몰락한 셋째가 저 정도로 버티다니.”
“이 사람아 소문 정도는 듣고 사시게. 몰락은 대체 언제 적 말이야.”
“별에서는 밀려도 검술은 훌륭하군.”
둘의 대결을 보는 관객석 쪽에서 여러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별이 모자란 서리스가 이바드라를 상대로 검술로만 버티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하고 있는 이바드라는 그 목소리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별이 밀린다고?
이놈이?
멸천화륜을 통해 몸의 오감을 극도로 끌어 올린 덕분에 이제는 보인다.
놈에게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과도 같은 별이.
바르크 가문별에 축복받은 자신보다도 더한 별을 보고 이바드라는 경악해야만 했다.
‘놈이 검술만 쓰는 이유는.’
혹시 자신이 지닌 별을 감당치 못함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이바드라의 머릿속에 스쳤다.
감각에 잡히는 별의 양만 해도 끝이 안 보인다.
저 정도 별을 다루려면 천재라 불리는 이바드라도 얼마나 수련해야 할지 감응이 안 갈 정도였다.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검술이란 거로군.’
이제야 하나둘 맞물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검을 배워 온 건지 자신의 모든 검로를 읽는 실력.
그리고 터무니없는 별을 감당하기 위한 육체.
아무리 허초를 섞어 보아도 서리스는 수를 읽고 정확한 검술과 그 육체로 맞섰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이 능력은, 아마 저 스스로 별을 감당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서리스의 본색을 알아챈 이바드라의 두 눈이 날카롭게 띄워졌다.
분명 언젠가 이 녀석은 제 별을 마음대로 다루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아닌 것이다.
청랑호법이라는 위치에 어울리나 그 꽃은 아직 꽃봉오리일 뿐.
꽃은 완전히 펼치기 전에 꺾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내가 꺾어 주마.’
그 심연 같은 별을 다루지 못한다면 이기는 건 나다!
이바드라의 두 눈에 새빨간 열기가 타올랐다.
그의 부름을 받은 별이 육체 내부를 타고 고속으로 회전했다.
그에 따라 열기가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른 그 순간.
이바드라가 또 한 번 가속했다.
홍염으로 만들어진 수라.
멸천화륜검(滅天火圇劍)
사식(四式)
멸화강림(滅火降臨)
이바드라의 전심전력이었다.
홍염의 수라가 서리스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단계 더 육체 능력이 올라간 이바드라의 맹공은 그야말로 화염 전차였다.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열기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피부가 익어 버릴 것 같았고.
멀찍이 떨어진 관객들조차도 무던히 손부채질하다가 그 열기에 지쳤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것을 오롯이 받는 서리스는 절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앞으로 세 번.’
검을 나누는 순간 이바드라는 승리를 확신했다.
마치 바둑을 두는 것같이, 지금의 전투에서 이바드라는 승리로 향하는 수가 보였다.
‘하나.’
직선으로 검이 나아간다.
서리스가 간신히 빗겨 쳤다.
‘둘.’
횡으로 뻗어 검을 휘둘렀다.
서리스가 한 발자국 물러서 회피했다.
‘셋!’
바닥에서 치솟은 불길과 검이 양측에서 그를 몰아넣었다.
불길과 검을 동시에 흘린 서리스의 몸이 주춤거렸다.
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밀려난 서리스의 검과 그 사이로 훤히 보이는 그의 목.
정확하게 세 수로 서리스의 검이 파훼 당했다.
이바드라의 두 눈이 그것을 포착한 순간.
아주 짧게 그는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조된 정신이 이 기회를 잡아내고자 사고를 가속했던 것이다.
‘끝이다!’
확신과 함께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듯, 이바드라의 몸에서 치솟은 불길이 오로지 일격을 위해 모든 게 담겼다.
멸천화륜검(滅天火圇劍)
오식(五式)
멸천화열섬(滅天火裂殲)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업화의 화염이 서리스에게 쏟아졌다.
홍염의 수라가 내지른 검은 모두가 이번 승부가 끝났음을 짐작하게 할 만큼 엄청났다.
끝.
모두의 눈이 그것을 확신한 순간.
쩌엉!
대기를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이번 수를 위해 전력을 쏟았던 이바드라의 눈이 떨렸다.
“와, 역시 일곱별은 일곱별이구나? 검만으로는 안되네.”
그의 앞에는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서리스가 있었다.
이바드라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무슨 일이 난거지?’
자신은 분명 승리의 수를 보았고, 그걸 위해 전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필살의 수가 막힌다고?
“이바드라 님!”
셀링의 외침이 이바드라의 귀를 때린 순간, 그는 흠칫하듯 자신이 내지른 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심연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바드라의 멸천열화섬을 파훼시키고 남은 화염마저 갉아먹고 있는 그림자가.
거기에는 이바드라가 서리스에게 엿본 별의 기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너, 너, 별을 쓸 수 없는 게.”
“응?”
서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그런 말 한 적 있던가?”
이바드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걸 본 서리스는 이바드라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별을 못 쓴다고 생각한 건가.’
이바드라가 충격에 비틀거리듯 물러서자,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이었다.
“염성을 상대로 별 없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궁금했었거든. 역시 검만으로는 안 되겠더라.”
검제인 요치아였다면 별 없이도 가지고 놀았을 것 같지만.
서리스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하여튼 다시 생각해도 괴물 같은 영감이다.
“아직 포기한 건 아니지?”
서리스가 질문하자 이바드라가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지금 감히 자신한테 포기라고.
그는 방금까지 서리스를 몰아붙였다.
저쪽이 숨겨 놓은 수에 잠깐 당황한 것뿐.
승기를 잡고 있던 건 자신이지 않았는가.
‘저놈도 상태가 정상은 아닐 거다.’
분명 저건 구석에 몰렸기에 꺼낸 수.
“허세 부리지 마라.”
이바드라가 다시금 별을 끌어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이바드라를 보며 서리스는 만족하듯 미소 지었다.
“그렇게 나와 주셔야지.”
그 순간 대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방금까지 이바드라를 중심으로만 흐르고 있던 흐름이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이 요동치고 있다.
눈앞에 거대한 존재가 마치 별을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이바드라의 감각에 잡혔다.
서리스를 바라보던 이바드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조심해라. 내 그림자는 별빛도 지게 하는지라.”
고작해야 타오른 불꽃 꺼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