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21화 (322/763)

〈 321화 〉 교육(4)

* * *

'흑역사'라는 단어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과거나 드러나는 것조차 껄그러워하는 경험을 말한다.

흑역사를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어서 전생에서 꽤 용이하게 쓰였던 말이다. 저것만큼 지우고 싶은 과거를 축약해서 말하는 건 없을 것이다.

이걸 왜 언급하냐면 우리의 귀여운 엘프 여왕님께서 새로운 흑역사를 또 하나 갱신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교육인데 본인의 사심이 듬뿍 첨가된 교육. 본인도 모르게 속마음이 그대로 밝혀졌다.

세계수의 이슬을 어디에 발랐으면 좋겠는지, 초야를 어떻게 치렀으면 좋겠는지 등등.

지난번 엘프식 공산주의 발언과 비교했을 때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수준.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솔직히 본인이 원하는 첫날밤을 내 앞에서 밝힌 셈인데 과연 그 누가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아르웬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까지 있다.

당장 나 같아도 숨어버리다 못해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영영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지.

"저기요."

"··· ···"

"아르웬 씨?"

현재 아르웬이 그러고 있다. 세실리의 묵직한 팩트 한 방에 침몰하다 못해 흐물흐물 녹아버린 그녀.

다행스럽게도 텔레포트로 도망치진 않았으나 책상 밑의 작은 공간에 본인의 몸을 우겨넣었다.

알다시피 내가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기 위해 사용하는 책상이다. 어디 숨을 곳이 없나 둘러보더니 선택한 곳이 여기다.

공간 자체도 넓은데다가 아르웬의 체구가 작은지라 꽉 끼진 않고 널널했다. 쥐구멍이라기에는 조금 컸으나 이만해도 충분하다.

"음······"

나는 지난번 엘프식 공산주의 발언 당시처럼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아르웬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뒷모습만 보여주는 게 귀엽기도 하고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르웬의 최대 강점이라 할 수 있는 뒷라인이 내 눈을 즐겁게 만들고 있다. 가녀린 허리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는 매력적인 골반 라인.

게다가 이번에 입고 온 옷도 옆구리가 숭숭 뚫려있는 드레스라 그녀의 매력을 온전히 발산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르웬을 다시 한 번 불렀다.

"아르웬? 대답 좀 해줄래?"

"··· ···"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아르웬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얼굴이 다리 사이로 더 깊게 파고든다.

이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마리, 세실리, 아델리아 이 세 여자는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리는 팔짱을 낀 채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세실리는 무언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아델리아는 쓴웃음을.

저마다 다른 반응들에 나는 재차 머쓱한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대로 가만히 두기에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물러설 필요는 없다.

콕­ 콕­

"히익······!"

그래서 시원하게 파여있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옷이 아니라 직접적인 접촉이었기에 아르웬이 크게 움찔거린다.

쿵!

"악!"

그리고 책상에 머리를 박기까지. 나는 머리를 감싸안으며 오열하는 아르웬을 짜디 짠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외적으로는 분명 현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왕인데, 지금은 웬 푼수덩어리가 남아있다.

그 점이 매력이라 할 수 있으나 우선 오해 아닌 오해부터 풀어야 대화가 진행되지 않겠다.

"으으······"

"그러지 말고 서로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 부끄러운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등만 보여주지 말고."

정신이 번쩍 든 상황에서 한 말이라서 그럴까. 아르웬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몸을 슬금슬금 돌리기 시작했다.

그냥 책상 밖으로 나오면 될 것을 왜 안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흑역사를 갱신한 탓에 용기가 나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부분이다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조금은."

책상 밑에서 나올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 아르웬. 붉어진 얼굴과 위아래로 까닥거리는 귀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이따금씩 내 쪽을 힐긋거리고 있었으나 정작 눈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대로 대화를 진행해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기에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지 말고 빨리 나와. 얘기할 게 많은 것 같으니까."

"··· ···"

아르웬은 내가 내민 손과 내 얼굴을 서로 번갈아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뒤이어 몇 번 망설이더니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르웬의 손은 본인의 체구처럼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손 자체는 곱고 아름다웠다.

여태까지 그녀와 손을 잡아본 적이 없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다.

"······추태를 보였구나. 정말 미안하다."

내 손길에 따라 책상 밑에서 빠져나온 아르웬이 조용히 사과했다. 다만 시선은 끝까지 마주치지 못 하고 있다.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대답이 조금 늦은 것 같은데?"

내가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지켜만 보던 마리가 태클을 걸었다.

사람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그녀여서 저런 차마 변명조차 하지 못 했다. 맞는 말이거든.

그나마 다행인 건 아르웬이 또다시 책상 밑으로 기어가지 않았다는 것. 나는 눈치없이 군 마리를 한 번 째려보고는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겼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들은 가끔씩 고장난다. 그 사람 앞에 서면 허둥지둥거리거나 말실수를 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괜히 상사병이 존재하고, 그 상사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쉽게 고장내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지금의 아르웬처럼. 나는 옷깃을 꼭 붙잡고 수줍어하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듯한 은회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미의 화신이라 일컫는 엘프답게 아름다운 외모.

성숙한 이미지의 세실리와 정반대로 앳된 외모와 작은 체격.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몸매까지.

"아르웬."

"······말해라."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교육 말고 다른 이야기."

아무래도 아르웬의 속마음을 한 번쯤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내 권유에 아르웬은 시선을 들더니 내가 아닌 다른 여인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터. 이에 나도 아르웬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 너도 예상은 했지?"

"못 하면 이상한 거지. 아델 씨는요?"

"저는 도련님이 무엇을 선택하든 따를 겁니다."

"들었지?"

모두의 의견을 들은 마리가 나에게 권한을 넘겨줬다. 이제는 포기한 건지, 아니면 제논임을 밝힌 순간부터 순응하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배려와 양보가 있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바라봤다.

아르웬도 반응을 보고 무언가 눈치챈 것인지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앙 다물린 입술과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나는 부드럽게 웃어줬다가 약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르웬."

"마, 말하거라."

"발표 때도 들었겠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설령 네가 생각하는 그 가설이 맞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거든."

기만 아닌 기만 같다만 절대 거짓말은 아니다. 아르웬이 예상하는 것처럼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이 맞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나는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같은 존재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충격으로 하염없이 소설만 쓰던 작가.

물론 나의 전생이 밝혀질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알려진다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현재도 착각이 쌓이고 쌓이는 중인데 이게 업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그, 그럼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것이냐? 정말로?"

"어······"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르게 아르웬은 이상한 부분에 꽂힌 것 같다. 내 말을 듣자마자 은회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야 될지 고민했다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실리도 있는 마당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세세한 건 절대 밝히지 않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나를 보호하는 껍데기 하나가 벗겨진 느낌이다.

"그렇지? 대신 난 여기까지밖에 못 말하겠어."

"역시······ 그렇다면 '제약'이 아니라 '반동'으로 인한 후유증에 가깝겠구나. 단순한 텔레포트조차 거리에 따라 반동을 유발하는데 그정도라면······"

마법에 조예가 깊은 엘프라서 그럴까. 아르웬은 내 애매한 대답을 듣고나서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그놈의 제약조차 끝까지 따라다니는 중인데 지금부터 반동까지 따라잡는 건 아닐지 무서워진다.

"저게 무슨 소리야? 반동이라니? 엘프나 마족은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건 맞지만 반동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예를 들어 바위를 맨손으로 민다고 가정하면 근육에 무리가 가잖아. 그런 거랑 비슷해."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옆에서 마리와 세실리가 무어라 떠들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당장 그들보다는 아르웬이 훨씬 중요했으니.

나는 헛기침을 토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자 본인이 세운 이론에 빠져있던 아르웬이 헙! 하며 정신을 차렸다.

"흠. 흠. 또다시 추태를 보였구나. 미안하다."

"아무것도 아냐. 어쨌거나 아르웬."

이제부터 본론이다. 나는 아르웬을 직시하며 부드럽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좋아하는 거야?"

그 의문에 그녀가 베시시 웃으며 밝게 대답했다.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구나."

"··· ···"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대답이었다. 아르웬이 이렇게 해맑게 웃는 얼굴은 처음 본다.

나는 민망함에 뒷목을 살살 매만졌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내가 그녀를 받아들이기 직전, 아르웬이 먼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막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티를 다 냈으면서 갑자기 말하지 말라니,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싶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그사이 아르웬은 두 손을 천천히 뻗어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은근슬쩍 조물조물거리는 건 덤.

뒤이어 그녀는 베시시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수줍게 본인의 마음을 고백했다.

"내가 용기를 낼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 그때 내가 말했던 선물까지 들고 가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적어도 나에게는 있다. 여태까지 그대에게 받기만 했으니 나도 의미를 둘 수 있게 해다오."

녹아내리기 직전인 얼굴이었으나 목소리만큼은 강경했다. 나도 여기서는 한 발자국 물러서야 될 것 같다.

이에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르웬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도대체 무슨 이벤트길래 준비까지 필요한 것일까.

"아. 혹시 원하는 시간이라도 있느냐? 그대가 원하는대로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하겠다."

"음······ 그럼 한 달 정도의 시간을 줄 수 있어? 너 말고 상황을 해결해야 될 사람이 한 명 있거든."

"여자인 것이냐?"

"··· ···"

촉이 아주 좋구나. 그녀의 말마따나 레오나, 정확히는 그녀의 어머니와의 담판을 할 예정이다.

마리에게 듣기로는 레오나가 나를 다급히 찾고 있다고. 아마 그녀의 어머니도 아카데미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역시 그렇구나. 하긴, 그대처럼 세상을 구한 영웅에게 여자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 영웅호색이라고 들어보았느냐?"

"알긴 알지만 나에게 걸맞는 칭호는······"

"거짓말도 뻔뻔하게 잘하시네요, 제논 님! 우리를 보세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호칭에 거부하려던 찰나, 장난기가 발동한 세실리가 다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찔려서 말은 못 하겠네. 나는 그 외침을 듣고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반면 아르웬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약한 웃음을 흘렸는데, 그녀는 내 곁에 여자가 늘어나도 상관없는 입장인 듯했다.

"괜찮다. 나는 그대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아무튼 말이 길어졌구나. 분명 도움을 받으러 나를 불렀을텐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았거든. 굳이 제논 일대기가 아니더라도."

"······그 짓궂은 면모는 여전하구나."

아르웬도 내 말이 누구를 저격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여웠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로부터 정확히 한 달 하고도 보름 후에 보도록 하마. 알븐하임에서 준비한 선물은 기대해도 좋다."

"기대하고 있을게."

"잠깐만. 아이작."

이제 슬슬 상황이 종료되려던 찰나, 중간에 마리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고보니 난관이 남아있었다.

그에 아르웬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마리 또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여자. 심상치 않은 기류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마리였다.

"아이작과의 이야기는 끝났겠지만, 우리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렇죠?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하면 안 돼요."

"아······ 그, 그렇지."

"자! 가볼까요? 세실리랑 아델 언니도 따라와."

그리하여 다른 방으로 끌려가게 된 아르웬.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눌 건지 모르겠다만, 부디 심한 견제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 난 먼저 가보도록 하마!"

아르웬은 도망치듯이 저택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내 얼굴과 아래를 번갈아보는 건 덤이고.

왠지 모르게 다급한 그녀를 보고 의문이 들어 마리에게 무슨 말을 나눴냐고 물었더니······

"그냥 '예습'시켜준 거야. 정말 그것밖에 없어."

"······?"

"우리는 괜찮았지만 여왕님은 많이 힘들 것 같아서."

알 듯 말 듯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24권과 24.5권이 발매되었을 때.

[24권과 함께 발매된 책의 정체는······ 무려 아름다운 밤의 사랑.]

[적나라하면서도 서로 간의 심리가 세심히 묘사되었다.]

[분명 제논의 경험담일 것. 하지만 수위가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아, 맞다."

언론을 매수하는 것을 깜빡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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