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이후로 드미트리와 다양한 대화를 주고 받았으며 그중 가장 심도 깊게 파고들었던 분야는 단연코 역사였다.
드미트리는 레킬리스의 가주인만큼 폭넓은 지식을 자랑했으며 나 또한 교수 수준은 아니더라도 전혀 꿇리지 않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끊길 일은 없었으며 오죽하면 마리가 지루함을 표출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특히 드미트리는 타 국가의 문화에 대해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문화가 생겨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어떤 형태를 띄고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줬다.
나는 예상치 못한 기회에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평소 갖고 다니던 마법필과 수첩을 꺼내 열심히 기록했다. 아무리 또래에 비해서 많은 책을 읽은 나여도 타 국가의 문화를 세심하게 파악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자네는 평소에도 펜과 수첩을 들고 다니나?
내가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마법필을 보며 한 쪽 눈을 치켜떴다.
마법필을 보기보다는 평소 수첩에 기록하는 버릇을 지닌 내 습관에 흥미를 지닌 듯했다.
나는 잠깐 기록하는 것을 멈추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중요한 정보를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는 습관을 갖고 있거든요."
"정말 훌륭한 습관을 들였군. 그런 점을 우리 딸도 배워야 하는데 말이야."
"흥. 전 그래도 한 번 들은 건 안 잊거든요?"
드미트르의 쓴소리에 마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만 하면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니 그녀로서는 불평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애가 나한테 노트를 빌려달라 했어?"
"야!!"
물론 내가 쓸데없는 설명을 하자 곧바로 고함을 쳤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 하고 얼굴을 잔뜩 붉은 채 씩씩거리고 있는 마리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드물게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마리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지 못 하고 있었다.
똑- 똑-
[주인님. 이제 곧 점심 시간입니다.]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미트리는 물론 나 또한 손님방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시간을 확인해보니 점심 시간이 다 되어간다.
세바스찬도 내가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만에 하나 확인 차에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 같다.
드미트리는 슬슬 점심 시간이 다가오자 턱을 매만지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정말로 점심도 먹지 않고 돌아갈 셈인가?"
"네. 하루 빨리 가족을 만나고 싶거든요. 바깥에서 테이크 아웃을 하고 갈 생각입니다."
"굳이 돈 들일 필요 없이 우리 요리사가 해준 음식을 가지고 가게나. 내 따로 말하도록 하겠네."
"그래주시다면 저는 감사합니다."
"세바스찬."
내 승낙에 드미트리는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바스찬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뒤이어 세바스찬이 안으로 들어오고 드미트리의 곁에 다가왔다.
드미트리는 정갈한 자세로 자신의 옆에 선 세바스찬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 친구는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복귀하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어. 대신 요리사에게 테이크 아웃처럼 간단하게 먹을 걸 준비하라고 해둬. 보아하니 마차에서 먹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내 집무실에 들려서 '리무버'를 가져다 주게나. 아마 서랍에 새 리무버가 있을걸세."
"예."
세바스찬은 드미트르의 지시를 받고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문 밖으로 나가는 세바스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공작님. 리무버가 무슨 물건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좋아할만한 물건이라고 해두지."
"제가 좋아할만한 물건이요?"
"음... 확실히 네가 좋아하긴 하겠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마리가 거들어줬다. 이탓에 무슨 물건인지 감을 잡기가 더 어려웠다.
이윽고 또다시 약간의 시간이 흘러, 세바스찬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 바탕에 길쭉한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어딘가 익숙한 물건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동안 드미트리는 세바스찬에게 물건을 전달받아 나에게 보여줬다.
"이게 리무버라는 물건일세. 자네의 마법필처럼 안쪽에 마법 술식이 담겨있는 물건이지."
"무슨 용도로 쓰는 겁니까?"
"아까 자네가 기록한 수첩 있지? 여기 있는 버튼을 누르면서 한 번 갖다 대보게."
드미트리는 설명보다 직접 쓰는 것이 더 좋을거라 판단했는지 나에게 물건을 전달했다. 나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가 전달한 물건을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몽둥이처럼 생긴 물건이다. 두께가 엄청 두꺼운 연필처럼 생겼다고 묘사해야 할까.
나는 점점 솟아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물건을 펜처럼 쥐며 수첩에 갖다 대었다. 수첩에는 아까 전 드미트리가 알려줬던 지식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 위치해 있는 버튼을 누르자 놀라운 현상이 펼쳐졌다.
"어?"
사라졌다. 마법필로 기록돼 있던 검정색 글씨가.
정확히 끝부분에 갖다 댄 곳에만 글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지우개 또는 화이트로 지운 것처럼 종이가 깔끔해졌다.
"리무버라는 마법 아이템일세.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펜으로 쓴 기록을 지울 수 있지."
내가 망연한 얼굴로 글씨가 사라진 수첩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앞쪽에서 드미트리가 설명해줬다. 이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드미트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의 얼굴과 마주하다가 서둘러 다른 글씨가 지워지는지 확인했다. 그의 말마따나 한참 전에 쓴 글씨는 지워지지 않았으나 방금 전에 썼던 기록은 모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다.
이것만 해도 나에게는 말 그대로 보물 중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되돌렸다.
마법필만 해도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하는데 이 리무버라는 아이템도 그에 걸맞는 가격대를 자랑할터. 아무리 공작가라지만 이걸 선듯 선물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왜 저에게 주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물었다. 나는 리무버를 손에 꽉 쥐면서 드미트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떻게든 리무버를 갖고 싶다는 내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냈으며 만약 그가 합당한 거래를 제안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는 있다.
드미트리도 내가 이걸 갖고 싶다는 걸 눈치챘는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미소를 짓자 살짝 긴장하며 부디 이상한 제안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냥 선물이라네. 별 이유는 없어."
이윽고 드미트리의 입이 열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뉘앙스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덥썩 받아먹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선물이라도 이건 저에게 너무 비싼 아이템입니다. 마법필은 마나를 잉크로 치환하면 그만이지만 리무버는 더 복잡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자네의 말이 맞아. 마법필이 1의 가치를 지녔다면 리무버는 10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역시 내 예상대로다. 이 리무버라는 아이템은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한만큼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했다.
물론 제논 일대기로 벌어들인 수익을 생각하면 기꺼이 제 값을 주고 사겠지만, 선물은 아니다. 선물로 받기에는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이에 내가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 리무버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드미트리는 내 행동을 보자마자 울림통이 큰 목소리로 제지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선물해주는 것이니.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저에게 너무 비쌉니다."
"그래도 우리 레킬리스 공작에게는 푼돈이나 다름없지. 좋은 말로 할 때 받게나. 마리에게 역사 공부를 시켜줬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레킬리스의 가주가 저렇게 나오는데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기쁨을 숨길 수가 없어 입꼬리가 자꾸 실룩거렸다.
이런 마법 아이템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횡재인데 심지어 선물까지 받았다. 한 번 잘못 쓰면 원고지 자체를 버려야했던 나로서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좋아?"
실룩거리는 내 입꼬리를 보았는지 마리가 한 마디 건냈다. 나는 리무버를 두 손으로 꽉 쥐며 행복함을 담아 대답했다.
"응."
"네가 애처럼 기뻐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좋아하는 건 정말로 좋아하는 성격이구나."
마리의 분석처럼 나는 좋아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버지에게 마법필을 선물 받았을 때는 기쁨과 뭉클함이 섞여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심정은 지금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니 내가 다 기쁘군. 원한다면 다른 것도 줄 수 있네."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과분한 선물입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하자 드미트리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과분하다라... 재미있는 말이로군."
*****
어디까지나 방문이 목적이었다는 아이작의 말처럼, 그는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레킬리스 저택을 떠났다.
떠나기 전, 마리가 아쉬움을 담아 하룻밤만 머물면 안 되냐고 부탁했으나 아이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과 재회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예의에서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키스해줘."
"기꺼이."
결국 드미트리가 마차를 부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키스하는 걸로 아쉬움을 대체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키스 타임이 흘러가고, 아이작은 드미트리가 따로 불러준 마차를 타고 고대하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마리는 아이작이 탑승한 마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택의 정문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작을 못 본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가씨.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알겠어요."
이윽고 마차가 공작가 대문을 지나가고,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리는 세바스찬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여전히 아쉬운지 그녀는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봤다.
단단하게 닫혀있는 대문 밖으로도 아이작이 탄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후우..."
마리는 벌써부터 닥쳐오는 듯한 그리움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스 다음으로 그 말랑말랑한 볼을 깨무는 건데 시간이 없었다.
뒤이어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왔을 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쉬워하는 표정이구나."
드미트리였다. 그는 정문 앞에서 뒷짐을 진 채 마리와 세바스찬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작으로서 체면이 있었기에 아이작을 직접적으로 배웅하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정문까지는 함께 데려다줬다.
그동안 마리는 드미트리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티났어?"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기분도 모르는 건 말이 안 되지."
드미트리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마리가 피식 웃었다. 대외적으로 공작이니 뭐니 하면서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드미트리이지만 마리의 눈에는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빠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세바스찬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 손짓에 세바스찬은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정문 앞에는 마리와 드미트리 부녀만이 남게 되었다. 마리는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드미트리에게 질문했다.
"아빠. 아빠도 아이작이 누구인지 대충 알고 있지?"
다시 말하지만 마리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아이작과 드미트리의 대화 속에서 일종의 위화감을 느꼈고, 리무버를 선물해줬을 때는 확신을 가졌다.
드미트리는 아이작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구나라고. 다행히 티를 내지 않은 덕에 아이작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사이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마리. 너도 알겠지만 나는 황제 폐하의 곁을 보좌하는 레킬리스 공작이란다. 제국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나에게 전달되지. 그게 설령 황태자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해도 말이야. 이전부터 따로 조사한 것도 있고."
"언제부터 알았어?"
"확신을 가진 건 최근이었지. 덕분에 편법을 부리지 않도록 법을 재정해야할 것 같더구나. 이건 탈세로도 악용될 여지가 충분하니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마리가 살짝 내려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비록 철없는 자신의 아빠지만 그는 레킬리스 공작이다.
아이작에게 질문을 했던 것처럼, '펜을 쥔 사람들' 중에 최고의 위치에 당당히 앉아있는 사람. 그러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이작이 마음에 들었다고한들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모른다. 만약 쓸데없는 짓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마리가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하며 불안해하고 있을 때, 디미트리가 묵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단다. 개인은 몰라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서는 매우 위험하니까. 하지만 몇 번 대화를 하다보니 가만히 놔두어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더구나."
"왜?"
"그 애가 말한 것처럼 세상이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억지로 막아봤자 우리에게만 큰 피해가 올 거야. 흐르는 강물을 억지로 막을 수는 있어도 언젠가 둑이 터지는 것처럼 말이지. 그래도 대비는 하는 게 좋을거야."
그리 말한 드미트리는 마리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네가 그 애의 여자친구이잖니? 공작으로서도 한 명의 아빠로서도 찬성이다만 만약 그 애가 이상한 짓을 하면 다 말하렴. 내가 역으로 조져버릴테니."
"...아빠."
마리는 드미트리의 질 낮은 농담에 불안함도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봤다. 참고로 공작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저 경박한 말투는 전부 다 자신의 엄마에게 옮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미트리는 마리를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혼인은 언제 하고 싶니? 원한다면..."
"지금 당장."
"... ..."
"당장 하고 싶으니까 아이작의 저택으로 혼담 신청서 보내줘."
마리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을까.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겠군.'
드미트리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 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냥 편지나 보내야지. 아빠 정도면 하루만에 도착하게 만들 수 있지?"
"... ..."
마리의 방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