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금강잔월과 비섬류를 합쳐 드디어 자신의 검술로 만들어 낸 금강비섬류가 빛났다.
반딧불의 불빛 앞에 다른 불꽃은 의미 없었다.
정확하게 반으로 베인 화염 감옥이 그 형체를 유지 못 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경악한 돌폰이었지만, 그에게서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했다.
목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픽 하고 시야가 꺼진 그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당연히 죽지는 않는다.
단지, 목을 치료해야 해서 그때 동안은 저 더러운 입이 멋대로 움직일 일 없으리라.
“오오오오!”
“방금 뭔가 번쩍했다고!”
조용하던 관객들이 서발광의 마지막 일격에 흥분하여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미남인 서발광이기에 몇몇 여성들이 마치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승자 서발광.”
그사이 다트론이 승리를 선언하자 호응은 더 거세졌다.
치료사들이 올라와 돌폰을 업어 가는 동안.
서발광은 관객들의 너무나 열렬한 호응에 조금 당황하며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서둘러 대련장을 내려오자, 이번에는 청랑단원들이 뛰어와 그를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아카펠, 잘하고 와.”
“하하, 서발광 못지않게 해 줄게.”
그사이 다음 순서인 아카펠을 응원해 준 서리스는 서발광 쪽을 보았다.
서리스가 자신을 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서발광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미소 지어 주었다.
“잘했어.”
그것만으로도 서발광은 여태껏 느껴 왔던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렸다.
‘강아지 같은 녀석 같으니.’
서발광을 보며 만족한 서리스는 이번에는 이쪽이 주홍빛 기사단 쪽으로 시선을 옮겨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상당히 언짢게 변한 이바드라가 이를 살며시 갈고 있었다.
보아하니 4기사단의 완벽한 승리를 원한 모양인데.
이쪽을 얕봐도 너무 얕보는군.
서리스의 시선을 느낀 듯 아바드라가 이쪽을 보자 서리스는 히죽 하고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아바드라의 얼굴은 확 일그러졌다.
옆에 보이는 여자가 달래 주지 않았으면 바로 대결장으로 튀어나왔을 법한 모양새였다.
불같은 성격이구만.
“나도, 나도 빨리 나가고 싶은데.”
그러는 사이 대결장에 나간 아카펠을 부러운 듯 보며 도로시가 안달을 냈다.
어차피 바로 다음 차례이건만 다들 싸우고 있으니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꾹꾹 눌러 담아 놔라.’
이바드라를 보며 서리스는 그가 원하는 그 이상으로 싸워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나도 마음껏 날뛰지.’
진짜 맹수는 그렇게 곧 있을 사냥을 기대했다.
* * *
아카펠에 이어 도로시까지 3연승을 이어가자 청랑단원들이 신나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사실 53기라는 위치에 비해 겪은 일이 험했던 세 사람이다 보니.
서리스가 보기에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승리는 승리였다.
덕분에 청랑단의 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고, 연이어 나간 청랑단원들도 이 분위기를 바탕으로 승리를 쟁취해 왔다.
이래서 싸움은 사기가 중요한 거다.
연패를 당한 주홍빛 기사단이 대결장에 올라올 때마다, 중압감과 긴장으로 움츠러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청랑단원 쪽은 거센 응원 속에서 날뛰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것도.’
낮은 기수의 이야기다.
53기가 특출나 상대와 격차가 너무 난 것이지, 다른 기수들은 다르다.
청랑단과 마찬가지로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주홍빛 기사단원도 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느샌가 연승은 끊기고, 이기고 지며 엎치락뒤치락하는 결과가 이어졌다.
역시 상대도 세계 침식과 맞서고자 만들어진 집단답다.
강하다.
서리스도 종종 배울 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군더더기 없는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랑단이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각양각색의 기술이라면, 저쪽은 오로지 한 기술만을 극한으로 단련해 왔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거지만, 흥미롭네.’
평생을 남들을 우러러만 봐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보니.
무엇을 보든 배울 점을 먼저 보게 되는 서리스에게 있어서 이번 친선 대결은 값어치가 있었다.
‘세계 침식이나 맞서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툴툴거렸는데.’
경지가 높아져 시야가 트이니, 보이는 게 많아져서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는 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저 스스로 속단한 바가 실수임을 인정하며 서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사이 대결은 계속되었다.
주홍빛 기사단도 선방하고 있긴 하나 서발광을 필두로 시작된 연승 때 뼈아픈 결과를 내서인지.
점수를 따라잡기에는 차이가 너무 벌어졌다.
덕분에 청랑단은 벌써 승리한 것같이 신나 있었다.
하지만 서리스는 알고 있었다.
다트론이 벌써 친선 대결에서 승리한 듯 해이해진 단원들을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단 것을.
그가 생각하는 게 뭔지 어느 정도 보였다.
잠시 후, 몇 개 남지 않은 대결을 앞두고 휴식 겸 점심시간이 이루어졌다.
서리스가 지급받은 도시락 뚜껑을 열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다트론이 다가왔다.
“서리스, 청랑호법 대표로 네가 나가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예, 그렇죠.”
그렇게 답하며 서리스가 도시락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고 있자 다트론이 그 옆에 앉았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좀 할까 한다.”
“청랑호법과 기사단장 대결은 다른 대결과 다르게 배점을 더 높이자 이거죠?”
“……눈치채고 있었군.”
서리스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청랑단원들이 기강 풀리는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는 다트론다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저야 상관없지만, 저쪽이 받아들여 줄까요?”
“단주님께 건의하고 오는 일이다. 총기사단장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하더군.”
그럼 진행되겠네.
서리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왕 하는 거 남은 대결 점수도 올리는 건 어떨까요? 저만 열심히 하는 건 큰 의미 없잖습니까.”
“오, 좋은 생각이군. 건의해 보마.”
그리 말한 다트론은 어느새 이따 마실 술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청랑단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하여튼 아직 성인도 아닌 네가 가장 어른스럽구나. 저놈들도 널 좀 본받아야 할 텐데.”
“과찬이십니다.”
아쉽게도 이쪽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살아온 짬이 있어서.
눈칫밥 먹고 살아온 기간이 워낙 길었기에 이런 쪽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서리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다트론이 한 건의가 잘 수렴되었는지, 주홍빛 기사단 쪽이 기세충천해졌다.
이대로면 패배가 확정되어 있는 지금, 뒤엎을 찬스를 얻었으니 당연히 사기가 올라갈 수밖에.
“규칙이 좀 바뀌었다.”
그리고 반대로 청랑단 쪽은 윌리엄이 귀찮은 투로 전한 규칙을 듣고 다들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승리가 확정되어 있었는데, 대뜸 뺏겼으니 다들 화가 난 것이다.
“이런 게 어딨습니까!”
“주홍빛 기사단 놈들이 건의한 거랍니까!”
“아니, 다트론 선배가 했다.”
윌리엄이 시끄럽다는 듯 귀를 파며 대답하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너희들이 하도 희희낙락하니까. 그런 거 잖냐. 좀 얌전히 있을 것이지.”
“……다트론 청랑호법님은 저희랑 같은 소속이 맞습니까?”
“가서 물어봐라.”
“아닙니다.”
다트론의 성격은 모두가 잘 알기에 청랑단은 툴툴거리면서도 자리로 돌아갔다.
자기들도 승리에 너무 심취해 과하게 들떠 것은 알고들 있는 모양이다.
“선배들이나 응원해라. 이것들아.”
하지만 어쨌든 결국 이기면 그만.
청랑단원들이 선배 기수를 열심히 응원하자, 선배들은 씩 하니 웃으며 믿음직하게 답해줬다.
이러나저러나 다들 승리할 거라 믿고 있는 게 한결같았다.
한편, 규칙 변경을 고지받자 관객 중 판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경기 흐름이 뒤바뀔 여지가 생겼다는 사실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그러는 사이 대결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규칙이 바뀐 만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일까.
주홍빛 기사단도 이전과 다르게 더욱 거세졌다.
덕분에 대결은 막상막하를 이루었고, 그 결과 주홍빛 기사단도 역전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점수를 바짝 따라잡았다.
다들 슬슬 긴장한 건지 손에 땀을 쥐는 순간.
앞으로 두 경기.
서리스를 제외하면 마지막 경기나 다름없는 대결을 위해 한 사람이 대련장으로 향했다.
“레가놀 선배! 이겨요! 믿어요!”
“부숴 버려요! 단원최강!”
“청랑단의 위엄을 보여 주자고요!”
레일로 레가놀.
그의 차례가 온 것이다.
“다녀오세요. 패배하셔도 뒤에 제가 있으니까요.”
“그래, 잘 부탁하마.”
서리스가 넌지시 농담을 던지니, 레가놀은 평소와 같이 무뚝뚝하게 답하곤 대련장 위로 올랐다.
역시나 믿음직스러운 남자다.
“서리스 청랑호법님 누가 이길 거 같나요?”
그사이 클로나가 다가와 서리스에게 슬쩍 물어왔다.
그녀의 질문을 듣고 서리스는 레가놀 상대를 바라보았다.
레가놀보다 왜소하며, 다른 기사단원과 다르게 기다란 장검을 쥔 여성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1 기사단 소속 이스트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전생을 겪은 서리스는 저 여성을 알고 있었다.
‘후에 총기사단장 대리직을 맡고 있었지.’
총기사단 대리직까지 올라갈 만큼의 실력자.
지금도 레가놀만큼 연차가 쌓여 만약 이바드라가 없었더라면, 4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건 그녀였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여자는 워너힐 아카데미 중퇴자다.
중퇴한 이유까지는 모르나 평민으로서 워너힐 아카데미를 입학하는 데 성공한 사람 중 하나.
그 실력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모르겠어.”
그래서 서리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섣불리 레가놀의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이스트 쪽도 강자였기 때문이다.
“시작.”
그리고 그사이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다트론의 외침과 함께 맞부딪쳤다.
용호결수를 통한 무한 재생력을 바탕으로 육체를 끌어올린 레가놀은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그 덩치만큼이나 휘둘러지는 검은 위협적이었고, 그에 비해 이스트는 한없이 연약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레가놀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튀어 오른 불길과 함께 이스트의 다리가 레가놀의 턱을 거세게 쳐올렸다.
구십 도로 정확하게 벌어진 길쭉한 다리는 보는 사람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쭉 뻗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힘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얻어맞은 레가놀도 주춤거렸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듯 그가 다시금 검을 휘둘러오자 이스트는 긴 장검을 들어 레가놀과 맞섰다.
채엥!
힘은 확실하게 레가놀이 우위였다.
그러나 이스트는 기다란 장검의 면을 이용해 레가놀의 힘을 흘리곤 멸천화륜을 불어 넣었다.
화르르르륵!
검을 타고 흐르는 거센 불길이 멀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열기를 느끼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타올랐다.
마치 불의 화신이라도 된 듯한 그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을 동안.
상대하고 있는 레가놀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용호결수가 자랑하는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불꽃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했다.
레가놀이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하지만 이쪽도 괜히 청랑호법 후보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쪽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자신은 몇 번이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나는 잡초 같은 인간이다.
레가놀이 용호결수를 끌어올리고, 그에 맞서는 이스트 또한 더더욱 불길을 치솟았다.
둘의 전투가 끝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둘 다 보통 끈기가 아니라서일까.
엉망이 된 대련장에서 서로를 마주한 이스트와 레가놀이 동시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우연찮게도 두 사람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진 것도 동시였다.
누가 뭐라 해도 무승부인 상황.
청랑단과 주홍빛 기사단은 땀을 쥐고 보느라 참았던 숨을 토해 내었다.
둘의 싸움은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승부는 무승부로 양쪽 점수에는 반영하지 않겠습니다.”
다트론의 결정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 경기는.”
다트론이 입을 열자 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뚜렷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던 두 집단 간의 승부는, 마지막 결투의 참가자 서리스의 승리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었다.
그만큼 주홍빛 기사단도 판세를 엎어 보고자 필사적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채 서리스는 대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리스, 마무리해.”
“잘하고 와.”
“직계님, 박살 내 줘!”
여러 목소리를 들으며 한 차례 웃어 준 서리스가 경기장 위로 오르자, 이바드라도 따라 올라왔다.
생각 이상으로 대결이 제 뜻대로 안 돌아가서인지.
이바드라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리스는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몸을 풀 뿐이었다.
“……셀링을 통해. 그동안 네가 해 온 일들을 전해 들었다.”
어제는 서리스를 전혀 모르는 눈치더니.
‘그사이에 조사를 좀 해 왔나.’
서리스와 마주한 이바드라의 표정에서 언젠가 샬롯을 통해 본 적 있는 오만함이 보였다.
“이 몸에 비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더군.”
“그래? 걱정 마.”
서리스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걱정 말라는 그의 말에 이바드라가 살짝 의문을 품은 순간.
“네가 쌓아 온 업적은 오늘 나한테 짐으로서 부질없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