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변함이 없죠. 앞으로도 열심히······""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리 알아. 애당초 민주주의를 도입시키려는 것도 내가 빠져나가기 위한 일환이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극렬히 거부하는 지나이다. 부담감인지, 아니면 본능인지 몰라도 지도자의 자리만큼은 한사코 거부했다."
지나이 같은 부류는 대부분 독재자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당하게 빠져나올 구실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는 자연스레 지도자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앞으로 애니머즈는 정치 싸움이 활발해지겠지."
이해는 안 되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성은 못 느꼈다. 지구에서도 워싱턴 같은 특이 케이스가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간에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녀라면 감시역인 발칸도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내가 생각하는 건데 당분간 세상이 좀 혼란스러워질 것 같거든. 네가 쓴 책 때문에.""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 쓴 겁니다.""
어쨌거나 네가 아이디어를 준 거잖아.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조금 혼란스러워.""
똑똑한만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옆의 발칸도 마찬가지."
이들은 본인들을 창조한 신이 따로 있고, 그 신이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종족뿐만 아니라 민족도 다를 바가 없다. 스타비르크 민족이 숭배하던 달로스처럼, 민족마다 숭배하던 신이 많다."
원래라면 지구처럼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대전쟁의 여파로 모두 소멸했기에 기록이 넘어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을 겁니다. 비록 상세히 설명하려면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도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제쯤 터뜨릴 예정이지? 그것만 알려줄 수 있나?""
앞으로 다가올 제논 축제에서 밝힐 예정입니다.""
제논 축제라······ 얼마 안 남았네.""
이번 제논 축제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귀빈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렇게 떡밥을 뿌려대는데 안 오면 이상하겠지. 베리트처럼 바쁜 몸이라면 대리인을 내세울 수도 있고."
뭐. 어떤 진실이든 간에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겠지. 안 그래?""
거기서 털이 더 빠져도 제 책임은 아닙니다.""
나를 여기에 강제로 앉혀놓고 네 책임이 아니라고? 뻔뻔하기도 해라.""
제 말 한 마디로 평생 눌러앉게 해줄 수도 있는데······""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지나이는 방금 전까지 빈정거리는 말투는 어디 가고 군기가 딱 잡힌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서로서로 장난이라는 걸 잘 알기에 저러는 거다. 지나이 말마따나 어떤 진실이든 간에 할 일을 하면 된다."
가장 심하게 흔들릴 나라는 바로 세이비어 교국이다. 루미너스를 국교로 삼은데다가 그를 기반으로 성장했으니 뿌리부터 흔들릴 터."
지금은 조용하지만 폭풍전야라고, 케이트의 말을 들었을 때 심각할 정도로 내부가 흔들리고 있단다."
'결말부에도 악신이 등장한 것도 본래 존재하던 신들 때문이라 했으니.'"
루미너스는 세상과 인류를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이자 신이다. 당연히 신성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이라고, 그의 과거는 피와 살육으로 뒤덮여 있다."
비록 만물의 아버지가 먼저 타락했기 때문이라지만, 패륜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
이것이 밝혀져 '도덕성'에서 심한 결함이 등장하게 된다면 어찌 될 지 뻔하다."
'기독교가 그런 식으로 그리스·로마 신앙을 몰아냈지.'"
로마에서 성행하던 그리스·로마 신앙이 기독교에게 몰락한 결정적인 원인도 도덕성이다."
그리스·로마 신들은 도덕적으로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반면에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저게 뭐 중요한 거냐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세조차 야만적이라고 평가받는 와중에 로마의 시대는 오죽할까."
야만적인 시대상에서 등장한 '윤리'였으니 더욱 각광받는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정했어?""
마키나입니다.""
마키나라······ 요즘 드워프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지나이가 툴툴거렸다. 마키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산업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원래도 공장에 준할 정도로 생산력이 빨랐는데 여기에 마력 기관마저 합쳐지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다."
더구나 전차라는, 신형 무기까지 선보였으며 더 나아가 철갑선 및 비행선까지 발명하고 있다 들었다."
'그걸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만 않으면 되지.'"
애당초 전쟁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다. 전쟁을 할 바에야 광산을 하나 더 만들고 만다는 종족."
애니머즈와 마찬가지로 지도자는 만났지만 국가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다."
하루 머물다 갈 거면 따로 방을 줄게. 네 암컷들이랑 신나게 할 거지?""
······그나저나 수인은 왜 남녀를 수컷이랑 암컷으로 부르는 거예요?""
몰라? 발칸 너는 아냐?""
나도 모른다만.""
그냥 종족 특징이니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애니머즈에서의 팬사인회를 모두 끝마치고, 레오나에게 진한 사랑을 퍼부어준 후에 마키나로 떠났다."
레오나. 여기 선물.""
이건 뭐야?""
나 없을 때 동안 외로울 수도 있잖아. 대신 잃어버리면 안 돼.""
떠나기 전에 레오나한테도 은밀한 선물을 주는 건 잊지 않았다."
발정기만 아니라면 성욕이 크게 일지는 않지만, 외로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할 터."
레오나는 내가 선물을 준다는 부분에 의의를 두는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참. 부적은 잘 챙기고 있어?""
이거 말이야?""
레오나의 물음에 목걸이를 보여줬다. 목걸이는 펜던트 형식이었는데, 펜던트 안에 새싹을 보관하고 있었다."
새싹은 클라크와 이어져 있다보니 시들지 않고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어쩌면 세계수의 새싹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레오나는 새싹을 둘러보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효력은 남아있네. 문제는 없겠다.""
효력은 언제까지 이어져?""
매개체에 따라 달라. 이건 세계수의 새싹이다보니 꽤 오래 가겠지. 무기 같은 건 안 챙겨?""
손도끼 하나랑 단검 하나씩 들고 다니는 중이야.""
원래는 커다란 배틀 엑스를 들고 다닐 생각이었으나 불편하기도 하고 이미지에도 안 맞는다."
무엇보다 클라크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면 답도 없는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건강한 신체를 얻어 신성력이 모두 방어해주는데 그게 뚫린다? 만물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뜻이지."
그럴 바에야 손도끼나 단검 같이 가벼운 무기를 들고 가는 게 좋다."
손도끼는 그렇다 쳐도 단검까지?""
단검은 쓸모가 많으니까.""
쓸모도 쓸모지만 루미너스의 말을 통해 예측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건강한 정신을 얻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단검이 그것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음······ 너는 나보다 똑똑하니 괜찮겠지. 조심해.""
알았어. 너는 애니머즈에 계속 남을 거야?""
아마 곧 있으면 저택으로 돌아갈 걸? 거기에 우리 엄마도 있으니까.""
그러면 방금 내가 준 선물. 다 썼으면 마리랑 교환해. 알겠지?""
이게 대체 뭐길래?""
이해가 안 간다는 레오나의 물음에 나는 미소만 지어줬다. 충분히 자극이 되도록 여우 같은 미소를."
그 미소에 레오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을 때쯤, 나는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밤에 알게 될 거야.""
******"
애니머즈 다음으로 도착한 국가는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
모두 알다시피 마키나는 광산과 기계를 사랑하는 나라로, 일찍감치 산업 혁명에 들어선 상황이다."
다만 아직 초입 단계여서 건축물 자체는 목재 건축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체형에 맞게 작디 작은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이것만으로도 문화적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나를 곤란하게 만든 건 문화가 아니라 성대한 환영식이었다."
오셨다! 기계의 신이 오셨다!""
우리에게 지식과 영감을 주시는 분!""
가이스트의 정신적 지주! 공산주의의 아버지!""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말은 뭐야. 마치 내가 마르크스나 레닌이라도 된 기분이잖아."
이처럼 성대한 환영도 환영도 썩 곤란했지만, 수도에 진입하고나서는 한 술 더 떴다."
······전차에 탑승하라고요?""
예! 마차보다는 이게 더 안전할 겁니다!""
무슨 개선장군마냥 전차에 타서 수많은 인파를 맞이했으니까."
이쪽에서 철저히 준비한 거라서 거부할 수도 없었고,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의 아버지가 오셨다!""
기계 성자에게 축복을!""
붉은색에게 영광을! 성자에게 영광을!""
나는 레닌이 되었다."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는 모두 알다시피 대단한 기술력을 갖춘 나라다."
창의력이 인간에 비해서 약간 부족하다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수십 년 간 기술을 연마한 장인에게 필요한 건 단 한 장의 설계도라는 말처럼, 마력 기관이 창의력을 대폭 상승시켰으니."
더 나아가 마법의 기계화 즉,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기물을 만드는 것조차 드워프의 손을 반드시 거쳐야 된다."
드워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여전히 더위와 추위에 골골거리고 있었겠지."
심지어 환경적 문제도 없었다. 광산을 마구잡이로 파는 게 조금 흠이긴 하다만 그 외에는 대부분 친환경적이었으니."
더 나아가 종족전쟁 당시 인간 연합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자금까지 챙겼으며, 가이스트 혁명까지 성공해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왕실이 가지고 있던 자산을 전국에 투자해 드워프 공장들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마력 기관의 설계도까지 공유해 창의력을 끌어올린다."
앞으로 무슨 발명품이 등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탱크마저 발명한 마당에 어떤 발명품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저건 뭐죠?""
저거 말인가요? 최근에 발명하여 시험 단계에 놓인 기계입니다. 광산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사 현장에 사용될 전망이죠.""
혹시 이름이······""
굴삭기라고 지정했습니다.""
다소 조잡하지만 광산 및 공사 현장에 사용될 굴삭기부터 시작해서."
저거는요?""
곡괭이보다 더 땅을 파기 편하도록 발명한 기계입니다만······ 안타깝게도 현 마력 기관으로는 소형화가 힘든 상황입니다.""
땅을 뚫기 편한 드릴."
저거는······""
저건 석탄을 좀 더 편히 옮기기 위해 만든 기계입니다. 보시면 석탄이 어디론가 알아서 이동하고 있죠? 저 끝에는 석탄을 저장하는 저장실이 있습니다.""
석탄을 자동으로 운반시키는 기계까지."
개선 장군마냥 전차에 탑승해 위치로 갈 때까지 눈으로 본 기계들이다."
더 많은 기계들이 존재하지만 여건상 이것밖에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부분 미완성작이라 보여드리기 민망했거든요.""
그럼 저것들 전부가 완성작이라는 소리인가요?""
네. 엔진만 발명된다면 전부 실용화가 가능합니다.""
나는 안전모를 착용한 드워프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보통 엔진을 먼저 발명하고 기계가 등장하는 편인데 마키나는 정반대다. 일단 기계부터 만들고 엔진을 발명하고 있다."
공통점으로는 대부분의 기계가 광업과 큰 연관이 있다는 것. 아무래도 종족이 종족이다보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이유가 마력 기관의 공유 덕분입니다. 누구든지 마력 기관을 제작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무한한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죠.""
그, 그렇군요.""
제논 님이 가이스트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 드워프가 어떤 종족인지 다시 일깨워줬으니까요.""
저는 단지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에게 도움을 줬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이스트에게 조언을 준 것과 별개로 대공황이 터진 건 넘어가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왕의 노예 농장이었던 마키나가 해방된 건 좋다. 혁명으로 하여금 가이스트가 정권을 차지한 것도 좋다."
마력 기관의 공유 및 공산주의적 마인드가 팽배한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저 건물은 어떤 용도로 세워지는 거죠?""
그동안 마키나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초 교육을 위한 건물입니다. 또한 수많은 설계도들이 모일 장소이기도 하죠.""
아동도 저곳에서 교육을 받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동의 교육을 위한 건물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설치되고 있습니다.""
공과대학이라는 건가. 공학이라는 개념은 최근에야 생겼으니 공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확실히 가이스트가 정권을 붙잡은 후에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준 드워프 국민들뿐은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고, 장인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런데······ 저건 뭐죠?""
하지만 다 넘어갈 수 있어도 저건 못 참겠더라."
나는 손가락으로 굴삭기, 정확히는 건물 위에 달린 깃발을 가리켰다."
기계마다 국가를 상징하는 듯한 깃발이 걸려있었는데, 그 깃발의 형태가 참 뭣 같다."
붉은색 바탕에다가 드워프 혹은 광부를 상징하는 곡괭이와 망치가 교차돼 있었으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공산주의의 낫과 망치가 떠오를 테지만 마키나는 한 술 더 덨다."
마키나의 국기가 원래 저랬나요?""
아닙니다. 최근에서야 교체된 국기입니다. 원래는 곡괭이와 망치만 교차돼 있었으나 기아스 님의 아이디어로 펜 또한 넣었죠.""
······설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마 많은 국가들이 피와 강철 속 소련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제논 님의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의 눈을 착안한 거라고 당당히 말할 겁니다.""
··· ···""
하필이면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각각 붉은색, 황금색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