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답을 들은 아누만이 잠깐 생각하다가 꺼낸 말이다."
처음에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지만, 내 말을 듣고나서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대는 피와 강철 속의 전쟁을 겪지 않았다지만 군인이었다고 들었다.""
네.""
나를 놀리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방금 전까지 예의 바른 말투를 사용하던 그였지만, 어느새 말을 놓은 모습이다."
딱히 말투에는 연연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누만 입장에서 충분히 놀리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피와 강철, 그러니까 세계 2차 대전의 참상을 전부 보여줬으면서 평화를 싫어한다니."
바보라도 모순적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누만은 그거 때문에 인상을 구긴 거고."
놀리는 게 아닙니다. 아누만 씨가 걱정하신 것들이 현재 제가 살던 세계에서 진행 중이거든요.""
진행 중이라고?""
네. 뭐, 마냥 평화 때문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고인물은 언제나 썩기 마련입니다. 평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더라고요.""
지구 문명의 반은 전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강대국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자잘한 전쟁이 발생했다."
현재도 자잘한 전쟁이 발생하고 있다지만 먼 과거에 비해서는 한없이 적다."
동시대에 같은 지역, 같은 나라에서만 일어난 전쟁만 하더라도 하찮기 그지 없을 것이다."
2차 세계 대전과 이어지는 냉전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줬어요. 심지어 핵폭탄은 약소국이어도 강대국조차 재기가 힘들 정도의 타격을 입히죠.""
전쟁을 억제하는 무기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반 이상이 전쟁입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칼을 뽑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강제로 억누르고 있죠.""
내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터졌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는 한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외교로 전부 해체했다. 그 결과가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이다."
핵무기만 없더라면 세상은 여전히 전쟁의 겁화에 휘말렸을 것이다. 물론 평화 속에서 발전된 기술 및 문화도 많다."
되도 않는 사상 때문에 말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게 문제지만. 다행히 사람들도 지쳐서 온갖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아누만 씨는 제대로 된 투쟁조차 하지 않은 채 떵떵거리는 것이 싫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러면 제대로 된 투쟁으로 본인의 이권을 챙긴 사람들은 좋아한다는 거네요?""
싫어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정당한 투쟁으로 본인을 증명한 거니까.""
만약 아누만이 지구의 현 사태를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토악질을 하는 걸 넘어서 저딴 시대가 오지 않기를 빌지 않을까. 이 세상이라 해서 다르리라는 법은 없다."
제가 살던 세상은 약함을 무기로 삼았죠. 가장 기초적인 성별부터 시작해서 인종, 민족, 성 정체성 등등. 평소 약하다고 인식되거나 기피받던 것들을 무기로 삼아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투쟁조차 하지 않은 자들이 떠드는 건 허울뿐이지.""
그런데 그게 통해요. 한없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말이죠.""
페미니즘과 LGBT를 포함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 본래 인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사상이다."
투표권조차 없던 여성에게 투표권을 쥐어주고, 핍박받던 유색인종의 권리를 찾아줬으며, 기피하던 성소수자에게 존중을 심어준 사상."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무차별적으로 남발한 나머지 역으로 차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취급하려다보니 수많은 문제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것이 투쟁이라 생각하고 있죠. 평균을 끌어올리는 게 아닌, 자기 수준에 맞추기 위해 깎아내리는 행위를 말이죠.""
예를 들자면?""
애니머즈에는 전투만을 위한 집단이 있나요? 다른 종족으로 치자면 기사단 같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이요.""
일당백의 전사들만이 모여있는 히크 전사대가 있다. 나 또한 그곳 출신이었지.""
그 전사에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미안하지만 특수 훈련법이 들어가기에 말해줄 수는 없다.""
꽤 기밀이었는지 아누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확실히 특수부대의 훈련법은 기밀일 수밖에 없다."
네이비 기사단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입단 테스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알려준다."
그러나 데이브와 니콜이 몰래 알려준 바로는 또다른 훈련이 숨겨져 있다고."
미리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기에 기밀로 숨겨져 있다."
괜찮습니다. 그 훈련은 성별은 물론, 민족마다 차이를 두지 않고 진행하는 편이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적이 언제 자비를 베풀 거라고 생각하나?.""
거기에서 약자만을 위한 기준을 만든다는 거예요. 특정 부분 때문에 말이죠.""
나라가 망할 징조로군.""
참으로 적절한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괜스레 가슴이 뜨끔거렸다."
자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자들도 많지만, 안타깝게도 시끄러운 소수가 더욱 눈에 들어오는 법."
2차 세계대전 이후 기나긴 평화는 그동안 억압받던 자들의 인권을 향상시켜줬지만, 그 인권이 무기로 변해버렸다."
그때문인지 정당한 투쟁으로 올라간 자들마저 눈총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참 안타까운 현실이군.""
그렇죠. 아누만 씨가 걱정하는 세상이 딱 이런 세상일 겁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고이다 못해 썩어도 전쟁은 끔찍하니까요.""
새겨듣겠다. 덕분에 후련해지는 기분이로군.""
내 상담이 꽤 도움이 됐는지 아누만이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사나운 호랑이 얼굴에 저런 미소를 지으니 더 사납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를 해치기는커녕 좋아해줄 인물이니 나 또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었다."
고맙소. 이제 내가 할 일을 명확히 알 것 같소.""
방금 전과 다르게 다시 정중해진 말투다. 보아하니 나에게 존중심을 가진 모양이다."
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쯤, 아누만이 기습적인 질문을 가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만 하겠소. 그대는 현재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소?""
왜 저런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여태까지 투쟁 타령을 했으니 충분히 예상할만한 질문이다."
나는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
목소리.""
목소리?""
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꺼낸 말."
저는 신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아이작은 이후로도 아누만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투쟁의 본질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대화는 길어졌다."
물론 중간중간 문화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해프닝 같은 게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아누만 씨는 진취적인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력을 비롯해 능력이 다른 남자들보다 매우 뛰어난 여자요.""
깔아뭉개서 내 것으로 만들 것이오. 그것이 투쟁이지.""
··· ···""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소? 그대도 이미 본인의 능력으로 수많은 암컷을 취한 걸로 안다만?""
땀냄새가 가득한 마초니즘이라던지. 저건 개인의 성격이라 넘어갔다."
어쨌거나 아누만은 아이작과의 대화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평화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길고 긴 평화에서 발생할 병폐들을 싫어할 뿐."
그러면 민주주의는 찬성하는 건가요?""
찬성은 하겠다만 훗날을 대비해야지. 그대 말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직접 나서야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작은 이리 생각했다."
아. 아누만 혹은 그의 후손이 '강한 지도자'가 된다는 거구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토대로 정치적 올바름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모으겠다는 거구나."
정치적 역량이 어떤지는 상관없다. 호랑이 수인이 호전적이고 단순하다지만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다."
도리어 지극히 단순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어서 무슨 방법이든지 동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그런 시대까지 가려면 핵폭탄 혹은 그에 준하는 무기가 발명되어야 할 겁니다. 아누만 씨가 걱정하는 시대는 멀리 있으니 마음 편히 사셔도 돼요.""
그러면 내 후손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 그대도 경계하는 말을 남길 게 아니오?""
아마도요? 저도 기나긴 평화가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는지 똑똑히 지켜봤으니까요.""
하지만 아이작이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동상이몽이라고, 아이작과 생각하는 것과 아누만이 생각하는 것이 상이했다는 점."
종족 및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차이였으나 당장은 서로 가까이 붙어있기에 인지하지 못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자연스레 평행선을 달리게 될 것이리라."
명심해야 할 건 정당함과 합리성이예요. 공평과 공정의 차이처럼 미묘하지만 전혀 다른 부분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물론이오. 수천 년간 받아들였던 자연의 섭리를 고작 100년도 안 된 시간에 부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어······ 제 말을 이해하신 거 맞죠?""
암컷이 자식을 가졌을 때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건 의무가 아니지만, 사랑하는 암컷을 위해 제 한 몸 바치는 건 당연한 것일세. 제아무리 강한 암컷이라도 아이를 가지는 순간 한없이 나약해지니.""
이해했다고 믿을게요.""
정말이지 미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간극이다. 아이작도 떨떠름해 했으나 대강 넘겼다."
아무튼 기나긴 대화가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다가왔다. 헤어질 시간이라는 뜻이다."
아이작과 아누만 둘 모두 각자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떠났다."
이 만남이 서로의 작은 '오해'를 풀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전혀 모를 것이다."
아이작.""
응?""
네가 말했던 너희 세상의 병폐들. 그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어?""
그런 건 아냐. 원래 목소리가 더 큰 쪽이 이기는 싸움이라서.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도 지쳐서 역으로 당하고 있어. 극약처방이긴 해도 전쟁만큼은 막아야지.""
이러한 오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들아. 오늘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네. 아버지. 말씀하세요.""
제논이 나에게 이리 말하더구나. 먼 훗날 길고 긴 평화의 시대가 올 거라고. 투쟁조차 하지 않은 약자들이 권리만 외치는 세상이.""
거대한 산사태가 되어 애니머즈를 비롯한 전세계를 덮을 테지만."
우리 타이그리 부족은 그러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를 대비할 거란다. 투쟁의 본질을 일깨워주고, 증명하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멍청한 지 깨닫겠지. ""
지나이 대족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년은 능력으로 증명하고 있지. 제논이 어떻게 말했냐면······"
이것도 인간과 수인 기준으로 먼 미래의 이야기다."
아누만과의 상담이 수월하게 끝난 이후에도 팬사인회는 진행됐다."
수인은 인간과 비슷한 출산율과 다르게 인구수는 턱없이 적다."
대신 모든 수인이 애니머즈에 몰려있었기에 인구 자체는 매우 많다."
그래서 팬사인회만 하더라도 미네르바 제국과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는 중간중간 돌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단축됐지만, 애니머즈는 지극히 평범했으니."
오랜만에 뵙네요, 지나이 씨. 그런데······""
아무튼 시간이 흘러 모든 팬사인회를 끝내고 지나이와 만남을 가졌다."
지나이가 지내는 곳은 역대 대족장들이 업무를 보는 건물. 당연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초청을 받아 들어올 수 있다."
뭔가 많이 바뀐 것 같네요?""
1~2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지나이의 외모는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대족장의 업무와 민주주의 도입, 그리고 대공황의 파장으로 고생길이 열렸을 테니 피곤해 보이는 건 눈치챘다."
게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다. 전에는 하이에나답게 다소 비열한 이미지였는데 안경을 쓰니 똑똑한 악역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들을 넘어서 외모의 어느 부분에서 바뀐 느낌이다. 어느 부분이 바뀐 건지 몰라서 그렇지."
지나이는 내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착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누구 덕분에 탈모가 걸렸는데.""
네?""
탈모라고. 이 자식아. 내 풍성했던 털이 빠진 거 안 보여?""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다. 마른 것도 마른 거지만 털이 조금 빠져버렸구나."
처음 지나이를 만났을 때는 잘 먹고 잘 눕고 잘 살고 있었기에 빛깔도 좋았고 털도 풍성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간중간 빠진 부분이 눈에 띄었으며 윤기도 확 죽어버렸다. 수인이 탈모에 걸리면 저리 되는구나."
수인도 탈모가 걸려요? 처음 알았네요.""
당연히 걸리지. 아카데미에서 털이 있는 모든 종족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병에 걸리면 털이 빠진다고 들었어.""
신기하다는 내 반응에 옆에서 레오나가 부가 설명을 해줬다. 사실상 2년차까지만 재학했던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인류의 기원이 인간이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지구의 인류도 탈모 유전자를 가졌다고 했으니."
아무튼 지나이가 상당한 고생을 했다는 증거기도 하다. 물론 앞으로 더 빠질 일만 남았겠지."
흑흑. 내 아름다웠던 털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다니. 애당초 원했던 자리도 아니었는데.""
음······ 힘내세요? 어차피 민주주의가 도입된다면 자연스레 내려올 거 아니에요?""
레오나를 통해 미리 말해놓았다. 아누만도 이제 민주주의 도입에 대한 반대는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은 지나이가 아닌 그의 보좌관 겸 감시관, 발칸이 대신 답했다."
발칸도 꽤 고생했는지 풍성했던 갈기털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듯했다."
그건 차차 생각해볼 문제라오. 지나이의 통치를 마음에 들어하는 족장들이 꽤 많아졌거든.""
마음에 들어했다고요? 언제든지 끌어내리려 이를 갈고 있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랬지. 다만 대공황 당시에도 터지기 직전이었던 식량난을 해결했고, 무엇보다 부정부패를 전부 때려잡으면서 국고에 넣었거든. 덕분에 예산이 큰 폭으로 늘어나서 발전에 큰 탄력을 붙였지.""
나는 감탄하며 지나이를 바라봤다."
부정부패를 화려하게 저지른 전적이 있다보니 어떤 술수를 부릴지 다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머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잔머리와 능력을 왔다 갔다하는 것 같다."
반대로 2인자 혹은 간신의 자리에 머물렀다면 애니머즈가 크게 휘청였겠지."
지나이는 내가 감탄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헛웃음을 흘리더니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살기 위해 일했을 뿐이야. 안 그러면 내 목을 물어버릴 놈들이 사방에 깔려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