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22화 (323/763)

〈 322화 〉 개안(1)

* * *

시작하기 앞서, 이 세상의 성(?), 정확히는 성문화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도록 하자. 이 세상은 지구와 달리 마나와 마법이 존재하며, 더 나아가 이종족과 신까지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시대상이 중세와 비슷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차이점이 드러난다.

힘과 명성만 있다면 귀족 못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던가, 냉장고나 마력 기관처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발명품이 있다던가 등등.

이러한 기묘한 차이점으로 인해 문화가 지구에 비해서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대표라 할 수 있는 건 너무 많아서 콕 집기 어렵지만 아까 말했듯이 성문화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자.

이곳은 17세가 된다면 모두 성인으로 취급한다.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청소년의 나이다.

몇몇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으며 생활하고, 시간이 흘러 마음이 맞는 이성과 결혼한다.

귀족의 경우는 아카데미 입학이 의무이기에 결혼 자체는 느리다. 다만 그들은 약혼을 하기에 마냥 느리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성'에 눈을 뜨게 될까? 여자들은 충격적이라 할만한 초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깨닫는다지만 남자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유전자 단위로 각인돼 있는 '본능'이 눈을 뜨게 만들 것이다.

평소 호감을 품었던 이성과의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엄한 부위에 자극이 가해질테니.

생전 처음 겪는 느낌에 부모님과 상담한다면, 부모님은 경험자로서 매우 친절하게 하나 하나 알려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특정 경위를 통해 눈을 뜨게 된다던가. 우연히 옷을 벗은 이성의 맨몸을 본다거나, 남녀가 치루는 정사를 보게 된거나, 아니면 춘화를 본다던가 등등.

다양한 경위가 있으나 이런 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람으로서 다양한 본능이자 결코 이상하지 않은 행동이다.

하지만 현재 성서로 취급받는 제논 일대기라면? 제논 일대기에 남녀의 아름다운 초야가 묘사된다면?

여기에 첨언하자면 제논 일대기는 전체 이용가다. 세상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문해력을 몇 배나 발전시킬 수 있는 책.

흥미롭고 다소 자극적인 스토리로 하여금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도서.

다른 누군가가 추천하지 않아도 반드시 정독해야 되는 성서.

그런 책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면 어떤 반응이 주를 이루게 될까?

[적나라하게 묘사된 남녀의 첫날밤. 제논과 메리의 초야는 우아하고, 진과 릴리의 초야는 숭고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이어지는 주조연들.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슬슬 이야기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론가들은 이야기 그 자체만 집중했기에 담담한 반응들을 드러냈다.

제아무리 자극적인 내용이어도 그들에게는 스토리의 흐름이 중요했으니.

하지만 중요한 건 평론가들이 아니라 세간의 반응이다. 원래라면 언론을 매수해야 되는데 깜빡하고 그대로 발매해버렸다.

정확히는 24.5권 식으로 발매한 것이지만, 언론은 대놓고 성인판이 나왔다고 떠들어댄 것이다.

[폭발적인 반응들 속에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 뒤늦게 나이 제한을 걸었으나 이미 팔려나간 책은 그대로······]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발매된 외전은 반드시 아이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십시오.]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긴 했으나, 이걸 보고 따라하는 남녀가 있을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다. 비록 제논 일대기라지만 그들에게도 '초야'는 민감하게 다뤄야되는 주제였으니.

가끔 가다 세금 또는 빚을 대신하여 본인의 순결을 바치는 처녀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종교적으로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는 문제에다가 죄악에서도 '색욕'이 있다.

관련 지식과 문화는 지구보다 떨어져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부모들의 고충 아닌 고충. 아이가 몰래 성인판을 본 후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성에 눈을 뜬 아이보다, 눈을 뜨지 않은 아이가 더 큰 문제. 그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기에 더 위험하다.]

[다행히 성범죄가 급증하지는 않아······ 오히려 욕망을 풀 수단이 늘어났기에 줄어든 감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러 소식들이 속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욕을 풀어줄 수단이 새롭게 생긴 덕분인지 성범죄가 증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인판을 통해 욕구를 풀어주어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을 뿐.

교단에서도 범죄는 몰라도 수음 자체는 죄악이라 여기지 않는다. 신들조차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며 위로하는 마당에 죄악으로 여긴다면 신을 거부하는 거나 다름없다.

물론 아이들이 몰래 성인판을 읽고 성에 눈을 뜬 경우가 많아져 부모들이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애당초 언론을 매수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 내가 사과해야 할 판이다.

어쨌거나 약간의 파장이 일었지만 사회적으로 큰 혼란은 발생하지 않은 것 같······

[초야를 치루는 부부라면 반드시 읽고 따라해볼 것.]

······은데 이건 또 뭐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신문에 나온 내용을 쳐다봤다.

[초야의 부부는 두 명 다 급하다. 하지만 남자는 인내를 가지고, 여자는 긴장을 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민감한 부위가 다르지만 제논 일대기에 나온 것처럼 공통된 부분이 있을 것.]

[과정도 중요하나 끝은 더 중요하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안아주고 온기를 느껴라.]

[책에 나온 내용대로만 따라한다면 첫날밤은 충분할 것. 첫날밤이 아니어도 따라만 한다면 더 큰 쾌락을······]

아니. 살다살다 야설을 교보재 취급하는 건 또 처음이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제논 일대기에 묘사된 것만 따라해도 반 이상을 갈 수 있다니. 여러 의미로 황당한 사건이다.

그래도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24.5권처럼 세세하게 묘사된 첫날밤의 이야기는 없었을테니까.

이곳의 성생활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일이 대다수다. 아마 그것만으로 많이 부족했겠지.

물론 나의 경험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을 그대로 담은거라 따라하는 것조차 많이 힘들다.

'도움이 됐다니까 뭐······'

출산률과 부부간의 금슬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하자.

[혹시 한 권만 더······ 첫날밤이 아닌 익숙해진 이후의······]

안 돼요. 더 쓸 생각 없어요. 뭔가 간절함이 담겨있었으나 미안하게도 씬은 더이상 없다.

만약 낸다면 전쟁 이후의 외전에서나 내겠지. 사실 씬 자체도 스토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논 일대기는 2차 창작이 허락돼 있다. 24.5권은 반드시 그림으로도 나올테니 이 사람의 욕구는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것이리라.

[이렇게 자세히 썼다는 건 즉, 경험했다는 의미. 제논이 미래인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제논에게 약혼녀가 있으나 기이하게도 엘프와 마족의 성문화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영웅호색. 이 단어보다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이 사람들이. 기승전결도 아니고 아예 억까를 하시네.

모두 알다시피 정체를 고백해도 사람들은 내가 예언자 또는 회귀자라는 걸 철썩같이 믿고 있다.

머릿속에 나온 이야기라 해도 제약 때문에 그 사실을 모조리 잊은 거라고.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경험을 겪었기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24권과 24.5권을 빌미로 다시 추측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애씬은 모두 경험담입니다.

이에 나는 신문을 내밀며 옆에 있던 여인들에게 보여줬다. 여태까지 마리, 세실리, 아델리아 이 세 명이서 나란히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자, 봐봐.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믿잖아. 전부터 이런 걸로 트집을 잡았거든."

"음······"

"이제 내 마음 이해하지?"

이런 기사가 나온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오해 아닌 오해를 풀 수 있을테니까.

세실리는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으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닌 평행 세계로 착각하고 있다.

그녀의 오해 아닌 오해는 풀 생각이 없었지만, 적어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그런 쪽이 아니라고.

"하긴 억울하긴 하겠다. 네가 부정하든 말든 이 사람들은 안 믿을테니까. 약간이지만 이해는 가."

다행히 내 설득이 통했는지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정체도 밝혔겠다, 앞으로 이런 기사들이 나온다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도 풀릴······

"글쎄? 난 이해가 가는데?"

······텐데 왜 우리 마리는 초를 치는 걸까. 나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끼며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뺨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시선이 쏠렸다는 걸 직감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나랑 할 때도 능숙했거든. 제논 일대기에 나온대로 해줬어. 그리고 기절까지 했지."

"능숙했다고?"

"응. 원래 남자들은 첫날밤에 급해서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들었거든. 그런데 아이작은 아니었잖아?"

"듣고보니 그렇네?"

"저도 그랬습니다."

마리의 신빙성 높은 말에 세실리와 아델리아가 각각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건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아.'

그걸 다 따라한 게 문제였구나. 전생의 기억은 도움이 되는데 제논 일대기도 그렇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아이작."

"··· ···"

"왜 그렇게 잘했던 거야? 내가 첫 여자 맞지? 혹시 나 몰래 딴 여자 만났거나······"

"맞다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네가 첫 여자야. 이건 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

"흐음······ 거짓말이 아니어서 더 수상한데?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 ···"

배운 게 아니라 봤어.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

제논 일대기에 나온 주조연들의 초야가 큰 파장을 일으켰을 때,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루미너스를 조각한 석상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신성력을 품었는지 황금빛 기운이 일렁였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경건한 자세로 기도 중인 여인은 다름아닌 케이트 추기경.

신앙심이 투철한 그녀답게 늘 그렇듯이 예배를 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달랐다.

온화한 표정이 아니라 고뇌에 잠겨있는 얼굴. 살짝 좁혀진 미간과 슬퍼보이는 눈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고민이 있구나,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야.]

케이트와 접신한 루미너스가 특유의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미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눈치챈 그였지만, 미리 발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 고민은 스스로 꺼내야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케이트는 루미너스의 질문을 듣자마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루미너스 님. 저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놀랍게도 죄악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케이트. 죄악을 고백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추기경이, 그것도 세이비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인 그녀가 고해성사를 한 것이다.

루미너스는 그녀의 고백을 듣고나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느냐?]

'아이작 님께서 발간하신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케이트는 한동안 말하기를 망설였다가, 가까스로 죄악이 무엇인지 고백했다.

'아이작 님에게······ 품어서는 안 될 욕정을 품었습니다.'

[··· ···]

뒤늦게 눈을 떠버린 성직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죄악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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