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드미트리가 나에게 말한 '펜을 잡은 사람'도 비슷하다. 은유적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펜으로 작품을 쓰는 문학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문을 작성하는 기자일 수도 있다.
허나 우리는 여기서 드미트리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드미트리는 미네르바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직위를 가진 공작이며, 자연스레 '정치'와 큰 관계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드미트리가 언급한 펜을 잡은 사람은 '정치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니 모두 해당된다고 보아야 옳겠지.
무엇보다 나는 드미트리가 어떤 의도를 담아 질문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치다 못해 서서히 일상 속에 녹아들기 시작한 책, 제논 일대기를 말하는 것일 터.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책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으니 펜을 잡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주의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펜의 위력을 실감하고 싶다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지구인이라면 절대 모를리 없는 이름이자 제 2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 히틀러가 있다.
히틀러는 펜의 위력을 극대화시켜 독일 전체를 세뇌시켜 자기 멋대로 이용했고, 더 나아가 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 그 전쟁 하나로 유럽 전역이 화마에 휩싸였으며 훗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거인을 깨우는데 일조했다.
단순히 나라 하나만으로도 이런 참상이 발생하는데 만약 영향력이 세계 전체라면?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판타지 세상이다. 마나, 마법, 몬스터, 그리고 인간이 아닌 종족까지 존재하며 사회 문명이 중세에 지나지 않는 곳.
사회가 몇 단계 더 진보한 지구조차 선동 하나로 끔찍한 역사가 새겨졌는데 이곳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는 이미 '마족'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자기 수중에 넣은지 오래다.
만일 제논 일대기의 저자, 그러니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족이라는 단련된 검으로 패악질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미쳤다고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단,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 드미트리처럼 타인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제논 일대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 폭탄 그 자체이며 자칫 잘못하다간 공멸할 수 있는 위험 요소다.
게다가 드미트리는 레킬리스 소속이다.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본다는 본인의 말처럼, 역사에 한해서는 그 누구보다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가문.
역사에서 얻은 바가 많을테니 펜을 쥔 자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부분을 고려하여 나에게 질문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리고 그걸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의미로 질문한 건지 알고 있나?"
드미트리는 질책이 아닌 흥미와 기대를 담아 묻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쳐도, 역사 전체를 보면 불안 요소가 아니라 결국 시대의 한 흐름에 불과하다. 전생의 히틀러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50년이 지나도 그 영향은 끝까지 잔존했다.
게다가 이 세상에도 비슷한 역사가 존재한다. 바로 지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족전쟁'.
전생으로 치자면 2차 세계 대전 버금가는 대전쟁이며 그 영향력은 500년이 지난 현재도 남아있다.
"공작님이 말씀하신 펜을 쥔 자는 여러 의미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말 그대로 소설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치인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직접적인 '무력'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게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잘 아는군."
"그리고 현재 세상을 바꾸는 펜은... 제 얄팍한 지식으로는 제논 일대기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문화계에 족적을 남기는 수준이 아닌, 또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소설을요."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 낯부끄러운 평가이지만 신문의 평론가들이 위처럼 평가해준 거다. 난 단지 그들의 말을 빌린 것밖에 되지 않는다.
드미트리는 내 설명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인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을 이어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펜을 쥔 사람들로서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만큼 강력합니다. 마족의 인식을 바꾼 것도 모자라 칠죄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여 신학을 다시 정론시켰죠.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따라 그 대상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지난 번에는 귀족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썼지. 다행히 귀족의 어두운 면뿐만 아니라 밝은 면을 함께 썼기에 큰 파장은 없었다네."
"네. 이처럼 제논 일대기는 세상을 천천히 바꾸는 중입니다. 마족의 인식이 달라지니 그들을 환영하는 국가도 많아졌고, 자연스레 교류로 이어져 외교적인 이익을 챙기는 국가가 많아졌죠."
"그리고 최근에는 헤일로 아카데미에 헬리움의 공주가 입학했다네. 5년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꿈도 꾸지 못 했던 일들이 현실에 하나 둘 씩 나타나는 중일세."
뒤이어 드미트리는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독자 중의 한 명이지만,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어. 그러니 절대 무시하지 못 하지."
"... ..."
"세상이 한순간에 변화하면 어떤 참상이 벌어지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드미트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족전쟁 관련 서적을 지목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이 급변한다는 건 그 과정이 혼돈 그 자체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굳이 2차 세계대전처럼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가장 큰 예로 '산업혁명'이 있으며 이건 말 그대로 세상을 급변시켰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시간'이 늘어났으며 동시에 전세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제국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수많은 나라가 약탈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세상이 급격하게 변화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며 펜과 칼이 소리도 내지 못 한 채 간단히 부러지게 된다. 변화는 그만큼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니.
레킬리스 공작은 현재 진행 중인 제논 일대기도 그럴 거라 판단하는 중이다.
역사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잘 꿰뚫는 사람이니 제논 일대기를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강력한 펜대로 취급하는 중이다.
"세상이 변한다는 건 단순히 발전만 꾀한다는 게 아니야. 사회적으로도 좋던 싫던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 마련이지. 과거에는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이라는 개념이 없었어. 우리도 처음에는 엘프를 모방하여 의회와 휘하의 대신들, 마지막으로 뿌리가 되어주는 백성들밖에 없었지."
"... ..."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종족전쟁이 발발하여 지금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네.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 이 세 계급으로 말일세. 하지만 이것조차 문제가 많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테르스 왕국에는 제이로스 혁명마저 발생했다네. 심지어 최근에는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하자 시위대까지 결성했고. 자네는 정녕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에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펜대를 잘못 눌리게 되는 순간 끔찍한 비극이 발생할텐데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부할텐가? 나는 너무 낙관적이라 생각하네만."
왠지 모르지만 드미트리가 나에게 직접적인 경고를 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네가 펜대를 잘못 눌린다면 내가 직접 너를 조져버리겠다고.
하지만 그의 걱정과 우려와 달리 나는 순전히 취미로 제논 일대기를 쓰는 것 뿐이다. 세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일은 결코 없을거라 장담할 수 있다.
단, 제논 일대기가 이미 세상을 변화하고 있는만큼 '책임'을 져야하는 건 변함이 없다. 드미트리는 그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내가 저자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건가?'
일단 이건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꺼냈다.
"낙관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이미 몇 번 발생했던 현상입니다. 사회가 변하면 '사람'도 자연스레 변화하게 되는 법이죠. 물론, 처음에는 잡음이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던 지식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며 미지를 탐험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를 맞이해야 발전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입니다."
"흠."
"공작님도 역사를 사랑하시니 잘 알고 계시겠죠. 종족전쟁 당시에 우리 인간이 엘프와 대항하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미네르바 제국이 건국되었는지. 당시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변화겠지만 그건 엄연히 '과거'의 일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미 지나간 일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죠."
내가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불과 50년 전만 해도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광복을 맞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으며 참혹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런 전쟁이 터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곳곳에 전쟁이 흔적이 남아있긴 하나 서울의 모습을 보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거'를 그때 당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
나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인 드미트리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마저 이었다.
"미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로만 생각할 겁니다. 당연하게도 받아들이는 과거로 말이죠."
"... ..."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럽겠지만, 결국 기나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담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이 보면 그저 그렇구나라며 자연스럽게 넘기는 역사로."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일 모두 역사적인 관점을 보자면 전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군. 그러니 가만히 방관하던 대항을 하던 전부 의미가 없다는 거고.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역사적인 관점이고 현실적으로는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후대에게 보다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죠."
"흠."
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드미트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동안 바싹 바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쥐어짜낸거라 당분이 부족해진 기분이다. 차를 마시니 달콤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자네의 생각은 잘 알겠네.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드미트리가 잔잔한 미소를 띄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은 뒤에 대답했다.
"재미있게 들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제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게 한계입니다."
"아닐세. 덕분에 고민 하나가 해결된 기분이거든.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네. 사실 이게 본론이자 제일 중요한 부분이거든."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언급해서일까. 나는 아까보다 더욱 바짝 긴장하며 그의 입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렸다.
뒤이어 드미트리는 깍지를 낀 손을 얼굴에 대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사귀는 건가?"
"... ..."
"이건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우리 딸이 고른 남자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서 말이네."
공작으로서 면모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딸바보 아버지만이 존재했다. 나는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몰라 옆에 앉은 마리를 힐긋거리니 그녀는 자기가 다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는 중이다. 두 손을 얼굴에 파묻은 걸 보아 어지간히도 창피했던 모양.
이에 나는 헛웃음을 참지 못해 피식 웃고는 솔직담백하게 대답했다.
"예뻐서요."
"야! 대답하지 마!"
대답하자 옆에서 마리가 빼액 소리쳤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에 충분할텐데 여기서 드미트리가 한 술 더 떴다.
"음... 솔직한 대답이군. 우리 딸이 엄마를 닮아 예쁘긴 하지."
"아빠! 좀! 제발!"
마리는 거의 울부짖는 지경에 이르렀다.